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林泳, 1649-1696)


임영(林泳, 1649-1696)                                            PDF Download

 

영(林泳, 1649-1696)은 조선시대 후기의 문신으로 대사간, 부제학, 황해감사, 개성부유수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문장이 뛰어나고 제자백가의 글에도 밝았으며, 경전과 역사서에 두루 정통하였다. 이단상(李端相),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 박세체(朴世楷) 등에게 배워 학문의 폭이 넓었다. 학맥으로 보면 대체로 기호학파(畿湖學派)에 속하였으나, 이기론(理氣論)은 퇴계 이황(李滉)과 율곡 이이(李珥)의 절충적인 입장을 취했다. 특히 율곡의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에는 찬성하고 기발이승설(氣發理乘說)에는 반대하였다.

1649(1세, 인조 27년)에 전라도 나주 다시면 회진리 동촌(東村)마을에서 4형제 중 셋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덕함(德涵), 호는 창계(滄溪)다. 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 임일유(林一儒, 1611-1684)이며, 어머니는 임천조씨(林川趙氏)로 조석형(趙錫馨)의 딸이다.

1656(8세, 효종 7년),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큰 빗방울이 연잎에 떨어지니, (大雨落蓮葉)

하얀 옥구슬 푸른 쟁반에 구르네. (白璧轉靑盤)

1665(17세, 현종 6)에 호남에서 서울로 올라가 유학을 하였다. 부친의 명에 따라 정관재(靜觀齋) 이단상(李端相)의 문하에 들어가 과거 공부를 하였다. 그는 원래 사장학(詞章學)만을 좋아하였는데, 사장학이란 문장과 시문, 즉 문학을 중시한 학문으로, 자연과 인간의 도나 이치를 중시한 도학(道學)과 대응되는 학문이다. 스승 이단상은 이러한 그를 보고 한 가지 학문만 고루하게 집념하지 말라고 권장하여 그의 학문은 도학까지 포함하여 폭이 넓어졌다. 나중에 스승의 아들인 이희조(李喜朝)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상하였다. “형 임영의 뜻은 원대하였다. 성현의 학문에 밝았으며, 조그만 것에 만족하지 않았으며, 격물궁리(格物窮理)에 힘썼다.” 이후 임영은 사마시에서 장원을 하였다.

이해에 임영은 통덕랑(通德郞) 조건주(曺建周)의 딸을 맞이하여 결혼을 하였다. 부인 조씨는 6살 때 부친을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임영은 자신의 부인에 대해서 ‘(남편을) 지극정성으로 극진하게 섬겼으며, 남편이 싫어하는 것은 삼갔고, 하고자하는 것은 자신의 이해 고락(苦樂)을 가리지 않고 따랐다.’(⌈창계집⌋)고 하였다.

1671(23세, 현종 12년), 정시문과에서 을과로 급제하고, 호당(湖堂)에 뽑혔다. 호당이란 조정에서 설치한 독서당에서 공부만 하는 사람을 말한다. 문신 중에서 글과 학문이 뛰어난 사람에게 휴가를 주어, 오로지 학업(學業)을 닦게 하였던 제도이다. 대제학은 이 호당을 거친 자만 가능할 정도로 우대하였다. 임영은 그 뒤 이조정랑, 부제학, 대사헌, 전라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나중에 그의 지위는 참판까지 이르렀다.

1674(26세, 현종 15년), 부인 조씨(1651-1674)가 24살의 갑자기 사망하였다. 아들 하나를 낳았으나 바로 죽었고, 다시 자신이 사망하기 이틀 전에 딸을 낳았으나 딸 역시 곧 죽었다. 임영은 자식하나 남기지 못하고 죽은 부인을 위해서 행장(行狀)을 지어 슬픔을 표현하였다.

1694(46세, 숙종 20), 대사간, 개성부유수 등에 임명되었다. 그는 시간이 날 때는 가끔 지인들이 있는 곳을 찾아가 여행을 하고 시문을 남겼는데,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물새가 점점 친해지면, 학을 기르기를 그만두겠네.
(沙鳥漸親休養鶴)

소나무 바람 조용히 들으니, 그야말로 거문고 소리네.
(松風竊淸當鳴琴)

이러한 아름다운 정취 어찌 혼자만 누리는가?
(箇中佳趣那專享)

조만간 그대를 다시 찾아오겠네.
(早晩煩君復見尋)

1695(47세, 숙종 21), 부제학에 임명되었다. 병이 들었는데, 약물을 임금으로부터 하사받았다.

1696(48세, 숙종 22년)에 사망하였다. 유고집으로 「창계집」이 있다. 나주의 창계서원(滄溪書院), 함평의 수산사(水山祠)에 배향되어 있다. 「창계집」은 청도군수를 역임한 동생 임정(林淨)이 1708년(숙종 34)에 청도에서 목판본으로 간행하였다. 모두 1177판으로 27권 14책에 이르는데, 현재 규장각과 국립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문집에는 경연록(經筵錄), 각종 서적을 읽고 남긴 메모인 「독서차록(讀書箚錄)」과 「일록(日錄)」 등이 실려 있다. 「경연록」은 1680년(숙종 6년)에 숙종과 경연을 하면서 「서경」 등 경전을 강론한 일기다. 「일록」은 그가 관직에 취임한 때부터 거의 끝마칠 때까지, 즉 1666년(현종 7년)부터 1691년(숙종 17년)까지 자신이 한 일, 찾아온 손님들과 나눈 이야기, 느낌 등을 그때그때 기록한 것이다.

또, 경연을 열지 않는 것은 군주의 큰 잘못임을 지적하는 상소문 「물이국옥정강차(勿以鞫獄停講箚)」, 우리나라 군주가 중국 사신을 나아가 맞이하는 것은 나라의 체면과 관계되니 나가지 말 것을 청한 「청물친출영칙소(請勿親出迎勅疏)」, 호포법(戶布法)의 문제점과 궁중에서 내수사(內需司)를 내세워 저지르는 온갖 비행, 국방의 문제점 등을 지적한 「응지언사소(應旨言事疏)」 등이 실려 있다.

그는 다른 학자들과는 달리 고문의 경전 주해에 커다란 업적을 남겼는데, 그의 문집 「독서차록」을 보면 사서(四書), 「성리대전」, 「근사록」 등 서적 이외에도 「예기」, 「의례」, 「가례」에 대해서도 자신의 견해를 남겼다. 이러한 경학관을 바탕으로 성리설을 전개한 것도 그의 학문의 특징이다. 나아가 오종일의 지적에 따르면 그는 “성리학의 이론에만 집착하지 아니하고 박학적인 방법을 통하여 고대 경전의 정신을 회복하고자 하였고, 주자의 이론에 대하여 자기의 견해를 보완하여 그 뜻을 더욱 분명히 하였다.”

그는 이단상(李端相) 외에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 등 에게도 배웠는데, 이기설(理氣說)에 대한 견해는 율곡 이이(李珥)의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에는 찬성하고 기발이승설(氣發理乘說)에는 반대하였다. 그는 대체로 기호학파(畿湖學派)에 속하였으나, 이기론(理氣論)에서 이황(李滉)과 이이의 절충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가 남긴 시 중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계곡 물을 따라 돌아가니 골짜기가 깊구나.
(溪路縈回一壑深)

세상에 누가 알까, 구름에 덮힌 이 숲을.
(世間誰識此雲林)

처마에 비친 차가운 달빛, 강산의 빛깔을 바꾸네.
(寒簷月動江山色)

조용한 밤에 읽는 책, 우주의 마음을 여는 구나.
(靜夜書開宇宙心)

<참고자료>
조준하, 「임영」, 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오종일, 「창계 임영의 학문과 성리설」, 「동양철학연구」 22, 2000김은희, 「南道 정자기행(787)-정자詩로 만난 인물-임영」, <한국매일>,2013.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