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정진(沈定鎭, 1725-1786)


 

심정진(沈定鎭, 1725-1786)                                 PDF Download

 

려서는 박필주(朴弼周, 1665-1748)에게서 배웠다. 박필주는 서울 주변에 세거하면서 서울의 학계를 주도하며 영조의 완론 탕평 체제 속에서도 산림(山林)의 입장을 존중하며 노론의 의리를 끝까지 지키려고 하였던 노론 낙론(洛論) 계열 산림이자 학자였다. 과거에 응하지 않고 스승인 김창흡(金昌翕) 아래에서 수학하였다. 그는 조선 후기 인성과 물성에 대한 호락논쟁(湖洛論爭)에서 낙론의 이론가로서 활발한 논의를 전개하였다. 그가 이길보(李吉甫)에게 쓴 편지에서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은 근본적으로 동일하다는 내용으로 그 이유에 대해 자세히 논하고 있다.

후에 이재(1680-1746)에게도 가르침을 받았다. 이재는 김창협의 문인으로 영조 연간 의리론(義理論)을 들어 영조의 탕평책을 부정한 노론 가운데에서 준론(峻論)의 대표적 인물이며, 윤봉구(尹鳳九), 송명흠(宋命欽), 김양행(金亮行) 등과 함께 당시의 정국 전개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당시의 호락논쟁(湖洛論爭)에서는 이간(李柬)의 학설을 계승해 한원진(韓元震) 등의 심성설(心性說)을 반박하는 낙론의 입장에 섰다. 심정진은 <제미호선생문(祭渼湖金先生文)>에서 사도의 도통을 논하면서 중국에서는 맹자 이후로 이정과 주자를 들고 동방에서는 퇴계 이황, 율곡 이이, 우암 송시열을 이어서 도암 이재를 들 정도로 추숭의 일념과 스승에 대한 자부심을 한껏 드러내고 있다.

본관은 청송(靑松)으로 자는 일지(一志)이고 호는 제헌(霽軒)이다. 아버지는 사증(師曾)이며 박세채(朴世采)가 박태두의 작은아버지뻘 되는 종숙이다. 집안이 대대로 서인 노론계에 속하였다.

1753년(영조 29)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며, 1758년 영릉참봉(寧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774년에 다시 부수(副率)로서 세손인 정조를 보살폈고, 특히 경학에 뛰어나 강설(講說)이 좋았다는 칭송을 받았다.

1776년(정조 즉위년)에 중부도사(中部都事), 호조좌랑을 거쳐 회덕현감에 부임하여 송준길(宋浚吉)이 만든 향약을 이곳 주민에게 시행하여 백성들의 교화에 노력하였다. 1781년(정조 5) 병으로 사직한 뒤에는 향약을 본격적으로 실시하기 위하여 송준길이 만든 향약을 다시 다듬어 전국적으로 실시할 것을 상소한 바 있다. 1783년에는 다시 복직하여 호조좌랑이 되고 이어 제용감판관·송화현감을 지낸 뒤, 1785년에는 사어(司禦)를 거쳐 동지중추부사로 오위장을 겸하였다.

심정진의 인물성동이론은 학계에 많이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그의 문집인 <제헌집>에 기록된 인물성동이에 대한 논설들을 통하여 낙론의 입장을 정당화하는 예리한 논리들을 만날 수 있다.

<天命之謂性說>에서

‘사람들이 대동(大同)의 성(性)이 리인데 이는 만물에 품부되기 이전으로서 같은 것이고, 본연의 성은 만물에 이치가 품부된 후로 다르다고 하는데 이는 내 생각과 갈리는 핵심 지점이다. 기질에 섞이지 않는 본연의 성이 어찌 대동의 성이 아니란 말인가? 이미 본연이라고 했으면 품수 받기 이전과 이후의 다른 것이 존재할 수 있겠는가?’

라고 하여 당시 호론에서 성삼층설에 기반하여 초형기의 대동지성과 인기질의 본연지성을 구분하는 논리에 대하여 낙론의 입장에서 반박하고 있다.

<미호선생언행록(渼湖金先生語錄)>에서는 호락논쟁에 대한 미호의 견해를 알 수 있는 문답이 들어있으며, 그 중에는 진정한 공부에 대한 사제 간의 대화도 들어있다.

‘어느 날 정진(심정진)이 혼자 있을 적에 선생(김원행)이 옛날의 학자들로 가령 공자 문하의 제자들이 스승과 주고받은 논의는 모두 위기지학의 학문으로 인애, 효제, 덕을 닦고 사특한 것을 제거하는 것에 관한 것들이었다. 후세에 문의의 의미를 강설하는 공부와는 차이가 있다. 문의를 따지지 않을 수는 없지만 공자 문하의 제자들이 무엇을 배우고자 했는지를 먼저 헤아려야 한다.’

이는 호락논쟁이 단지 이론적인 지적 놀음이 결코 아니었음을 알려준다고 할 것이다.

저서로는 <제헌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