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립(金昌立)1666~1683 – (제2편)


김창립(金昌立)-(제2편)                                           PDF Download

 

1666(현종 7)~1683(숙종 9). 조선 후기의 학자이다.

관은 안동(安東). 자는 탁이(卓爾), 호는 택재(澤齋)이다. 김창립은 18세에 요절하였고 그의 유고집은 홍유인(洪有人), 유명악(兪命岳), 최동표(崔東標) 등이 발간을 추진하여 형인 김창흡(金昌翕)이 그것을 산정하여 사후 1년 만인 1684년에 서사활자로 간행되었으며, 1700년에 운관활자로 다시 간행되었다.

특히 이 유고집의 서문과 발문을 쓴 인물들이 당대를 대표하는 명사들이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이 유고집의 서문과 발문을 쓴 인물들이 당대를 대표하는 명사들인데, 서문은 김석주(金錫冑)가 썼고 발문은 김수항(金壽恒), 김창흡(金昌翕), 송시열(宋時烈), 남용익(南龍翼), 김만중(金萬重) 등이 썼다. 김수항은 그의 아버지이고 김창흡은 그의 작은 형이므로 이들을 제외한다고 해도, 나머지 4명은 당시에 명성이 높은 인물로서 이들이 요절한 자의 유고집에 이렇게 서물과 발문에 참여했다는 것만으로도 주목해야 할 일이다.

여기서는 지난번의 글을 이어 그의 유고집인 「택재유타(澤齋遺唾)」의 간행과정과 구성 및 내용을 살펴보고 그의 몇 편의 시를 소개하고자 한다. 생몰 연대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김창립은 18세에 요절하였다. 그런데 그의 유고집은 사후 1년 만인 1684년에 초인되었다. 이러한 예는 조선시대 문집 간행에 있어서 그 유례를 찾기 힘든 것으로 볼 수 있다.

현재 전해지고 있는 1700년에 운관활자로 간행된 「택재유타」는 1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구성내용을 살펴보면 서(序)․시(詩)․부록(附錄)․발(跋) 등으로 되어 있는데, 부록에는 행장(行狀)․묘표(墓表)․묘지명(墓誌銘)․전(傳)이 포함되어 있고, 발문은 5명이 썼다. 서문을 쓴 김석주(1634~1684)는 일세를 풍미한 정치가로 당시의 정국을 주도하던 인물의 하나였다. 서문의 내용을 조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갑자년에 한양에 전염병이 크게 있었는데 김창립이 병으로 죽었다고 하였다.……그 후에 상공이  「택재유타」 라는 시집 한 권을 나에게 보여주었는데, 김창립의 여러 형들이 그의 주머니에 있던 초고를 모아 기록한 것이다.”

첫 장 첫 줄 상단에 ‘택재유타’라 쓰여 있고, 하단에 ‘안동김창립탁이저(安東金昌立卓爾著)’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마지막 장에는 시가 끝난 줄 여백 아래에 ‘택재유타종(澤齋遺唾終)’이라 되어 있다. 시의 배열순서는 시체(詩體)와 관계없이 시대순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작은 형인 김창흡이 교정한 것으로 보인다.

시집으로서의 「택재유타」를 살펴보면 가장 주목되는 것은 절구(絶句)나 율시(律詩) 같은 정격(正格)의 작품도 있지만 변격(變格)의 시가 많다는 것이다.

전체는 85수인데 이 중에서 5․7언장구 5수, 5․6․7언 1수, 4언4구 2수, 4․5언 2수, 6언22구 1수 등을 포함하여 5언시나 7언시의 경우에도 각각 10구, 14구, 20구 등 다양하다. 이러한 변격의 작품이 도합 27수이다. 이것은 김창립이 추구했던 시의 경지와 관계가 있다. 김창립은 과거에 응시하기 위하여 배우는 시를 거부하고  「시경」의 시나 고풍시(古風詩)를 따르려고 노력했다. 이러한 이유로 율격에 맞는 시보다는 파격적인 작품을 선호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몇 편의 시를 살펴보자.

 

구림마을 국사암에는
鳩林國師巖

도선의 발자취가 남아있네.
道詵足跡在

밤에 올라 바닷물을 보니
夜登見海水

밝은 달이 세상을 비치네.
明月照海內

 

이것은 시집에 수록된 첫 번째 작품이다. 제목 아래에 협서로 을묘(乙卯)라 기록되어 있으니 을묘년(1675), 곧 김창립의 나이 10살되던 해였다. 이 해에 갑인예송(甲寅禮訟) 후 남인과 대립하던 김수항은 전라도 영암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는데 가족들을 데리고 갔다. 이 시기에 김창립이 영암의 월출산에 올라가서 이 시를 지었다.

10세에 지은 시는 이외에도 1수가 도 있다. 이때부터 시를 짓기 시작하여 지속적으로 시를 썼지만, 본격적으로 짓기 시작한 것은 16세부터이다. 이어서 시 한 수를 더 소개한다.

지난 날 우리들 장쾌히 놀았지
往者吾輩能壯遊

화산에서 3일 동안 더 없는 즐거움을 즐겼네.
華山三日樂莫樂

서쪽으로 백운봉에 올라
西登白雲峯

한양의 성곽을 굽어보았네.
俯視洛陽郭

높은 곳에 올라 높은 곳에 올라
臨高臺臨高臺

구슬픈 피리소리에 가을 하늘은 아득하니
長笛悲歌秋天杳

백년 인생사 갑자기 비장해라.
人生百年忽悲壯

웃으며 북망산을 가리키니 행인이 드물고
笑指北邙行人少

아아! 인수봉은
嗟乎仁壽峯

조화가 어찌 그렇게 웅장한가!
造化何其雄

흰 구름은 땅에 가득 일어나고
白雲滿地飛

푸른 바다는 무궁하도다.
滄海去無窮

산꽃과 잎을 머리에 가득 꽂고
山花洞葉揷滿頭

노래하고 춤추며 내려오는데 산 그림자가 지네.
歌舞西下山影棲

 

이 시는 김창립이 삶의 마지막 해인 18세에 지은 것으로, 내용으로 보아 북한산을 유람하면서 지은 것으로 보인다. 이 시도 정격의 격식을 갖춘 시라고 할 수는 없다. 대자연의 경치를 읊으면서 인생사의 비장함을 노래하는 젊은 김창립의 심정이 잘 나타나 있는 작품인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 유고시집에는 유일하게 <제망자문(祭亡姉文)>이라는 문장이 포함되어 있다. 80자로 된 짧은 글인데, 그가 지은 문장 중에서 유고집에 실린 것이 이것뿐이다.

제문의 대상은 출가한 누이로서 김수항의 6남 1녀 중 하나뿐인 딸이다. 누이가 죽은 것은 1680년으로 추정된다. 이때 김창립의 나이는 15세였으므로 누이의 죽음이 절실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가정을 이루고 나서는 아내의 소중함을 알게 되었고 이로 인해 누이와의 이별이 더욱 슬퍼 이 제문을 지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김창립은 10세에 처음 한시를 지었고, 한시에서 추구하는 바가 남달랐던 김창립의 문학은 주위의 기대를 모았으나 일찍이 사망하는 바람에 완성을 보지 못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가족과 친지들로부터 깊은 애도를 받았으며, 역설적으로 지금까지 이 유고시집이 전해지게 되었다.

 

[참고문헌]

「澤齋 金昌立의<澤齋遺唾>에 관한 연구」(<서지학연구>제49집, 김순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