임로(任魯)


임로(任魯)                                                                       PDF Download

 

로(任魯, 1755∼1828)는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관직은 의금부도사, 신령현감, 충원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대사간 임종주의 아들인데, 부친이 당시 세도가였던 홍국영(洪國榮, 1748∼1781) 때문에 단천(端川)에서 사망하자, 벼슬을 단념하고 학문에 전념하였다가, 다시 관직에 나갔다. 하지만 1822년 충청좌도 암행어사(暗行御史) 서좌보(徐左輔)에게 무고를 당하여 유배를 간 뒤에는 일체의 세상사를 등지고 두문불출하면서 오로지 독서와 수양으로 남은 여생을 보냈다. 그는 임성주(任聖周)를 스승으로 모시고, 그의 주기론(主氣論)을 계승했다. 임로는 임성주(任聖周), 임정주(任靖周), 임헌회(任憲晦)와 함께 조선 후기 대표적인 주기파(主氣派) 유학자에 속한다.

 

1755년(1세, 영조 31년)
대사간 임종주(任宗周)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풍천(豊川, 지금의 황해도 송화)이다. 자는 득여(得汝), 호는 영서거사(潁西居士)이다.

 

1777년(23세, 영조 1년)
대사간 종주(宗周)까지 역임한 아버지가 당시의 세도가인 홍국영(洪國榮, 1748∼1781)에게 몰려 단천(端川, 지금의 함경남도) 유배지에서 사망하였다. 아버지가 그곳에서 사망한 뒤로는 벼슬을 단념하고 오로지 학문에만 전력을 쏟았다. 이 때문에 가정 형편이 빈곤해졌다.

 

1809년(54세, 순조 9년)
계속되는 조정의 부름을 받고 제용감부봉사(濟用監副奉事)가 되었다. 이후 상서원직장(尙瑞院直長)을 거쳐, 한성부와 사복시의 주부가 되었다. 나중에 의금부도사와 경모궁영(景慕宮令)을 거쳐, 외직으로 나가 신령현감, 충원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현감으로 재직 시에는 지방의 아전이나 향토 양반들을 잘 제압하여 지방행정질서와 풍속을 바로잡았다.
이즈음 과거를 포기하고 서울로 올라 온 이항로(李恒老)와 학우 관계를 맺었다.

 

1819년(64세, 순조 19년)
보은 군수(報恩郡守)로 재직할 때, 다음과 같은 공문을 중앙에 올렸다.

“본 보은군 속리면(俗離面)에 사는 과부 40세 유씨(柳氏)가 지난 12월 24일 밤에 호랑이에게 물려 사망하였고, 같은 면에 사는 과부 36세 윤 소사(尹召史)가 같은 달 30일 밤에 호랑이에게 당하여 사망하였다. 사각면(思角面)에 사는 어린 학생 20세 김은갑(金恩甲)은 이달 초4일 밤에 호랑이에게 물려 사망하고, 같은 면에 사는 양인(良人) 한학실(韓學實)의 처(妻) 30세 김소사(金召史)도 이달 초7일 밤에 호환(虎患)을 당하여 사망하였습니다.”

(각사등록(各司謄錄)「충청병영계록(忠淸兵營啓錄)」)

 

이러한 보고를 받은 승정원에서는

“나쁜 호랑이가 제멋대로 다니며 인명(人命)을 해쳤다니 매우 놀라운 일이다. 포수(砲手)를 많이 징발하고 또 함정과 노(弩)를 설치하여 반드시 그 나쁜 호랑이를 잡아서 백성들에게 피해가 없게 하라.”

고 하명하였다.

 

1820년(65세, 순조 20년)
충원현감(忠原縣監)으로 근무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충원현은 충청도를 말한다. 충청도는 1628년(인조 6)에 괴산, 충주 지방에 역모가 발생하여 ‘공청도’로 강등되었다. 그 뒤 다시 공주에서 역모 사건이 발생하여 1646년(인조 24)에 ‘홍청도’가 되었고 그 뒤 7년(10년)만인 1653년(효종 4)에 충청도로 회복하였다. 이후에도 다시 여러 번의 명칭 변경이 있었다.

 

이 해 4월, 다음과 같은 보고를 중앙에 올렸다.

“충원현 엄정면(嚴政面)에 사는 양인(良人) 이귀득(李貴得)의 아들 이상운(李尙云) 13세 아이가 지난 3월 17일 밤에 호랑이에게 당하여 사망하였습니다.”

이해 5월에도 다음과 같은 글을 중앙에 올려 보고하였다.

“충원현 산척면(山尺面)에 사는 기병(騎兵) 노일천(盧日千)의 처 사비(私婢) 35세 계절(癸切)이 지난 4월 17일 밤에 호랑이에게 당하여 사망하였습니다.”

(충청병영계록(忠淸兵營啓錄))

이 해에 단양 군수(丹陽郡守) 성진묵(成進默)도,

“단양군 서면(西面)에 사는 어보(御保) 박득손(朴得孫)의 아들 25세 박정운(朴丁云)이 이달 초3일 밤에 호랑이에게 물려 사망하였습니다.”
라고 보고한 바 있다.

 

1822년(67세, 순조 22년)
임로의 정책으로 피해를 입은 세력들이 반감을 품고 충청좌도 암행어사(暗行御史) 서좌보(徐左輔)에게 고자질했다. 결국 임로는 지방을 잘못 다스린다는 억울한 죄명을 쓰고 충청도 진천(鎭川)으로 귀양을 갔다.

 

1823년(68세, 순조 23년)
누명이 벗겨져 석방되었다. 하지만 임로는 그 뒤, 일체의 세상사를 등지고 두문불출하면서 오로지 독서로 남은 여생을 보냈다. 그 뒤 그는 여러 차례 나라의 부름을 받았으나 세상의 부귀영화에 뜻을 두지 않고 진리탐구와 실천, 수양만 열심히 하였다.

 

1828년(73세, 순조 28년)
사망하였다. 아들로 목사(牧使)를 역임한 임익상(任翼常)이 있다.

 

<참고문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임로」, 각사등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