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존겸(鄭存謙:1722~1794)


정존겸(鄭存謙: 1722~1794)                               PDF Download

 

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대수(大受), 호는 양암(陽菴)·양재(陽齋)·원촌(源村)이다. 좌의정 정유길(鄭惟吉)의 8대손이며, 좌의정 정치화(鄭致和)의 5대손인 그는 정문상(鄭文祥)의 아들이다. 그가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던 대제학 이재(李縡)의 문하에서 공부하여, 1751년(영조27)에 30세 나이로 문과에 올라 벼슬을 시작하였다. 부제학(副提學) 등 여러 관직을 거쳐 3년 만에 횡성 현감(橫城縣監)으로 나아가 고을을 다스리고, 다시 내직(內職)으로 들어와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와 승지(承旨) 등 여러 요직을 역임하였다.

승지(承旨)로 있을 때 1761년(영조37)에 사도세자(思悼世子)가 영조의 허락도 없이 평양으로 나들이를 간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에 격분한 영조는 관련자들을 모두 색출하여 처벌토록 하였다. 그리하여 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를 비롯한 유한소(兪漢簫)와 이수득(李秀得) 등을 파면시켰다.

정존겸도 세자의 이 일을 눈감아 준 책임을 물어 파직시켰으나, 그 뒤에 곧바로 복직되었다. 그는 다시 1772년(영조48)에 영조가 의욕적으로 펼친 탕평책에 반기를 든 특정 정파의 당론을 부추겼다하여, 이번에는 멀리 함경도 북청(北靑)으로 유배되었다. 그러나 이듬해에 다시 풀려나 이조판서에 기용되었다. 그는 영조가 승하하기 1년 전인 1775년(영조51)에 사도세자의 아들로 장차 왕위에 오를 세손의 목숨을 노리던 벽파(僻派)의 거두 좌의정 홍인한(洪麟漢) 등을 거세게 탄핵하는 상소를 올려, 홍국영과 함께 세손보호에 나섰다.

이 일로 인하여 정존겸의 정치적 입지가 굳어졌다. 이듬해 3월에 마침내 영조가 승하하고, 드디어 정조가 보위(寶位)에 올랐다. 그리하여 세손을 모해하려 했던 홍인한의 일당은 몰락하고, 정존겸은 세손의 보호막이었던 시파(時派)의 선봉으로서 우의정에 발탁되었다. 그러나 같은 해 6월에 정치적인 소용돌이 속에서 정존겸은 영의정 김양택(金陽澤)과 함께 삭탈관직(削奪官職)을 당하고, 좌의정 김상철(金尙喆)도 파직되니 3정승이 동시에 물러나는 처지가 되었다.

1777년(정조1) 5월에 정존겸은 다시 좌의정에 복직되고, 김상철도 영의정 자리를 되찾았으며, 우의정에는 정조를 위해 한몫 하였던 판돈녕 부사 서명선(徐命善)이 앉았다. 1781년(정조5)에 정존겸은 실록청 총재관(實錄廳總裁官)이 되어 《영조실록》과 《경종수정실록》 편찬을 지휘하고, 이듬해 10월에 동지사(冬至使)동지사(冬至使): 매년 동지를 기하여, 우리나라 특산물인 인삼, 호피, 수달피, 종이, 명주 등을 공물(貢物)로 중국황제에게 바치러 가는 사신이었다.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783년(정조7) 6월에, 정존겸은 마침내 영의정에 올랐다. 그 때 나이가 62세로 그가 관직에 몸을 담은 지 32년 만이었다. 그 뒤 1791년에 중추부사로 치사(致仕)하고, 봉조하(奉朝賀)로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는 정조를 세손시절부터 누구보다도 보호에 앞장서왔지만, 탕평책에 대해서만은 미온적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철저한 시파로서 정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정조의 재위 기간 동안 재상을 지낸 인물이 20여 명인데, 이 중 영의정들에 대하여 정조가 그의 문집인 《홍재전서(弘齋全書)》 권37에 다음과 같은 회고를 남겼다.

“국가에 정승을 두는 것은 어렵게 여기고 신중히 해야 할 일이고, 영의정은 일반 대신과는 또 현격한 차이가 있다. 나 소자가 왕위에 있은 20여 년의 세월 동안 영의정의 직책을 맡겼던 자를 꼽아 보면 열 명이 채 되지 않는다. 한 장의 상소를 올려 구름을 밀치고 어두운 거리를 해와 별처럼 밝힌 자로는 충헌공(忠憲公) 서명선(徐命善)이 있고, 기미를 환히 알고 나라를 생각하는 정성으로 혼란의 와중에서 스스로 일어난 자로는 문안공(文安公) 정존겸(鄭存謙)이 이에 가깝다. 효제(孝悌)를 독실히 행한 자로는 문정공(文貞公) 김익(金熤)이 있고, 국가와 더불어 기쁨과 슬픔을 함께한 자로는 효안공(孝安公) 홍낙성(洪樂性)이 있고, 평소 자신의 소신을 지켰던 자로는 문숙공(文肅公) 채제공(蔡濟恭)이 있으며, 인릉군(仁陵君) 이재협(李在協)의 경(敬)은 한마디 말로 서로 감격하는 것보다 더 무게 있는 것이었는데, 이들은 모두 제각기 근거한 바가 있다고 할 만하다.”

정조의 이 회고는 영의정 이병모(李秉模)에게 내린 돈유(敦諭)의 글이다. 신하들의 성향과 능력에 대하여 환히 꿰뚫고 있는 정조의 안목도 놀랍다. 특히 정존겸에 대하여

“기미를 환히 알고 나라를 생각하는 정성으로 혼란의 와중에서 스스로 일어난 자”

로 평가하고 있는 데에는 그가 수많은 일을 몸소 겪으면서 슬기롭게 처리했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면이기도 하다.
홍재전서(弘齋全書)》 제42권에 수록되어 있는 ‘영의정 정존겸(鄭存謙)이 면직을 청한 상소에 대한 비답’의 내용에서도 같은 맥락에서 그의 정치적 능력을 가늠해 볼 수 있다.

답하노라. 소를 살펴보고 경의 진심을 잘 알았다. 거듭 경을 재상에 임명할 때에 승지를 보내어 마음속에 쌓인 말을 전하게 하려고 하였는데, 별유(別諭)가 사양하는 글보다 우선하는 것은 그 예가 매우 드문 까닭에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내가 처음 임금이 되고 나서 덕망 있는 재상을 간택하였는데 경이 그때 맨 처음 이 간택을 받았으니, 나의 뜻이 어찌 우연한 것이겠는가.
아, 이제 경을 재상으로 세운 지가 겨우 7년인데, 세상의 도리와 조정의 기상은 몇 단계 아래로 떨어진 정도만이 아니다. 의리가 어두워지고 막혔는데 누가 능히 붙들어 세우겠으며, 기강이 시들고 쇠미해졌는데 누가 능히 진작하여 쇄신하겠는가. 묘당은 날로 잗달아지고 대각은 점점 흐리멍덩해지니, 비유하건대, 사람의 몸에 온갖 병이 마구 침범하였는데도 오히려 그대로 방치한 채 모른 척하면서 약을 쓰지 않는 셈이니, 이는 진실로 어떠한 때이겠는가.
다스려 보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하지 않은 것이 아니지만 두루 자문할 만한 곳이 없으니, 하루 이틀 지나는 사이에 나라를 다스리는 효과가 막연한 실정이다. 매양 이 생각을 할 때마다 나도 모르게 벽을 돌면서 방황을 하곤 하는데, 비록 경처럼 오직 나랏일을 염려하는 정성으로도 또한 어찌 모두 알 수 있겠는가.
재상은 어느 것인들 중요한 직임이 아니겠는가마는 영의정은 좌의정이나 우의정에 비해 더욱 중요하다. 근년 이래로 이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을 일일이 헤아려 보면 겨우 한두 원로(元老)뿐이었다.
지난번에 경의 사직을 허락해 준 것은 경을 버리려는 것이 아니었고, 이번에 새로 임명한 것은 결정을 한 지가 오래되었다. 이러한 때의 이러한 직임을 경이 아니면 누가 맡겠는가. 상참(常參)을 하라는 명을 내렸으니, 경은 부디 즉시 일어나 일을 살피도록 하라.

임금이 신하에 대하여 이처럼 진심어린 요청의 글도 그리 흔하지는 않을 듯싶다. 간곡하게 당부하고 있는 정조의 정성어린 당부와 요청의 마음이 행간에 넘쳐흐른다. 그 밖에도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몇몇 기록을 통해서, 그가 어떤 성품의 소유자였는지를 대략 짐작할 수 있다. 우선 그는 말수와 웃음이 적었으며 삼가고 검약하는 점이 선비와 같았으나 강직한 기풍은 적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때에 이르러 그가 죽자, 정조가 다음과 같이 전교하였다.

“가장 먼저 이 대신을 정승으로 뽑았던 것은 을미년에 올린 상소가 호감이 갔기 때문이었다. 삼가고 두려워하는 한 마음은 옥을 잡고 있듯이 하고 가득한 물그릇을 받들듯이 하여 벼슬이 영의정까지 올랐어도 사람들이 비난함이 없었으니, 이것이 어찌 남들보다 한 등급 높은 것이 아니겠는가. 몇 해 동안 앓은 탓에 못 본 지 오래 되었는데 이번에 죽었다고 하니, 애통함과 상심함을 어찌 금할 수 있겠는가. 성복(成服)하는 날에 승지를 보내서 제사를 지내주고 녹봉은 3년 동안 보내줄 것이며 장례 치르기 전에 시호를 내리라.”

이 내용은 《정조실록》의 1794년(정조18) 8월 6일조에 보인다. 신하된 처지에서 임금으로부터 이러한 총애를 받는 것은 최고의 영광인 것이며, 이러한 조상을 둔 후손들은 더할 나위 없는 자랑이 아닐 수 없다. 그가 죽어서 이러한 예우를 받는 줄 알았다면 지하에서도 감격해 마지않았을 법하다. 신하의 죽음에 애통해하고 상심하는 정조의 애틋한 심경이 행간에 묻어나는 글이 아닐 수 없다.

또 조선의 박물학자 황윤석(黃胤錫)과의 일화도 있다. 황윤석은 조선후기 성리학자이면서 실학자요 박물학자이다. 1769년 영조는 백과사전류인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를 간행토록 명하였다. 이를 위해 당상관들은 방대하고도 세밀한 작업에 필요한 각 분야 전문가를 물색하였다. 당상관중 한사람인 정존겸은 황윤석의 학식이 깊은 것을 알고 그에게 각종 책의 교정을 보고 발췌한 부분에 표시해달라고 요청하였다. 하루가 멀다하고 황윤석에게 교정과 교열을 맡겼다. 그리하여 그는 근무를 하는 시간 외에 퇴근 후에도 밤늦게까지 책을 붙들고 작업을 하였다. 그러다보니 눈이 침침해서 안경을 구하고 싶어도 귀한 물건이라 구할 수가 없었다. 황윤석은 눈병을 앓아서 요청을 들어드릴 수 없다면서 정존겸에게 안경을 빌려달라고 편지를 썼다. 정존겸은 늘 꼼꼼한 교정에 감동하여 가장 좋고 구하기 힘든 안경을 구하여 선물하면서 감사의 마음을 표현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그리고 중구 회현동(會賢洞)에 가면 명당터에 전해오는 은행나무전설이 있다. 회현동은 말 그대로 어진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았다고 한데서 유래된 지명이다. 그 근처 은행나무 길에 서울시의 지정 보호수로 480여 년이 된 은행나무가 있다 이 나무를 중종 때 영의정 정광필(鄭光弼)이 집 앞에 심었다고 하는데, 어느날 그의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서

서대(犀帶)서대(犀帶): 종1품 이상의 관복에만 착용할 수 있는 것으로, 코뿔소나 물소의 뿔로 만들어 왕의 옥대 다음으로 귀히 여기는 제품이다.12개를 은행나무에 걸게 되리라.”

고 일렀다고 한다. 그 후 실제로 이 명당터에서 12명의 정승이 배출되었는데, 정광필의 후손인 정존겸이 그 12명중 한 사람이다.

<참고문헌>
– 《영조실록(英祖實錄)》
– 《정조실록(正祖實錄)》
– 《일성록(日省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국조인물지(國朝人物志)》
– 《사마방목(司馬榜目)》
– 《상신고략록(相臣考略錄)》
– 《네이버 지식백과》
– 《한국민족문화대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