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민학(安敏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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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민학(安敏學, 1542년〜1601년)은 서울 남산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광주(廣州), 호는 풍애(楓崖)다. 19세 때 향시에 장원을 한 뒤에는 과거를 단념하고 성리학 공부에 뜻을 두었으나 율곡 이이의 눈에 띄어 추천을 받아 희릉참봉(禧陵參奉)이 되었다. 이후 사헌부감찰, 대흥·아산·현풍·태인 등지의 현감을 두루 역임하였다. 임진왜란 때에는 소모사(召募使)에 임명되어 전라도 지역에서 군량과 말, 군사 등을 모집하여 북쪽으로 향하였다. 그러나 아산 근방에서 병을 얻어 더 이상 활동을 하지 못하고 유성룡(柳成龍)에게 병사들과 군량을 넘기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문장이 뛰어난 그는 저서 풍애집(楓崖集)을 남겼다. 일찍이 그는 30대에 부인과 사별하였는데 당시 한글로 쓴 애도문이 지금까지 전해져 온다. 충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애도문은 구어체의 산문문장으로 되어 있는데 한글 연구와 조선시대 한국어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1542년(1세)
안민학은 중종 37년 9월 17일,(음력) 서울 남산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광주(廣州)이며, 자는 습지(習之) 혹은 이습(而習)이고, 호는 풍애(楓崖)이다. 안민학의 부친은 찰방 안담(安曇)이다. 안담의 자는 태허(太虛), 호는 송애(松厓)이다. 안민학은 9세 경 때부터 소학, 효경 등을 읽기 시작하였다. 그의 모습은 기골이 장대하고 의연하여 쉽게 범접하지 못할 바가 있었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또래와 노는 것을 즐기지 않고 항상 독서에 침잠하여 의젓한 모습이었다.
어려서 박사엄(朴思奄)을 스승으로 모시고 글을 배웠다.

1560년(19세)
향시(鄕試)에 장원을 하였다. 하지만 회시(會試)에 응시하지 않고 과거 공부를 포기하였다. 그는 과거시험 공부가 학자들의 병폐라고 우습게 여기고 마음에 두지 않았다. 대신 역사서, 제자백가 서적을 비롯하여 『심경(心經)』, 『근사록(近思錄)』 등 성리학 관련 서적을 읽기 시작했다. 화려하고 담백한 그의 문장은 일가를 이루었으며 필법 역시 훌륭하여 많은 사람들이 그와 교류하기를 원했다.

1561년(20세)
이즈음 학행(學行)이 주변에 알려져 사람들의 추천을 받아 원릉참봉(元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이해 현풍(玄風)의 곽씨(郭氏)와 결혼하였다.(문집총간인물연표 「안민학 행력」) 다른 기록에 따르면 1567년(명종 22)에 결혼하였다고 한다.(구수영 「안민학의 애도문 고」와 최웅환의 논문 「16세기『안민학 애도문』의 판독과 구문분석」 참조) 곽씨 부인은 1554년 생으로 신랑보다는 12살 아래이며, 할아버지는 승지 안방(安邦)이고, 아버지는 곽개(郭凱)이다. 일찍 부친과 사별하고 편모슬하에서 자랐다.

1564년(23세)
부친상을 당하였다.

1566년(25세)
사암(思菴) 박순(朴淳)을 모시고 학문을 배웠다. 율곡 이이, 우계(牛溪) 성혼(成渾, 1535년〜1598년)을 비롯하여 정철(鄭澈), 이지함(李之菡), 고경명(高敬命) 등과 교류하였다. 이 때문에 그의 학문은 대체로 율곡 이이와 성혼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또 필법이 뛰어났다.

1571년(30세)
우계 성혼과 함께 천마산을 유람하고 영통사에 머물렀다. 화담(花潭)을 방문하여 서경덕(徐敬德)의 묘를 참배하였다.

1573년(32세)
주변의 추천을 받아 건원능(健元陵) 참봉(參奉)이 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율곡 이이가 재차 천거하여 희능(禧陵) 참봉이 되었다. 그러나 몇 개월 뒤 벼슬을 버리고 파주로 돌아왔다. 이해에 사직 참봉에 임명되었다.

1576년(35세)
이해 3월,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는 율곡을 배웅하였다. 5월 8일에 부인 곽씨가 지난해 유산을 한 뒤 중병을 얻어 끝내 회복을 하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향년 23세였다. 곽씨 부인과 사이에 1남 1녀를 두었다. 부인의 시신은 부인의 유언대로 파주의 친정 선산에 안장하였다. 이때 한글로 쓴 애도문이 최근에 백자 명기류(明器類, 장사지낼 때 죽은 사람과 함께 무덤 속에 묻는 그릇)와 함께 발굴되어 충남도 유형문화재 제243호로 지정되었다. 부인 곽씨의 무덤에서 발굴된 이 애도문에서 안민학은 곽씨가 편모슬하에서 자라다 자신과 결혼하여 함께 생활했던 일들을 회상하고 어려운 형편 탓에 아내를 잘 챙겨주지 못한 지아비로서의 자책과 회한, 그리고 아내를 향한 그리움을 절절히 표현하였다.
안민학이 곽씨 부인의 시신을 옆에 두고 한글로 써내려간 애도문은 다음과 같다.(최웅환의 번역문 참고. 일부 단어는 쉬운 말로 고침)

늙은이 안민학은 아내 곽씨 영전에 고하노라.
나는 임인생(1542년)이고 자네는 갑인생(1554년)으로 정묘년(1567년) 열엿셋날(16일) 합궁하니 그 때가 나는 스물다섯이고 자네는 나이 열 셋일 적에, 나도 아비 없는 궁핍한 과부의 자식이고 자네도 궁핍한 과부의 자식으로서 서로 만나니 자네는 아이요 나는 어른이오나 뜻이 어려서부터 독실하지 못한 유학의 가르침을 배우고자 하므로 부부유별(夫婦有別)이 사람의 도에 중요하므로 너무 친하거나 가까이 하지 말라고 하여 자네와 내가 함께 친하게 말인들 하며 밝은 곳에서 밥을 먹은 때인들 있었던가.
내가 자네에게 밤이나 낮이나 매번 가르치되, 어머님께 봉양을 지성으로 하고 지아비에게 순종하고 따르는 것이 부인네 도리라고 하여 이르던 시간이 십년을 함께 살아서 바라는 것이었네. 그대가 내 뜻을 아니 받들고자 할까마는 궁한 집에 과부 어머님 위에 있고 나는 항상 오활하고 옹졸하여 가사 쪽으로는 아주 챙기지 못하였으나 외로운 시어머님께 봉양하고 하는 정이 지극하였도다. 이것을 어찌할까. 자기 입을 의복도 못하고 행여 실을 뽑아도 나를 해줄 것이라 하고 그대는 겨울이라도 아무런 저고리 하나 하고 검은 겉옷 하나나 하고 눕덥(누더기) 치마만 하고 바지도 벗고 차가운 구들에서 너절한 자리하고서 견디니 인내가 독하기야 이 위에 있을까. 그대 점점 자라 키도 커가니 내가 그대 외양을 희롱하였구나. 내 말하되 나라서 그대를 길러 내었으니 나를 더욱이 공경하라고 한 시간이 그대라고 해서 넋이 된들 잊을 것인가.
내 벗도 있어서 서울에 있으니 내 어머니를 번거롭게 하여 헛이름을 얻어 두 번에 이르기까지 공도(公道)로 참봉을 하니 내가 내 몸을 돌아보니 너무도 부끄러워 다니고자 하는 뜻이 없는 줄을 그대가 사뭇 알기 때문에 조금도 그것으로 기뻐하는 뜻이 없고 내 매번 그대에게 말하되, 어머님이 하도 내가 그리 하기를 바라시니 마지못하여도 나중이면 파주나 아무데나 산수 있는데 가서 새집을 짓고 대나무를 이을망정 붕천(崩天, 하늘이 무너짐)을 시름하고 수석간(水石間)에 가서 살다가 죽자하니, 그대가 그 말을 좋게 여겨 들으니 내가 매번 그랬지.
물욕이 적은 사람은 그대 같은 사람이었도다. 그리하여 매양 살 땅을 못 얻고 하더니 어찌하여 내 몸에 죄앙이 쌓여서 병을 든 나는 살았고 병 없던 그대는 백년해로 할 언약을 저버리고 홀연히 하루아침에 어디로 가신 것인고. 이 말을 이르건데 천지가 무궁하고 우주가 공활할 따름이로세. 차라리 죽어 가서 그대와 넋이나 함께 다녀 이 언약을 이루고자 하나 홀어머니 공경하여 우는 것도 마음대로 못하니 내 서러운 뜻을 이룰까.
그대 오륙년 전부터 매번 심열이 있어 봄이면 자다가도 코가 시린 냉수를 달라하고 혓바늘 돋고 하니 그대 명은 되게 박하여 모자간에 변도 만나고 나도 성질이 사나워 그것으로 그대 마음 쓰게 한 것이 많았네. 그것도 너무 성정을 몰라 조그마한 일이라도 그냥 두어라고 하지 않으니 그리하여 병이 많이 들고 겨울이면 의복도 그리 너절하니 아이를 구월에 낳은 후 부터는 조리도 잘못하니 더욱 병이 들어 나중에는 을축년 유월부터는 아랫 자식(셋째 아이)이 들어서 다시 기운이 편치 아니하니 누울락 일어날락 하고 음식도 데면데면히 먹고 하니 나나 그대 어머님이 다 태기라고 하여 또 아들일까 하여 기뻐 말하니 그렇다고 하더니, 그러므로 나 믿어서 약 끝끝내 못하고 그해 (자네가) 팔월 추석 때 홍주의 아버지 묘제 하러 가서 그로 인하여 유산하고 구월 스무날 후에야 온 그대 병이 중하여 있으니 그 때부터야 진짜 병인 줄 알아 의약을 시작하였으나 그대가 약을 아니 먹으니 가까스로 인삼과 형개산을 설흔 복 넘게 먹었으나 벌써 병이 깊어 있고 그대 명이 그만한 것도 인력으로 어찌 할까.
그렇게 병들게 한 것은 내가 남편이 되어서 그런 것이니 다시 이 한 넋이 대답할까. 자식이 둘이 있으니 딸이 집안을 다스릴 것이거니와 아들이나 제 목숨이 길어 살아나면 이는 그대 비록 죽어도 그대 이어가고 우리 다 죽은 후라고 해도 자손이 있어 제사라고 하는 것이 이루어지겠지. 울적하네. 죽지 아니하여 살아 있으면 사나이 일생을 무얼 서러워하면서 그저 살까.
내 뜻은 자식이 있으니 그대 삼년을 지내고 양첩(양인의 딸을 첩으로 삼음)이나 하여 그대 자식을 후에 어려운 일 없게 하고자 하네마는 노친이 계시니 일을 마침내 어머니 마음대로 몰아 갈 것이나 반드시 내 뜻대로 삼년 째 기다리마. 장가인들 반드시 아니 들리라 할까하네. 그대 위해서 한 해를 상복을 입네. 첩이나 장가나 해도 기다렸다하지 상복을 벗은 후에 바로 할까. 아들이 살아나면 그대 조상 봉사를 전부 맡기고 그대의 기물을 전부 두 자식에게 나누어주고 나는 쓰지 말고자 하네.
그대 죽을 때에 그대 파주 그대 아버님 분묘 근처에다가 묻으라 하니. 이는 나 죽은 후에 부디 내가 홍주(안씨 집안) 선영에 갈 것이니. 이제 그대를 시랑 아버님(장인어른) 곁에다가 묻을 것이로되 내 죽기 전에는 외로운 혼이 될 것이오. 파주도 아주 버릴 것이니 그대 임종에 이르던 말을 쫒아 파주로 하려 하니 내가 거기에 들기 어렵네. 내 곧 (죽어서) 홍주로 가 들면 아들은 부모를 각기 묻는 것이 되며 우린들 죽어서나 한 곳에 갈까. 이 일 이제 필치 못할 것이네. 내가 병든 것이 이리 한없는 절망을 보고 얼마나 오래되어서 죽을꼬. 아니 죽을 적에는 꿈에나 자주 보이고 서러운 뜻 말하소.
나는 그대 어머님 향하여 그대 (사정을) 주지하고 조금은 내 (일을) 덜까. 다른 자식들이 봉양하면 자네가 사뢸 일을 (내가) 아니할까. 그대 어머님과 자식들은 내가 살이 있으니 어련히 할까. 잊고 가셨음이 망망하고 서럽고 그리운 정이야 평생을 잇는다 한들 끝이 있을까. 이제 처리하는 일만 하네. 죽었다 한들 정령이 있으면 모를까.
너무너무 한없이 슬프고 슬퍼서 붓 잡아 쓴다고 하나 정신이 없어 글자도 틀리고 떨어지며 말도 차서 없으니 자세히 보소. 집안일은 승지 아주버님과 장령 아주버님이 하여 주시네. 벗들도 진정하여 돌아보네. (여기부터는 한문으로 씀) 말이 여기에 이르니 오랫동안 서럽게 울고 죽고 싶네. 병자 오월초십일. 입관시 함께 묻네.

1577년(36세)
전주 이씨(李氏)와 재혼을 하였다. 이씨 부인과는 사이에 3남 2녀를 두었다.

1580년(39세)
율곡 이이의 추천으로 희릉참봉(禧陵參奉)에 임명되었다.

1582년(41세)
사헌부 감찰에 임명되었다. 또 갑자기 청양(靑陽) 현감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대흥 현감에 임명되었다.

1583년(42세)
이해 여름 사헌부가 임금 선조에게 안민학에 대한 파면을 다음과 같이 요청하였다.
“대흥 현감(大興縣監) 안민학은 불효(不孝)하고, 부제(不悌, 윗사람을 존중하지 않음)한 사람으로서 감히 헛된 욕심을 가져 내심을 속이고 거짓을 행하여 과거에 응할 재주도 없는 주제에 과거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듯한 태도를 취하고 있습니다. 또 말재주로 사람들을 헐뜯되 날로 그것이 기개와 절조를 숭상하는 것이라 여기며, 권세가들을 쫓아다니면서 요즘의 정치를 평론하는 등 그의 평소의 마음 씀씀이와 행한 짓들이 극히 예의가 없습니다. 그가 처음에는 재주와 행실로 벼슬을 취득하였고 나중에는 부지런히 주선을 행하여 높은 벼슬까지 올랐으므로 세상의 여론이 통분해 하고 있습니다. 파직을 명하소서.”
선조는 “아뢴 대로 하되 안민학에 대하여는 천천히 결정하겠다.”고 답하였다. 그 후 임금이 대신에게 물었는데 대신이 모른다고 대답하자 직위 교체만을 명하였다.
당시 사헌부는 서인을 배척하는 관료들이 장악한 것으로 보이며 율곡과 성혼 등을 따랐던 안민학은 그들의 눈엣가시가 되었던 것 같다. 안민학은 특히 정여립에게 미움을 받았다고 한다. 이후 아산현감으로 옮기게 되었다.

1584년(43세)
1월, 율곡이 사망하여 곡(哭)을 하였다. 2월에 모친상을 당하였다. 이 다음해 의주목사(義州牧使) 서익(徐益)이 상소를 올렸는데, 안민학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전에 (동인들이) 이이를 공격할 때 안민학(安敏學)과 이배달(李培達)이 이이의 문하에 왕래하였다는 이유로 부도(不道)라는 명목을 붙여 공격하더니, 이번에도 이 수단을 쓰고 있습니다. 안민학과 이배달의 사람됨에 대해서 신은 사실 잘 모르지만 이산보와 같은 경우는 하늘이 부여한 품성을 온전히 지니고 있으며 충후(忠厚)하고 조심스러운 것이 그 집안의 법도입니다. 그의 계부(季父)인 이지함(李之涵)도 일찍이 경외 받던 사람이었으니, 이와 같은 어진 선비를 어디에서 얻을 수 있겠습니까. 다만 말을 더듬는 병이 있어 말에 문채(文彩)가 없기 때문에 남에게 말을 듣고 있으니, 아마도 이 때문인 듯합니다. 신은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 깊이 살피소서.”

1586년(45세)
현풍 현감이 되었다.

1590년(49세)
태인 현감에 임명되었다. 다음해 11월, 견책을 받아 전주로 돌아갔다.

1592년(51세)
3월에 전주에서 홍주의 신평(新平, 지금의 당진시 신평면)으로 갔다. 이해 4월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금성(金城, 지금의 담양) 산곡(山谷)으로 피난하였다. 임금이 피난을 갔다는 소식을 듣고 행재소(行在所, 임금의 임시거처)로 달려갔다. 일설에는 세자 진영으로 들어가 사어(司禦)가 되어 수개월을 머물렀다고 한다. 이윽고 소모사(召募使, 의병을 모으는 임시 관직)에 임명되어 양호(兩湖, 충청과 전라)로 내려갔다.

1593년(52세)
광주(光州)로 내려가 먼저 사람을 보내 고경명(高敬命)에게 제사를 지냈다. 이후 인근지역에서 군량 수천석과 말 수백필, 그리고 수천명의 병사들을 모집하여 북상하여 아산에 진을 쳤으나 병으로 더 이상 진군할 수가 없었다. 이에 조정의 명령에 따라 체찰사(體察使) 유성룡(柳成龍)에게 이들을 맡기고 행재소로 가서 임금을 모셨다. 당시 중국에 사신으로 가는 정철(鄭澈)을 전송하였다. 5월경, 병으로 사직을 하고 홍주(洪州)의 신평으로 돌아갔다.
이해 가을, 양주(閬州) 성안에서 살았다. 10월에 조헌(趙憲)이 사망하여 곡을 하였다.

1594년(53세)
1월, 소무관(召撫官)으로 여러 지방을 돌아보고 홍주 신평으로 다시 돌아왔다. 이해 10월, 정철이 사망하여 곡을 하였다. 다음해 봄에 송익필과 함께 고산(高山) 이영원(李榮元)을 방문하였다.

1596년(55세)
이해 가을부터 세상사에 뜻을 버리고 독서에 열중하였다.

1601년(60세)
8월 13일, 병으로 홍주 신평 호월당(湖月堂)에서 사망하였다. 홍주 대진(大津, 당진군 송옥면 고대리)의 선영에 장사 지냈다. 다음해 그는 이조 참의(參議)에 추증되었다. 1910년에 규장각 제학(提學)에 추증되었으며, 문정(文靖)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저서로 풍애집(楓崖集, 楓崖先生集)이 있다. 풍애집은 2권 1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738년(영조 14)에 후손 안세광(安世光)이 편집, 간행하였다. 제1권에는 시 91수가 실렸으며, 제2권에는 제문, 잡저, 기(記), 서(書) 등이 실려 있다. 잡저 중에는 「심학론(心學論)」, 「하도낙서설(河圖洛書說)」, 「근사록설문(近思錄設問)」, 「대학서절해(大學序節解)」등이 수록되어 있다. 부록 1책에는 안민학의 연보, 행장, 비문 등이 실려 있다.

<참고자료>
선조실록 선조 16년(1583) 8월 3일자 기사, 선조 18년(1585) 5월 28일 기사
이태진, 「안민학(安敏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97년
「안민학 행력」, 한국문집총간(韓國文集叢刊) 인물연표, <한국의 지식 콘텐츠>
이동술, 「풍애집」,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96년
천기영, 「죽음도 막지 못한 사랑, 시간을 거슬러 활짝」, 디트뉴스24(http://www.dtnews24.com/), 2018.08.23.
구수영, 「안민학의 애도문 고」, 백제연구10, 1979
최웅환, 「16세기『안민학 애도문』의 판독과 구문분석」, 국어교육연구31,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