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익희(金益熙, 1610-1656)


김익희(金益熙, 1610-1656)                                 PDF Download

 

김익희는 자가 중문(仲文)이고 호는 창주(滄洲)다. 할아버지는 김장생(金長生)이고, 아버지는 김반(金槃)이다. 동생은 김익겸(金益兼)이다. 어렸을 적에 총명하고 재주가 뛰어났는데 김장생이 큰 인물이 될 것을 기대했다. 가학으로 시(詩), 서(書)를 배우고 장유(張維), 정홍명(鄭弘溟)에게서 고문(古文)을 배웠다.

1633년(인조 11)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부정자(副正字)에 등용되었다. 같은 해 검열을 거쳐 홍문록(弘文錄)에 올랐다. 1635년 수찬(修撰)·사서(司書)에 올랐다. 경연(經筵)에서 강론할 적에 낭랑한 목소리로 뜻을 분명하게 밝혀 인조(仁祖)가 가상하게 여겼다.

병자년(丙子年, 1636년 인조 14)에 후금이 청으로 국호를 바꾸고 사신을 보내 조정을 협박하자, 당시 옥당(玉堂)에 있으면서 동료들과 청과의 화의를 물리쳐야 한다고 주청했는데, 그 의리가 매우 분명했다. 당시 이미 전쟁의 실마리가 열렸는데도 관리들이 맡은 임무에 전처럼 게으른 것을 생각하고 포빙악화(抱氷握火, 월왕(越王) 구천(句踐)이 오왕(吳王) 부차(夫差)에게 항복한 후 그 원수를 갚으려고 괴롭고 어려움을 참고 견딘다는 뜻에서 겨울이면 차가운 얼음을 안고 여름이면 뜨거운 불을 손에 쥐었다는 고사(故事)에서 나온 말)의 주장을 지극히 진언하여 신첩(臣妾, 굴복하는 사람)으로 전락되는 욕을 막고자 했다.

이해 겨울 청이 마침내 침략해 오자 조정의 논의는 ‘걸련(乞憐, 다른 사람이 불쌍하게 여겨 줄 것을 구한다는 뜻)’으로 책략을 삼고자 했다. 이에 탄식하길,

“지금 반드시 저들한테 꺾이어 들어갈 바에는 차라리 바르게 행하다 죽는 것만 못하다.”

하고 드디어 동료들과 조정으로 들어가 임금을 마주하고서

“지금 화해하자는 말로 주상에게 아뢰는 자는, 반드시 죄를 주고 난 연후에 적(賊)을 물리칠 수 있을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임금이 탄 수레를 호위하여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들어가 독전어사(督戰御史)가 되었다.

1637년(인조 15) 2월에 맹약(盟約, 청나라와 맺은 강화 조약)이 이루어졌는데, 어머니 서씨(徐氏)와 둘째 아우 익겸(益兼)이 강도(江都, 강화도)에서 순절했다는 소식을 비로소 듣고서 적과 한 하늘을 이고 있음을 통분하였다. 또 나라가 모욕을 당하는 것을 생각하고 마치 살고 싶지 않은 듯이 여기어 상복을 벗은 뒤에 비록 조정의 일에 힘썼으나 마음속에는 즐거워하지 않았다.

1637년 교리(校理)·집의(執義)를 거쳐 1639년 이조좌랑이 되고, 1642년 사간이 되었다. 강원도감사(江原道監司)로 있을 적에 노산묘(魯山墓, 뒷날의 장릉(莊陵, 단종의 능))를 수리하고 율곡(栗谷)의 사당을 새롭게 하였다. 뒤에 부제학(副提學), 이조참의(吏曹參議)를 거쳐 대사간(大司諫)이 되었는데 노산군(魯山君)의 묘소에 제사 드릴 것을 청하여 시행하게 하였다.

 

그 후 병이 들어 체직되었다가 다시 성균관 대사성 겸 동지경연사(成均館大司成兼同知經筵事)에 제수되었다. 효종이 “김익희(金益熙)는 비록 다른 곳으로 옮긴다고 해도 대사성(大司成)만은 그대로 유지하게 하라.”고 하였다.

대사헌이 되자 모든 관사 사람들이 두려워 숨을 죽였고 여러 시기한 자들이 자취를 감추었다. 효종이 포상하여

“그대 직분에 삼가 힘써야 한다.”

고 하자, 사례하여 이르기를,

“분주히 직분을 수행함은 유사(有司)의 떳떳함입니다.”

라고 했다. 효종이

“유사의 떳떳함을 거론할 수 있는 자는 몇 사람이나 있겠는가?”

라고 하였다. 동료들 가운데 법에 구애되는 일을 한 자가 있으므로 잡아서 용서하지 않았는데 마침내 거슬리는 말이 있어도 임금은 공을 올곧게 여겨 위로하고 달랬다.

1656년(효종 7) 정월(正月)에 홍문관(弘文館)과 예문관(藝文館))의 대제학에 제수되었다가 2월에 형조판서(刑曹判書)로 승진하였는데, 청에 보내는 문서를 짓는 것 때문에 대제학을 사양하자 임금도 회피(回避)할 것을 특별히 허락하고 문서에 관한 일을 차관(次官)에게 명하였다.

5월에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이조판서(吏曺判書)에 임명하였다. 효종이 인재를 추천하게 하여 나랏일을 함께 성취하려 하다가 병환으로 사직의 소를 보고서 깜짝 놀라 이르기를,

“이 직임에 발탁하여 임명한 것은 크게 쓰기 위함인데, 어찌하여 거듭 질병에 걸린단 말인가?”

라고 하였다. 체직을 허락하고 의원과 약을 서로 이어지게 하였으며 또한 액정서(掖庭署, 왕과 왕족의 명령 전달, 알현 안내, 문방구 관리 등을 관장하던 관서) 사람을 보내서 문안케 하였다. 부음(訃音)이 알려지자 효종이 몹시 슬퍼했다.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이 지은 비명이 ⌈국조인물고⌋에 실려 있는데, 김익희와 송시열의 교분이 두터웠음을 알 수 있다.

 

“나는 일찍이 노선생(老先生, 김장생)의 문하에서 공부를 하였는데, 공과 놀기를 좋아하여 매우 돈독하였다. 을미년(乙未年, 1655년 효종 6년) 공은 임금의 뜻을 전하기 위하여 위촉되어 와서 나를 위문하였는데, 공이 조정으로 돌아오자 임금께서 또한 천신(賤臣, 송시열 자신을 가리킴)에게

“장차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합쳐서 짐의 뜻에 만에 하나라도 도와야 한다.”

고 말씀하였다.

그 뒤에 부름을 받고 진언(進言)하였더니, 임금께서 위연(喟然)히 탄식하여 이르기를,

“김익희(金益熙)의 말이 언제나 이와 같더니, 무슨 까닭으로 일찍 죽었는가?”

라고 하였다. 나는 눈물을 거두고 나왔다.”

 

문집에 ⌈창주유고(滄洲遺稿)⌋가 있다.

 

창주유고(滄洲遺稿)⌋는 18권 7책으로 된 목판본이다. 이 가운데 권8의 「갑신봉사(甲申封事)」는 1644년(인조 22) 병자호란을 겪은 뒤 민심이 안정되지 못하고 전야(田野)가 황폐해지고 있음을 지적하고, 그 수습 방법을 제시한 글이다.

1654년(효종 5)에 올린 「갑오봉사(甲午封事)」는 먼저 천덕(天德)과 왕도(王道)의 관계를 약술하고, 이어서 사람을 얻어서 위임하는 방도와 직관(職官)·전부(田賦)·병제(兵制)·학규(學規) 등의 문제에 관한 견해를 개진한 글이다. 특히 효종의 인정을 받았던 유명한 봉사라 전해 온다.

 

<참고문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국역국조인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