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윤영(鄭胤永)


정윤영(鄭胤永)                                                              PDF Download

 

1833(순조 33)~1898(광무 2) 조선말기의 학자.

본관은 초계(草溪). 자는 군조(君祚). 호는 석화(石華)․후산(后山). 경기도 화성 출신. 아버지는 정현풍(鄭鉉豊)이며, 어머니는 진주강씨로 강시면(姜時冕)의 딸이다. 1833년 12월 15일에 경기도 화성군 동탄면 금곡리에서 출생하였으며, 큰아버지 정현택(鄭鉉澤)에게 입양되었다. 13세(1845) 되던 해에 수원유수가 개설한 화성군 백일장에 응시하여 1등을 했고, 16세(1848)에 의령남씨 남종정(南鍾正)의 딸과 결혼했다.

37세(1869)이던 가을, 공주 명강산에 있는 임헌회(任憲晦) 문하에 나아가 제자가 되었다. 임헌회는 이이의 호인 석담(石潭)과 송시열의 호인 화양동주(華陽洞主)에 착안하여 ‘석화(石華)’라는 호를 내려주었다. 임헌회는 이이와 송시열의 학통을 계승한 것으로 ‘석화’라는 호 역시 그러한 연장선상에서 내린 것이다. 임헌회의 문인이었던 전우(田愚)․신두선(申斗善)․심의윤(沈宜允)․윤치중(尹致中)․서정순(徐政淳) 등과 교유하였으며, 이항로학파의 김평묵(金平默)․유중교(柳重敎)․유시수(柳始秀)․홍대심(洪大心)과도 교유하였는데, 이들과의 교류는 정윤영의 사상과 활동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40세(1871)되던 봄에 안성군 후산(后山)으로 이사하여 과거를 포기하고 부모봉양과 독서에 전념하였다. 44세(1875)에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후산에 장사시내고 이때부터 ‘후산’이라는 호를 사용하게 되었다.

1876년(45세) 1월, 일본이 강화도를 침범하자 스승 임헌회에게 편지를 보내 척화(斥和)를 주장할 것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척화’는 일본과의 강화를 배척한다는 것으로, 서양을 배척한다는 척사(斥邪)와는 엄밀한 의미에서 차이를 보인다. 그러나 이 시기 서양문물의 유입이 일본을 통해 들어왔기에 척화 속에 척사가, 척사 속에 척화가 내포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1881년(고종 18) 개화를 반대하는 유생들의 척사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자, 경기도에서는 같은 해 4월에 유기영(柳冀永)을 대표로, 6월에는 신섭(申㰔)을 대표로 두 차례 상소문을 올렸다. 이 두 상소문은 「후산집」권5에 모두 수록되어 있는데, 이때 상소문을 작성하는데 정윤영이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결국 6월에 올린 상소문의 대표인 신섭은 금갑도로 유배를 가게 되었고, 그 해 8월 21일 정윤영 역시 배후인물로 지목되어 함경도 이원현으로 유배가게 되었다.

1882년(고종 19) 6월 12일에 정윤영을 즉시 풀어주라고 왕명이 내려졌지만, 다음해인 1883년 1월에야 석방되어 2월에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후 1893년(고종 30) 7월 22일에 의금부도사에 임명되었지만 나가지 않았고, 같은 해 8월 17일에 성균관 직강에 임명되었지만 또 나가지 않았다. 1895년(고종 31) 11월에 단발령이 내려지자 「자정명(自靖銘)」을 짓기도 하였다. 1898년(광무 2) 5월 11일 향년 66세로 별세하였다. 저서로는 「후산집」․「위방집략(爲邦輯略)」․「화동연표(華東年表)」․「북정잡영(北征雜詠)」 등이 있다.

1881년 9월 초에 유배 길에 올라 고향으로 돌아온 1883년 봄까지의 작품이 그의 문집인 후산집 권1과 권2에 순차적으로 수록되어 있다. 오언절구 33수, 오언율시 10수, 칠언절구 29수, 칠언율시 27수, 오언고시 1수, 칠언고시 3수 총 86제(題) 103수가 실려있다. 또한 부(賦) 4편, 사(詞) 3편을 포함하여 정윤영이 유배시기에 지은 시작품은 총 93제 115수가 된다. 이 글에서는 이들 내용을 토대로 정윤영의 유배시기 작품과 그 의미를 소개한다.

 

世駸駸其叔季 세상이 점점 말세로 달려가더니
奄二氣之淆混 음과 양이 뒤섞여 버렸네.
草萬言而衛正 만언으로 소장을 엮어 정도(正道)를 보호하려다가
乃余謫而非遯 이에 귀양 왔으니 도망 온 것이 아니네.
苟余信其非辜 참으로 나는 죄가 없음을 확신하는데
天愈高而莫問 하늘은 더욱 높아 물을 수가 없어라.

 

이 시는 함경도 이원에서 40리 떨어져 있는 자양리에 봉안되어 있는 주희의 영정을 보고 읊은 부(賦) 작품 중 일부이다. 세상이 말세로 치달아 음양이 뒤섞여 버렸다는 것은 자신들이 추구하는 유학적 통치질서가 일본과의 통상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이 되었다는 표현이다. 그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척화를 주장하는 상소문을 올렸고 그로 인해 유배를 오게 되었지만, 결코 잘못된 신념이 아니라고 강변한다. 비록 유배객의 처지이지만, 당대 현실에 대한 인식과 척화에 대한 자신의 불굴의 의지가 담겨있다.

 

猶堪夕死可朝聞 아침에 도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했으니
將此身心辦力分 이 몸과 마음이 애써 그러려고 힘을 쏟았지.
憶昨龍蛇無限恨 지난 용사(龍蛇)의 일 생각에 끝없이 한스러운데
如今鳥獸忍成群 지금도 짐승들이 무리를 이루었구나.
緣何脚血行千里 무슨 이유로 발에 피 흘리며 천리를 가나
爲是肝膽吐萬言 마음속의 울분 만언으로 토해냈기 때문이네.
日下長安渾不見 태양 아래 장안은 온통 보이지 않노니
天公那惜掃浮雲 조물주는 어이해 뜬구름 쓸어버리지 않으시나.

 

이 시는 유배 길에 접어든 초기에 지은 작품이다. 1구에서는 <논어>「리인」편에 보이는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주어도 좋다(朝聞道, 夕死可矣)”라는 구절을 그대로 가져와 자신의 도, 즉 정통 유학의 통치질서에 대한 흔들림 없는 신념을 드러냈다. 3구의 용사(龍蛇)는 후한(後漢)의 정현(鄭玄)과 관련된 고사로, <후한서>「정현열전」에 보인다. 정현이 만년에 병으로 벼슬에서 물러났는데, 하루는 공자가 꿈에 나타나 “일어나라, 일어나라. 올해는 용의 해이고 내년은 뱀의 해이다”라고 하였다. 정현이 꿈에서 깨어나 점을 쳐보고는 자신의 천명이 다했음을 알았으며, 그해에 죽었다고 한다. 그 뒤에 ‘용사’에 해당하는 진년(辰年)과 사년(巳年)은 현인에게 불행이 닥치는 흉년으로 일컬어졌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임진년(1592)과 계사년(1593)으로 왜란을 말한다. ‘짐승에게 유린’되었던 왜란을 기억하고 당시 일본의 개항 요구의 상황을 임진왜란에 비견하며, 일본을 짐승으로 표현하면서 당시 현실에 대한 걱정을 우회적으로 드러냈다.

또한 송나라 채원정(蔡元定)이 위학(僞學)으로 몰려 귀양갈 때 2천리를 가자 발에서 피가 났는데 조금도 개의치 않았던 고사를 인용하여, 당대 현실에 대한 울분을 토해낸 상소문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지만 그 신념에는 변함이 없음을 강조한다. 7구의 ‘장안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혼란한 시대상을 반영한 것이고, 8구의 ‘뜬구름’은 정통 유학적 세계관에 반하는 개화의 세력으로 그러한 뜬구름이 일소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이처럼 정윤영은 임진왜란의 기억이나 유배 길에서도 자신의 신념에 대해 오롯한 태도를 보였던 채원정 등의 고사를 인용하여 어지러운 당대 현실과 그 현실에 대한 자신의 대응 자세를 지속적으로 설파하였다. 이를 통해 일본과 서양의 세력이 일소되기를 갈구하였으며 척화에 대한 불굴의 신념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雨暗雲俱黑 비에 어둑하고 구름도 모두 흑빛이라
崇朝未見暉 아침이 와도 햇살이 보이지 않노라.
那將風一陣 어찌하면 한 줄기 바람을 몰아와서
雲雨捲同歸 구름과 비를 모두 쓸어버릴 수 있을까.

 

이 시는 유배 가는 길에 비 때문에 덕원읍(德源邑)에 머물며 지은 작품이다. 이 비가 빨리 걷혀 자신의 길을 가고 싶다는 말이다. 비 때문에 어둑해진 세상은 당대 사회의 혼란상을 비유한 것이며, 먹구름과 비를 쓸어버리고자 한 것은 당시 혼란한 상황을 타개하기를 바라는 우국충정의 심정을 담은 것이다. 먹구름처럼 드리워 있는 일본과 서양의 세력을 몰아내고 다시 유학적 세계가 도래할 것이라는 믿음에 대한 표현이다. 한 줄기 바람은 자신들의 정신적 지주인 정통 유학의 통치질서를 의미한다. 눈앞의 풍경을 자신의 우국충정의 의식 속으로 가져와 문학적으로 승화시킨 작품이다.

또한 정윤영은 유배지에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前宵夢入故山梅 어젯밤 꿈에서 고향의 매화 보았으니
春事也應雪屋催 눈 덮인 집에도 응당 봄 재촉하겠지.
千里關河消息斷 천 리 밖에서 집안 소식 끊어졌으니
玉條從此幾花開 옥 같은 가지에 몇 가지나 꽃 피웠을까.

 

유배객의 처지이기에 고향 소식에 대한 간절함은 말할 필요가 없는데, 다만 매화에게 봄을 맞아 몇 가지 피웠는가 묻는 것은 고향의 가족에 대한 구구절절한 그리움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처럼 유배시기에 지은 정윤영의 작품에는 척화에 대한 불굴의 신념이나 고향에 대한 그리움 등이 그의 작품 속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참고문헌]: 「고종실록」, 「후산집」,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후산 정윤영의 척화의 신념과 현실인식-유배시기 시작품을 중심으로-」(박종훈, 「한국시가문화연구」42, 한국시가문화학회,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