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원(朴聖源, 1697-1757)


박성원(朴聖源, 1697-1757)                                  PDF Download

 

성원(朴聖源, 1697-1757)은 조선중기에 활동했던 문신이자 유학자로 이재(李縡)에게서 성리학을 배웠다.  낙론(洛論)을 지지하는 학자로 예서(禮書)에도 밝았다.
영조20년,  1744년에 그는 모두 11조목에 이르는 내용의 간언을 하였다.  당시 영조는 탕평책을 추진하고 있었는데 그러한 정책과도 맞물려 그의 간언은 조정을 뒤흔들고, 영조를 분노케 하였다.  하지만 그의 지적은 매우 구체적이었고, 치밀하였기때문에 사관도 그의 간언을 인정하였고, 영조도 결국 그를 조정에 다시 불러 세손 정조의 교육을 맡게하 였다.

1697년( 1세, 숙종23년)에 태어났다.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사수(士洙),호는 겸재(謙齋)·광암(廣巖)이다. 부친은 박진석(朴震錫)으로관직이 없었다.  김창협의 제자인 이재(李縡, 1680-1746)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다.  박성원의 집안은 한미한 집안이었기 때문에 그는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는 박성원’( ⌈영조실록 ⌋15년10월) 혹은 ‘세력이 없는 사람’( ⌈영조실록 ⌋20년 9월) 등으로 알려졌다.

1721년(25세, 경종1년)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1726년경 부터 이재(李縡)에게서 배우고,  서인과 노론의 중심 인물로 성장하였다.

1728년(32세,영조4년) 별시문과의 을과에 급제하였다.  사간원정자(司諫院正字)·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등에 임명되어 언관으로 활동하였다. 영조가 펼친  탕평 정책에 대해서는 매 우비판적이었다.

1744년(48세,영조20년) 지평(持平)으로 있을 때 영조가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는 것을 반대했다.  당시 연로한 고위 문관들의 친목 및 예우를 위해 설치한 관서이다.  나이가 70이 되면 기(耆),  80이 되면 노(老)라고 하였다.  이곳에 이름을 올리는 것 은신하들도 영광으로 알았고 임금들 조차도 영광으로 알았다.  박성원은 반대 이유를 이렇게 들었다.

“임금이 기로소(耆老所)에 이름을 올리는 것은 태조 때에 시작되었고,숙종께서 계승하였습니다.  오늘날 마땅히따 라야 할 것은 태조와 숙종께서 시행하였던 규범이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금년에 망륙(望六, 51세)이 되시 는전하를 기로소에 들도록 종신(宗臣)들이 상소를 한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앞선 임금님들께서 향년이 56~7세가 되어도 신하들이 청하였다는 말을 듣지 못했으니 , 그 당시의 신하들이 임금을 사랑하는 마음이 지금의 종신에 미치지 못해서 그러하였겠습니까?  진실로 조종의 고사는 정해진 시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숙종께서 기해년(1719년, 59세)에 거행하였던 것은 근거할 만 한 사유가 있었지만 지금 이를 근거로 기로소에 들고자 하는 것은 옳은 일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박성원은 이어서 이렇게 호소하였다.

“아!  앞선 조상들께서 남몰래 도와주고 수많은 영혼들께서 함께 보호하여 성상(임금님)의 수령(壽齡)이 1백세까지 살 것을 기대하는데,  몇 년 동안을 기다리는 것이 무슨 어려움이 있기에 반드시 이처럼 급급하게 하십니까? (중략)
청컨대 우선 기로소에 이름을 올리자는 명령을 중지하도록 하소서.”

아직 50세를 갓 넘은 영조 임금이 몇 년을 못참아 기로소에 이름을 올리는 것은 아니 될 일이라는 주장이었다.  박성원의 주장은 기로소 건뿐만 아니라 모두 11조목에 이르는 것이었다.  그중에는 사관의 임용에 관한 일, 경연관을 잘못 선택한 일, 경연에 참석할 자격도 없는 자를 뽑았는데 임금이 학문이 훌륭한 자라고 오해한 일,  관리들이 부정을 저지른 일, 외직에 있는 대신들이 집을 짓지 못하게 하명을 하였는데 거의 모든 대신들이 집을 지은 일에 대해 처벌해야 한다는 것 등이었다.
박성원은 한건한건 구체적인 실명과 사례를 들어 근거를 제시하였다.
이러한 문건을 접한 영조는 자신이 몹시 부끄러웠는지 노발 대발 하면서

“이것은 반드시 우리 조정의 훌륭한 관리들을 모두 쫓아내려고 하는 계책이다.”

라고 하였다 .이윽고 박성원을 불러서, 크게 화를내면서 이렇게 말했다.

“전국 시대 사람들은 초(楚)나라가 아니면 조(趙)나라로 갔었는데,  한쪽 구석에 있는 조선은 남쪽 오랑캐 사는 곳이나 북쪽 오랑캐 사는 곳 이외에는 갈 만한 데가 없다.  너는 무슨 심보로 그런 맹랑한 글을 올렸는가?  내가 기미(機微)를 알아 차리고서 일찍이 물러났던들,  어찌 너에게 이처럼 곤욕을 당하였겠는가?  조정의 신하라면 혹시 자격도 없는데 기로소에 이름을 올리려고 하는 자가 있다면 그것을 반박하더라도 상관없다.  하지만 어찌 네가 감히 임금이 기로소에 들어가는 것을 반박하는가?”

영조는 결국 박성원에게 무슨 배짱으로 너는 임금을 모독하는가 라고 물었던 것이다.  조선에서 임금을 모독하고 도망 갈 곳은 아무데도 없다.  중국의 전국시대와는다르다는 것은 전국시대 사람들은 사방으로 도망갈 곳이 많았다는 것이다.  영조는 박성원을 죽여 버리고 싶은 생각까지 들었을 것이다.  그러한 간언을 하는 박성원으로서는 물론 죽을 각오를 하고 올린 것이었다.  모든 건의에 대한 자료도 철저히 조사 하여 매우 구체적인 물증까지 제시하였다.  그만큼 구체적이고 치밀했기 때문에 영조의 분노는 더욱 컸다.  20여년간 자신이 해온  정치,  자신이 세워 온 성군으로서의 권위가 무너지고,  그 동안 중요하게 추진해온  탕평책 역시 박성원의 한마디로 무위로 돌아갈 수  있었기때문이다.

영조는 박성원이 올린 상소문을 하나하나 들추어 몹시 꾸짖었다.  박성원은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것을 다시 상세히 말씀드리겠다고 청했으나 영조는 듣고 싶지 않았다.  곧바로 그의 관직을 박탈하고 그 자리를 다른 사람으로 임명하라 고명했다.  이에 승지 남태량(南泰良) 이이렇게 말했다.

“신의 팔뚝이 끊어지더라도 그와 같은 명령을 신은 감히 쓸 수가없습니다.”

영조는 그 자리에서 곧바로 남태량의 관직을 박탈하였다.  그리고 바로 승정원에 비망기(備忘記, 임금의 명령을 적은 기록)를 내렸다.  하지만 승지 정필녕(鄭必寧)과 이창의(李昌誼)가 그것을 반포하지 않고,  임금을 직접 만나 말씀을 듣겠다는 요청을 하였다.  영조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고 승지 두 사람도 바로 관직을 박탈하고 다른 사람들을 새로 그 자리에 임명하였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병을 구실로 오래도록 취임하지 않았던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궁궐로 들어왔다.  그는 임금이 비상(非常)한 명령을 내렸다는 소문을 듣고서 들어온 것이다.  그는 여러 재신(宰臣)들과 3사(三司)의 관리들을 거느리고 함께 잇따라 임금에게 알현을 요청하였다.  영조는 그들의 계속되는 알현 요청에 밤 2시경에야 비로소 그것을 허락하였다.
송인명의 무리와 함께 영의정 김재로(金在魯)와 우의정 조현명(趙顯命)도 또 뒤따라 들어왔다.  여러신 하들이 모두 임금이 내린 명령을 취소하기를 호소했다.  이에 영조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본래 성색(聲色)의 좋음을 빨리 취득할 생각이 없었다.  단지 노인(老人)의 이름을 얻고자 하는 데에 지나지 아니하였다.  그런데(박성원의 간언을 들으니) 경들은 아첨하여 내 마음을 즐겁게 하는 신하가 되었고 나는 아첨을 좋아하는 임금이 되었다.  이것은 내가 매우 한스럽게 여기는 바이다.  지금 다시 그 마음을 바꿀 생각은 없다.”

좌의정 송인명이 이렇게 말했다.

“3백 년의 종사(宗社, 나라)와  대신(臺臣, 간언을하는신하) 한 사람을 비교할 때 그 경중이 어떠하겠습니까?  전하께서 천승지국(千乘之國,  제후의 나라.  만승지국은 천자의 나라임)의 위엄으로 박성원 한 사람을 다스리는 데에 무슨 곤란이 있기에 이와 같이 과격한 행동을하십니까?”

예조판서 이종성(李宗城)이 이렇게 말했다.

“이번일은 앞으로 나가기만 하고 뒤로 물러남이 없는데,  만약 전하께서 끝내 마음을 돌이켜서 저희들의 말을 들어줄 수가 없다면 장차 궁문 앞에서 절규(絶叫)하는 일이 일어나서 동조(東朝,  태후가 집무하던 곳 .숙종의 둘째 부인 인원왕후仁元王后)를 놀라시게 할까 두렵습니다.”

영조는 이 말을 듣고 다소 누그러져 이렇게 말했다.

“예조판서의 말을 들으니,  능히 마음을  움직이지 아니할 수가 없다.  이번의 명령은 도로 거두겠으나 마음은 거둘 수가 없다.”

이에,  좌의정 송인명이 박성원을 유배하여 추방할 것을 청하였다. 영조는 박성원을 섬에 유배시키고,  앞서 명령한 관리들의 관직 박탈은 그대로 시행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이번에 고위 관료들의 가슴  속에 가득찬 당심(黨心)과 종이에 널리 퍼져 있는 사사로운  뜻은 내가 명령하기를 기다리지 아니하더라도 여러 사람들이 다 아는 바이다.  그중 에서 조명겸·서명형·이명곤은 사람들이 욕하는 암담한 죄과를 그대로 둘 수가 없으니, 모두 해당 관부로 하여금 이들을 처리하게 하라.”

조명겸, 서명형, 이명곤은 박성원이 문제있는 인물들로 지적한 관리들이었다.  이러한 상황을 일거수 일투족 옆에서 지켜보면서 기록하고 있던 사관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역사적인 기록을 마무리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박성원은 임금과 소원한 신하로서 감히 말하는바가 거리낌이 없었다.  비록 그 마음이 과연 공의(公議)에서 나온 것인지는 알지 못하겠으나 그 기백은 숭상할 만하고,  그 말도 또한 취할 만한 것이 많았다.  특히 한 마디 말이 임금의 뜻을 거스렸기 때문에 그 몸은 귀양 가고 그 말은 쓰여지지 못하였으니,  애석한 마음을 이길 수가 없다.  아!  이 세상을 돌아 보건대,  당파가 없는 사람을 어찌 얻을 수가 있겠는가?  다만 그 말의 시비(是非)를 보아서 취하고 버리는 것이 옳을 터인데,  어찌 당인(黨人)이라고 지목하여 그 말을 다 버릴 수가 있겠는가? (박성원이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 조명겸의 무리는 하나같이 의금부에 나아갔으나,  곧 모두 죄가 없다고 밝혀졌다.  그러나 박성원이 논한 바가 또 어찌 다 허망한 말이겠는가?”

박성원은 남해에 ‘위리안치(圍籬安置)’의 유배형을 받았다. ‘위리안치’는 중죄인에 대한 처벌로 유배지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집 둘레에 가시가 많은 탱자나무를 돌려 막 는형벌이었다.  유배형 중에서도 특별히 엄한 형벌이었다.
박성원은 유배지로 떠날 때부터 남해에 도착하여 생활하면서 느낀 심정을 날짜별로 시를 지어 기록하였다. ⌈남천록(南遷錄) ⌋이 그 기록이다.   그가 유배간 남해는 대나무가 특히 많았다.  가운데는 대나무를 노래한 시가 많았다.
박성원이 대나무에게 물었다.

겨울 눈발에도 당당함은 오직 그대이기에 가능했는데
어쩌다가 눈의 위세에 몸을 굽히게 되었는가?
요즘 들어 (자네는) 사람들의 올곧은 정신에 이르지 못하니
지난날 늠름하고 강직하다는 칭송이 부끄럽구나.

대나무가박성원에게이렇게답했다.

내 머리를 누를 수 는있어도 뜻은 움직이기 어려우니
잠시 굽혔어도 결국 펼 것이니, 때가 있는 것 일세.
잠시 후  눈이 녹으면 푸르게 홀로서서
그대에게 다시  아름다운 자태를노래하리라.

1746년(50세,영조22년) 유배지에서 석방되었다.  석방되어 한양에 도착하여 다시 대나무 시를 썼다.
박성원이대나무를그리워하여말했다.

절해에서 비바람 서리를 함께 겪었더니
삼 년 유배살이에 (그대에게) 가장 정을 붙였었지
뜰에 가득 대숲 모습은 다시 대하기 어려워도
성근 운율은 응당 꿈속에 맑게 들어오리라.

대나무가박성원에게말했다.

나는 (대나무) 본래 무심한데 그대는 정을 남겼구려.
마음속 회포가 끝내 서로 맞는다면
천리 밖인들 한 뜰에서 대하는 것과 어찌 다르겠는가.

박성원은 유배지에서 석방된 뒤 얼마 되지 않아,  세자를 가르치는 세손강서원 유선(世孫講書院諭善)으로 임명되었다.

1750년(54세,영조26년) 어머니와 형, 형수가 사망하여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상을 마친 1754년에 사헌부장령으로 임명되었다.

1759년(63세,영조35년) 사헌부집의에 임명되었다.  영조에게 언로를 열것을 간언하였다.  8월부터 세손 (훗날의정조)을 가르치면서 일기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1760년(64세,영조36년) 10월에 여러 신하가 글을 올려 농사의 어려움과 백성의 고통을 세손에게 알려야 한다고 건의하였다.  이에 영조가 세손 교육을 담당하는 박성원에게 그러한 내용의 격언을 모아 만들게 하였다.  박성원은 경전 및 기타 서적에 서발췌하여⌈보민격언(保民格言) ⌋을 편찬하였다.  다음해 2월 1일 임금 앞에서 강의하였다.

1761년(65세,영조37년) 7월에 ⌈강서원일록(講書院日錄) ⌋의 기록을 마쳤다.  이 기록은 1759년(영조35년) 8월 9일부터,  이해 7월 5일 까지,  박성원이 정조가 세손 시절에 공부한 교육과정을 일기체로 기록한 책이다.  세손강서원(世孫講書院)의 종4품 관직인 좌익선(左翊善)으로 강의를 주관하였는데,  정조는 이때 10살이었다.  강의 과목은『소학』외편과 내편, 『대학』, 『논어』, 『사략』등이었다.

1767년(71세,영조43년)에 사망했다.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저서로는 『돈효록(敦孝錄)』, 『보민록(保民錄)』, 『돈녕록(敦寧錄)』, 『겸재집(謙齋集)』, 『예의유집(禮疑類輯)』등이있다. ⌈예의유집 ⌋은 예서(禮書) 연구에 힘쓴 그가 의문시 되는 문제를 지적해 조목마다 사견을 첨부한 것이다.
그는 낙론(洛論)에 동조하여 한원진(韓元震) 등의 호론(湖論)을 반박하였으며,  백성들을 교화하는 근본으로 효를 중시하고, 효가 바로 백성들을 보호하고 국기를 다지는 원동력이 된다고 생각하였다.
영조는 세손(정조)의 학문은 모두 박성원의 힘이라는 칭찬을 하였다. 정조는 나중에 자신을 가르친 박성원에게 큰 은혜를 입었다고 생각하였다.  어린 시절 자신에게 학문을 가르쳤고,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 때문에 정신적으로 위태로운 시기에 자신과 함께했던 박성원에 대해서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시호를 내리고,  박성원의 자손들을 음직(蔭職)으로 관리에 등용시키고,  박성원의 ⌈돈효록 ⌋, ⌈예의유집 ⌋등을 왕명으로 간행하였다.

<참고자료>
⌈영조실록 ⌋. ⌈국역일성록 ⌋,영조37년조
김윤정, 겸재 박성원의 예학과 ⌈예의류집 ⌋의성격, ⌈한국문화 ⌋61,2013
이순두, 박성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강서원일록(講書院日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김성철, ⌈기로소와박성원의남해유배일기⌋,<남해타임즈>, 2015.6.2
이경식, ⌈남해유배문학기행⌋,<국제신문>, 2015.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