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윤석(黃胤錫)


황윤석(黃胤錫)                                                             PDF Download

 

윤석(黃胤錫, 1729년∼1791년)은 조선시대 후기, 영조·정조 시대의 학자이자 관리이다. 그는 미호(渼湖) 김원행(金元行)에게서 경학을 배우고, 영조 때에 진사시 복시(覆試)에 합격하였다. 이후 주변의 추천을 받아 관직에 올라, 의영고(義盈庫) 봉사(奉事), 사포서(司圃署) 직장(直長), 세손익위사(世孫翊衛司) 익찬(翊贊), 전의(全義) 현감(縣監) 등을 역임하였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학문을 숭상하는 집안으로 그 자신 역시 경학의 범위를 넘어서 서학과 천문, 역학 등 다양한 분야에 관심이 많았으며, 실사구시의 실학적인 문제나 고대 역사에도 흥미를 가졌다.

그는 또 방대한 저술을 남겼는데 주요 저서로 ⌈이재난고(頤齋亂藁)⌋, ⌈이재유고(頤齋遺稿)⌋, ⌈자모변(字母辨)⌋, ⌈자지록(恣知錄)⌋ 등이 있다. 이 중에 ⌈이재난고⌋는 그 자신이 10살 때부터 63세까지 54년간, 평생에 걸쳐 문학, 경학, 예학, 사학, 산학(算學), 병사(兵事), 형률(刑律), 종교, 도학(道學), 천문, 지리, 역학, 언어학, 전적(典籍), 예술, 의학, 음양, 풍수, 성씨, 물산(物産) 등 인간 생활의 거의 모든 분야를 망라하여 기록한 생활사 자료집이다. 실학적인 면에서도 중요한 학술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전라북도 고창에 있는 황윤석의 생가(전라북도 민속자료 제25호)
전라북도 고창에 있는 황윤석의 생가(전라북도 민속자료 제25호)

 

1729년(1세, 영조 5년)
4월 28일, 전라도 흥덕현(興德縣) 구수동(龜壽洞), 즉 지금의 전북 고창군 성내면 조동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평해(平海), 자는 영수(永叟), 호는 이재(頤齋), 실재(實齋), 산뇌(山雷), 서명산인(西溟散人) 등 다양하게 사용하였다.

증조할아버지 황세기(黃世基)는 송시열(宋時烈)을 아주 흠모하였으며, 장성(長成)의 진사 기진탁(奇震鐸)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할아버지 황재만(黃載萬)은 사부(辭賦)에 능했으며 글씨를 잘 썼다. 송시열이 유배당하였을 때는 송시열을 구원하기 위해서 상소를 올렸다. 황윤석의 부친 황전(黃㙻)은 책을 매우 좋아 하였으며 고암서원(考巖書院)을 중심으로 학문활동을 하여 학덕으로 이름을 얻어 장릉참봉의 자리에 추천이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집안의 기풍을 이어받아 황윤식은 다양한 분야의 지식을 흡수하게 되었다.

 

1738년(9세, 영조 14년)
어려서부터 할머니를 비롯해 집안의 어른들로부터 글을 배워 익혔다. 이해부터는 평생에 걸쳐 날씨, 자신이 읽은 서적, 친구와의 교류, 여행기록, 연구한 내용, 사람들과 주고받은 편지 등 일상생활의 모든 것을 일기로 쓰기 시작했다. 이러한 문장을 모아 놓은 것이 그의 ⌈이재난고(頤齋亂藁)⌋다.

 

1742년(13세, 영조 18년)
임영(林泳)의 ⌈창계집(滄溪集)⌋을 읽었다. 이때부터 이수(理藪)에 관심을 갖고, 자학(字學)을 익히기도 하였다. 2년 뒤부터, ⌈이수신편(理藪新編)⌋ 편찬을 시작했다.

 

1746년(17세, 영조 22년
자명종(自鳴鐘)을 구하여 원리를 관찰하였다. 고암서원(考巖書院)을 방문하여 송시열의 초상을 알현하고 인사를 올렸다. 송시열은 집안의 어르신들이 대를 이어 존경한 유학자였다.

 

1748년(19세, 영조 24년)
1월, 창원정씨(昌原丁氏) 정남혁(丁南爀)의 딸과 결혼하였다.

 

1749년(20세, 영조 25년)
가을에 정후(丁垕)에게 편지를 하여 호락학심성설(湖洛學心性說)에 대해서 논했다.

 

1754년(25세, 영조 30년)
6월, 남원 승보시(陞補試)에 장원을 하였다.

 

1756년(27세, 영조 32년)
여름, 전주 승보시에 장원을 하였다. 9월에, 미호(渼湖) 김원행(金元行)을 처음으로 찾아보고 인사를 올렸다. 겨울에 담양 승보시에 장원했다.

 

1757년(28세, 영조 33년)
다시 김원행이 있는 곳을 방문하고 죽림서원(竹林書院), 팔괘정(八卦亭) 등을 둘러보았다.

 

1759년(30세, 영조 35년)
진사시 복시(覆試)에 합격했다. 부친의 권유로 이 해 2월, 동생 황주석(黃胄錫)과 함께 미호 김원행을 찾아가 정식으로 제자의 예(집지례執贄禮)를 올리고 석실서원 입학을 허락받았다. 여름에 김원행으로부터 ⌈대학⌋을 배웠다.

집안의 영향, 그리고 김원행의 영향으로 황윤석의 당론적인 입장은 노론 중 낙론에 가까웠다. 아울러 황윤석은 성리학에만 관심을 두지 않았고, 당시 지식인 사이에 널리 퍼지기 시작했던 실사구시의 학문 등 다양한 분야에 관심이 많았다.

 

1760년(31세, 영조 36년)
장성(長城)에 유배중인 정신재(靜愼齋) 김시찬(金時粲)을 찾아가 뵈었다. 11월, 백양산(白羊山) 백련암(白蓮菴)에서 주역을 읽었다.

 

1762년(33세, 영조 38년)
12월, 김시찬을 다시 찾아가 역(易)과 천문(天文)에 관해서 논하였다. 다음해 1월에도 김시찬을 찾아, 음양변화 등에 대해서 문의하고, 논했다.

 

1764년(35세, 영조 40년)
4월, 김원행을 찾아뵙고 석실서원(石室書院)에 머물렀다. 겨울에 장성 부사로 부임한 정경순(鄭景淳)을 만나 문장, 당론 등에 관해 논하고 자신의 시집에 대해서 평을 부탁했다. 정경순은 황윤석과 비슷한 연배였는데, 음관으로 관직을 시작한 인물로 행정적인 능력이 탁월한 사람이었다. 정경순은 황윤석의 재주와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황윤석이 관직에 오를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특히 정경순은 자신의 6촌형인 정홍순(鄭弘淳)에게 황윤석을 적극 추천하였는데, 정홍순은 당시 이조판서를 역임한 인물이었다.

 

1765년(36세, 영조 41년)
이해 김수(金璲)와 ⌈대학⌋의 ‘명덕(明德)’과 이기(理氣), 심성론(心性論) 등에 관해서 논했다. 또 안형옥(安衡玉)과 이간(李柬)의 심성이기설(心性理氣説)에 대해서 논의하였다.

 

1766년(37세, 영조 42년)
봄에 서명응(徐命膺)과 역학, 범수(範數), 자서(字書) 등에 관해서 논했다. 그동안 문과에 급제를 하지 못하였으나 주위의 추천을 받아서, 이해 여름에 장릉(莊陵) 참봉(參奉)에 임명되었다.

 

1767년(38세, 영조 43년
장경순(鄭景淳)을 만나 구시책(救時策)을 논하였다. 이해 9월, 동생 황주석(黃胄錫)과 함께 알성시(謁聖試)에 응시했다.

 

1768년(39세, 영조 44년)
여름에 의영고(義盈庫) 봉사(奉事)에 임명되었다. 윤창정(尹昌鼎)을 만나 마테오리치(利瑪竇)의 ‘지원설(地圓說)’에 관해 논하였다. 겨울에 이연(李湅)과 율여법(律呂法)에 관해서 논하였다.

 

1769년(40세, 영조 45년)
6월, 사포서(司圃署) 직장(直長)으로 승진되었다. 그 후 바로 종부시 직장이 되었다. 여름에 칠석제(七夕製)에서 사육문(四六文)으로 수석을 하였다. 화양서원(華陽書院) 비문(碑文) 문제로 병계(屛溪)와 미호(渼湖) 문인 사이에 갈등이 생겼다. 이에 황윤석이 나서서 중재하고 무마하였다. 이형철(李衡喆)과 삼한(三韓)의 옛 유적에 관해 논하였다.

 

1770년(41세, 영조 46년)
2월, ⌈주자대전(朱子大全)⌋을 교정하였다. 3월, 사릉(思陵) 제관(祭官)에 임명되었다. 9월, 국제(菊題)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였다. 12월, 방비어모지책(防備御侮之策)을 지었다.

 

1771년(42세, 영조 47년)
승진하여 6품 벼슬인 사포서(司圃署) 별제(別提)가 되었다. 이해 10월 7일 사직하게 되었다. 12월에 부친상을 당하였다. 이후 거의 6년간 관직생활을 하지 못했다.

 

1772년(43세, 영조 48년)
부친의 장례를 치르고 할아버지와 부친의 유고를 편찬하였다.
여름에 스승 김원행(金元行)의 부음(訃音)을 듣고 심상(心喪)을 행하였다.

스승 김원행은 황윤석에게 두 차례의 답장을 보내주었다. 그 서간은 ⌈미호집⌋에 실려 있다.

그 중 일부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근자에 자네 아버님과 막내아우가 전후해서 왕림해 주셨네. 그리고 자네의 새해 첫 편지를 얻고서 최근의 상세한 근황을 잘 알았으니, 너무도 기쁜 마음에 마주하여 담소를 나누는 것과 다름없었네. 다만 우환 때문에 서책을 읽는 공부에 방해되는 점이 있다고 하니, 그것이 안타까울 뿐이네.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학문을 하는 요체는 문자(文字)에만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은 아니네. 행동하고 정지하며, 말하고 침묵하며, 부모를 섬기고 어른을 공경하며, 남을 대하고 사물을 접하는 일상생활 속에서도 이 마음을 풀어놓지 않고, 항상 하나의 옳은 곳을 찾아서 행할 수만 있다면 이것이 바로 근본 공부라네.

책을 읽는 공부에 이르러서도 단지 이러한 의리를 규명하려고 해야지, 널리 보고 지나치게 읽는 것을 숭상하지 말아야 하네. 비록 병석(病席)을 지키며 간호한다 하더라도 조금도 한가한 시간이 없지는 않을 것이니, 때때로 익숙히 본 글을 가지고 잠심하여 완미함으로써 성현(聖賢)의 마음 씀을 찾는다면 또 어찌 학문을 폐하였다고 걱정할 것이 있겠는가?

이는 지난날에 내가 말해준 장재(張載)의 말과 서로 상통하네. 부디 이제부터 예전의 박잡(博雜)하게 공부한 습관을 버리고 마음을 오로지하여 이런 식으로 공부해 나가야 할 것이니, 그렇게 하여 서너 해가 지난 뒤에 다시 어떠한지 살펴본다면 필시 탁월한 성과가 있을 듯하네.”

황윤석의 학문이 너무 다양한 분야로 뻗어나가는 것을 경계하는 내용이다. 스승으로서 제자의 학문적인 문제점을 완곡하게 표현하였다고 할 수 있다.

 

1774년(45세, 영조 50년
서울로 돌아왔다. 여름에 심정진(沈定鎭)이 찾아와 함께 경전의 뜻과 율력(律曆), 산수(算數) 등에 관해 논하였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다.

 

1776년(47세, 영조 52년)
1월 13일, 당시 병조판서 서명선(徐命善)이 추천하여 세손익위사(世孫翊衛司) 익찬(翊贊)이 되었다. 1월 말일에 사직하였다. 9월에 부인 정씨(丁氏)의 상을 당하였다. 홍대용의 집을 방문하여 이덕무, 박지원, 박제가를 만나 교류하였다. 서명응(徐命膺), 서호수(徐湖修) 부자 등과도 학문적인 교류를 즐겼다.

 

1778년(49세, 정조 2년)
1월, 사복사(司僕寺) 주부(主簿)로 임명되었다. 이후 동부(東部) 도사(都事)로 옮겼다. 좌랑(佐郞) 김재진(金在鎭)이 호남의 인물에 대해 물었다. 이에 김익휴(金益休), 임홍원(林鴻遠), 신사준(愼師浚) 등을 추천했다. 6월, 윤대관으로 임명되어 희정당에 입시하였다. 호락이학시말기(湖洛二學始末記)를 집필하였다. 12월, 장릉(長陵)의 영(令)이 되었다.

 

1779년(50세, 정조 3년)
8월에 목천(木川) 현감(縣監)이 되었다. 황윤석은 지방 수령이 되기를 희망하였는데, 이렇게 그 뜻대로 된 것은 황윤석과 친분이 있었던 이덕무가 충청도 관철사 이병정(李秉鼎) 쪽에 추천을 하여 성사된 것이었다.

 

1780년(51세, 정조 4년)
6월 15일, 관찰사 심이지(沈頤之, 1735년∼1796년)가 내린 평가가 매우 나빠 파직되었다. 심이지는 이렇게 평가하였다.(⌈일성록⌋ 6월 15일자)

“목천 현감(木川縣監) 황윤석(黃胤錫)은 질박한 점은 귀하게 여길 만하나 세금을 함부로 걷어 용서하기 어렵습니다. 이상은 모두 하(下)입니다.”

1781년(52세, 정조 5년
12월, 모친상을 당하였다.

 

1784년(55세, 정조 8년)
1월에 장악원 주부가 되었다. 그러나 나아가지 않았다. 다시 창릉령(昌陵令)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1786년(57세, 정조 10년)
4월, 전생서(典牲署) 주부가 되다. 6월, 전의(全義) 현감(縣監)으로 발령을 받아 희정당에 들어가 임금을 뵈었다. 원래 황윤석은 전의현감의 후보에 불과하였으나 당시 이조판서 유언호와 정조의 입김이 작용하여 정식 발령을 받게 되었다.

 

1787년(58세, 정조 11년)
1월, 호서(湖西) 암행어사 심환지(沈煥之)의 건의로 4월 8일 파직되었다.

심환지의 건의는 다음과 같았다.

“호서 암행 어사 심환지(沈煥之)가 복명(復命)하고 서계(書啓)를 올려 병사(兵使) 구세적(具世勣), 부여 현감(扶餘縣監) 윤득우(尹得愚), 공주 판관(公州判官) 서직수(徐直修), 비인 현감(庇仁縣監) 이운빈(李運彬), 연기 현감(燕岐縣監) 최숙(崔熽), 전의 현감(全義縣監) 황윤석(黃胤錫)의 잘 다스리지 못한 형상을 논핵하여 구세적, 윤득우, 서직수는 잡아다 심문하여 죄를 주고 이운빈, 최숙, 황윤석은 파직하게 하였다.”

황윤석에 대한 평가가 어떤 근거로 파직에 이르게 되었는지에 대한 사정은 자세히 나오지 않는다. 이후 황윤석은 더 이상 관직생활을 하지 않았다.

 

1788년(59세, 정조 12년)
4월, 부친이 남긴 유고를 편집하였다. 10월, 고암서원(考巖書院)의 강장(講長)이 되었다.

 

1791년(62세, 정조 15년)
4월 21일, 사망하였다. 고부(古阜) 후리(厚里)의 선영에 장사 지냈다. 1829년 후손 황수경(黃秀瓊)이 유고를 편찬하여 전라도 관찰사 조인영(趙寅永)의 도움을 받아 간행하였다. 1909년, 화재로 남은 유고와 수천 권의 장서가 소실되었다.

저서로 ⌈이재난고(頤齋亂藁)⌋, ⌈이재유고(頤齋遺稿)⌋, ⌈자모변(字母辨)⌋, ⌈자지록(恣知錄)⌋ 등 300여권이 있다. 특히 ⌈이재난고⌋는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스럽게, 10살 때부터 63세까지 54년간의 일상을 기록한 일기다.

현재 57권 6000여장이 남아 있다.

 

참고문헌)
신용남, 「이재유고 해제」. 하주성, 「300여권의 저서를 남긴 이재 황윤석 생가」, 오마이뉴스, 10.11.01. 노혜경, 「18세기 지방 지식인의 인적 네트워크: 황윤석의 「이재난고」」, 「장서각 아카데미 2012년도 역사문화강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