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시경(具時經,1637-1699)


 

구시경(具時經,1637-1699)                                  PDF Download

 

1637년(인조 14)~1699(숙종 25).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관은 능성(綾城). 호는 독락재(獨樂齋), 자는 제백(濟伯)이다. 구시경의 아버지 구몽협(具夢恊)이 1636년 병자호란 때 겨울 해주로 피난하였다가 이듬해 정월 그를 낳았다. 어려서부터 특이하여 아무리 달래도 울음을 멈추지 않다가도 문자를 보여주면 눈을 뜨고 좋은 기색을 보여 사람들이 모두 기이하게 여겼다고 한다. 11세에 처음 학문을 시작하여 한시도 게으르지 않아 해가 갈수록 학문이 크게 나아졌으며‚ 스승 없이도 스스로 깨우친 바가 많아 보는 사람들이 감탄하였다. 부친의 친우인 한필구(韓必久)가 그의 자질을 보고 자신의 아이들과 함께 수업하도록 하였으며‚ 그가 안악(安岳)의 수령으로 나갔을 때 구시경과 동행하였다. 15세 되던 1651년 수년 동안 그를 지켜보던 한필구가 뛰어난 재주를 아껴 일가인 한여태(韓如泰)의 딸로 베필을 삼게 하였다. 이후 최유연(崔有淵)이라는 문장가에게 배우다가 16세에 당시 노론의 영수이자 주자학의 대가인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을 스승으로 섬기며 그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이후 30여 년간이나 송시열의 가르침을 받아 학문에 정진하였다. 이로부터 구시경은 문인의 구습을 버리고 성리학에 전념하였다. 당시 조근(趙根)‚ 송상민(宋尙敏)‚ 이담(李橝)‚ 윤명우(尹明遇) 등과 교유하였으며‚ 1675년 1월 송시열이 예송(禮訟) 문제로 덕원에 유배되자 따라가 모시었다.

예송논쟁은 효종과 효종비 인선왕후에 대한 계모 자의대비의 복상기간을 둘러싸고 현종, 숙종대에 발생한 서인과 남인간의 논쟁이다. 조선 후기에 차남으로 왕위에 오른 효종의 정통성과 관련하여 1659년 효종의 승하 시와 1674년 효종의 왕비인 인선왕후의 승하 시에 두 차례에 걸쳐 일어났다. 전자가 기해예송(1차)이고 후자가 갑인예송(2차)이다. 서인은 효종이 적장자가 아님을 들어 왕과 사대부에게 동일한 예가 적용되어야 한다는 입장에서 1년설과 9개월설을 주장하였고, 남인은 왕에게는 일반 사대부와 다른 예가 적용되어야 한다는 입장에서 3년설과 1년설을 각각 주장하여 대립하였다. 당초 허목, 윤휴와 송시열의 예론대결로 흘러가던 중 윤선도가 송시열은 효종의 정통성을 부정했다고 지적하였고, 이 사건을 계기로 예송은 토론에서 이념 대립으로 격화된다.

이처럼 서인과 반대 세력인 남인 사이에서 예송 논쟁이 벌어지자 은둔생활을 하며 학문과 저술에 힘썼다. 그러다가 1679년(숙종 5) 예송 논쟁에 연루되어 강원도 이천으로 유배되었다. 유배 생활에서 풀려난 후 산릉감동관(山陵監董官)‚ 홍성판관(洪城判官) 등의 여러 벼슬을 거쳐 1696년(숙종 22) 연천현감(漣川縣監)을 지냈다. 1699년(숙종 25) 임지인 연천에서 죽었다. 저서로는 독락재유고(獨樂齋遺稿)가 있다.

구시경의 시문집 독락재유고는 5권 2책으로 신연활자본이다. 구시경이 사망한 후 200여년이 지난 1886년(고종 23)에 그의 7대손 구양서(具陽書) 등이 구시경의 유문(遺文)을 정리하여 간행하였다. 권두에 송근수(宋近洙)의 서문과 권말에 구양서와 8세손 구완회(具完會)의 발문이 있다.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책의 일부를 필사한 독락재문집이 규장각 도서에 소장되어 있다.

현재 규장각에 전하는 독락재문집은 1886년에 송근수가 쓴 서문이 권두에 실려 있어 1886년에 간행된 초본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당시 간행된 문집의 전체는 아니며 필사 과정에서 일부만이 초록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유는 구시경의 유문(遺文)을 정리하였다는 서문의 문집 편간 경위와는 달리 저자 자신의 글은 본 문집에 단 한편도 수록되어 있지 않고‚ 모두 친구나 후배들과 같은 남의 글로만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권두의 1886년(고종 23)에 송근수가 쓴 서문‚ 1715년에 완산(完山) 최방언(崔邦彦)이 쓴 독락재공행장(獨樂齋公行狀)‚ 1721년(경종 1)에 정호(鄭澔)가 쓴 「한성부판관구공묘갈명(漢城府判官具公墓碣銘)」을 제외하면 모두 만사(輓詞)‚ 제문(祭文)들 뿐이며 마지막에 청담첩(淸潭帖)을 부록하였다. 송시열이 청담동에 있을 때 여러 사람들의 시문과 송시열의 글씨를 받아 묶은 청담첩을 수록하였다. 본 필사본 문집에는 송시열의 글씨는 없이 제목뿐이며‚ 여러 사람들의 시문들과 함께 구시경의 집에 전하던 청담첩을 모사하게 된 경위를 적은 권섭(權燮)의 지문이 부록되어 있다.

권1에는 서(書) 2편, 기 1편, 설 3편, 어록 1편, 잡저 2편, 제문 2편, 권2∼5는 부록으로 세계(世系)․연보․행장․묘갈명․시장(諡狀) 각 1편, 서독(書牘) 80편, 현송당기(絃誦唐記) 1편, 만장 54편, 제문 5편, 시 46수, 제청담시첩후(題淸潭詩帖後) 4편, 가사서(家史序)․가사발(家史跋)․제독락재구공가장우암선생수서후(題獨樂齋具公家藏尤庵先生手書後) 각 1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여기에서 ‘현송당기’는 1697년에 구시경이 연천현감으로 있을 때 지은 현송당에 대하여 정상룡(鄭祥龍)이 사실을 정리하여 지은 글로써, 구시경이 연천에서 현송당을 세워 후생들을 교도한 공적을 찬양한 내용이다.

서(書)에는 한정기(韓挺箕)와 장례에 관하여 논설한 내용이 들어있고, 설의 「예설(禮說)」에는 당시 일어났던 예론논쟁에서 송시열의 입장을 적극 지지하고 있다. 잡저 중 「기미화변사실(己未禍變事實)」에는 이천 땅으로 유배된 사건의 전말을 일기식으로 기술하였다. 이밖에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계통의 사람들과 사우(師友)․문인관계를 나타내는 기록이 많다.

송시열이 직접 써주었다는 현판(懸板) 명과 시 1수, 송시열이 지은 「구제백서산정사차주손운(具濟伯西山精舍次疇孫韻)」, 이속(李涑)이 지은 「복차우재선생청담동운(伏次尤齋先生淸潭洞韻)」, 조정만(趙正萬)이 지은 「경제청담시첩(敬題淸潭詩帖)」․「우차우재운(又次尤齋韻)」, 이병연(李秉淵)이 지은 「차운 경제청담첩(次韻 敬題淸潭帖)」, 이병성(李秉成)․최방언(崔邦彦)․김시보(金時保)․김창집(金昌集)․신정하(申靖夏)․김상리(金相履)․서응순(徐應淳)․송근수(宋近洙) 등이 지은 시, 권말에 안동 권섭(權燮)이 1697년에 쓴 「제청담첩후(題淸潭帖後)」가 기록되어 있다. 이상에서 본집은 1909년에 구양서(具陽書) 등이 간행한 구시경의 독악재유고의 중간부분만 필사하여 놓은 것이라고 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