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배우는 일보다 다른 것에 더 관심이 있을 때


아이가 배우는 일보다 다른 것에 더 관심이 있을 때

 

아이가 딴 생각 못하게 하는 방법이 정말 있을까?
요즘 부모들도 이 글의 제목을 보면 무릎을 탁 칠 것 같다. 율곡 선생이 살았을 때도 아이들이 공부보다 딴 곳에 더 관심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사실이지 예나 지금이나 아이들은 어른들이 시키는 공부에 큰 필요성과 관심을 자발적으로 가지는 경우는 드물다. 그래서 예전에 학부모들은 학교에 가서 담임교사와 상담할 때 ‘아이가 딴 생각하지 않고 공부에만 전념하는 방법’을 자주 묻곤 했다. 이런 질문에 아마 담임으로서는 대단히 난감했을 것이다. 그게 정말로 가능할까? 그리고 가능한 방법이 과연 있을까?

아이들의 관심사는 남녀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필자의 경험에서 볼 때 온통 먹는 것과 노는 것이 주를 이룬다. 초등학생들의 일기장을 들여다보면 남자아이의 경우 거의 다 엄마가 무슨 음식을 해주었다, 어떤 곳에 있는 음식점에서 무얼 먹었다, 그리고 맛있게 먹었다는 기술이 많이 등장한다. 그리고 누구누구와 무엇하고 놀았다든지 부모와 어디에 가서 무엇을 구경했다는 따위가 대부분이다. 여자아이들은 대개 부모가 시키는 대로 공부를 했다거나 집안일을 도왔다거나 친구와 함께 소꿉(인형)놀이를 했다는 등의 내용이 많다. 대체로 남자아이들보다 부모가 시키는 대로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요즘도 그런지 모르겠다.

그러니 옛날이라고 달랐겠는가? 모르기는 해도 옛날 아이들도 글방에서 공부하는 것보다 동무들과 노는 데 더 정신이 팔렸을지 모르겠다. 개울가에 가서 물고기를 잡는다든지 산골짜기 어디에 있는 산딸기와 머루와 다래를 따 먹을 생각, 오늘밤 누구네 수박과 참외를 서리한다거나, 자치기나 연날리기나 썰매타기 등 노는 것이 무척 많았으니, 거기에 온통 정신이 팔린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소아수지』의 첫 번째 항목의 내용은 이렇다.

〔1〕가르침을 좇지 않고 다른 일에 마음이 달려가게 하는 것(不遵敎訓, 馳心他事)

이 내용은 아이들이 이렇게 하라는 것이 아니라 이런 것을 경계해야 하는 말로 되어 있다. 쉽게 말해 아이들은 배우는 일을 잘 따르고 다른 곳에 신경 쓰지 않아야 한다는 뜻이다. 여기서 말하는 ‘가르침’이란 평소 배우는 내용으로서 옛 성현의 가르침일 수도 있고, 스승이나 부모의 가르침이나 훈계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내용으로 보면 모두 동일하다. 부모나 스승이라고 해서 옛 성현의 가르침을 벗어나는 것도 아니고, 옛 성현의 가르침도 결국 이들을 통해 배우기 때문이다. 결국 배우는 대로 하지 않고 딴 곳에 마음을 쏟는 일이 없도록 아이들을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일 것이다.

옛날과 지금의 배움의 차이

이글을 보면 아이들이 딴 생각을 못하게 하는 방법은 제시되지 않았다. 다만 가르침을 좇고 공부할 때는 딴 생각을 하지 않도록 가르쳐야 한다는 정보 정도만 담겨있다. 여기서 가르침에 대한 오해를 풀고 가야겠다. 지금의 가르침의 내용은 적어도 유치원 교육부터는 ‘교육과정’이라고 하여 국가에서 정해놓고, 지역이나 학교에 따라 그 내용을 특성화하도록 약간의 융통성이 보장되어 있다. 그러니까 그 교육과정이라는 것이 대개 교과와 연계되어 있고, 그것을 예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교과서 내용이다. 그 내용은 잘 알다시피 각 교과마다 가진 특수한 내용들이다. 그 내용이 가진 목표에는 대개 지식적인 것 정서와 기능적인 것 그리고 태도적인 것이 모두 포함되는데, 우리나라 교육현장의 모습을 보면 지식적인 것에 치중하고 있다. 대학입시 때문이다. 비록 도덕과의 경우는 태도에 더 치중하고, 예체능 교과는 정서와 기능이 더욱 강조되지만, 지식 교육의 대세에 밀려 해당교과의 목표가 잘 성취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율곡 선생이 살았던 조선중기는 이런 교과가 없었다. 원래 고대 중국에는 예(禮)·악(樂)·사(射)·어(御)·서(書)·수(數)라 하여 예절·음악·활쏘기·수레몰기·글씨쓰기·셈하기의 육예(六藝)라는 과목이 있었으나, 조선시대에는 거의 유교경전과 일부 사서(史書)를 읽고 독해하는 것으로 공부의 내용을 차지하였다. 이 또한 과거시험 때문이다.
이렇듯 교육내용이 거의 유교경전으로 채워져 있기 때문에 형식적으로 보면 한문을 익혀 독해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내용적으로 보면 성현의 말씀을 지키고 따르는 일종의 도덕적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역사를 공부해도 결국 역사에서 교훈을 얻는 것이므로 일종의 도덕사관이 주를 이룬다고 봐야 한다. 그러므로 가르침을 따른다는 것은 거의 당시에 바람직하게 여겼던 도덕적 덕목을 행위를 통해 드러내는 것을 의미한다. 아이들이 도덕적 가르침을 얼마나 자발적으로 발휘할까?

고분고분한 아이를 원하는가?

아이들이 딴 생각하지 않고 배우는 것을 고분고분 따라 하는 것은 모든 부모나 교사들의 희망사항일 뿐이다. 실생활에서나 필자의 경험에서 볼 때 그런 학생들은 많지 않다.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고분고분함이 언젠가 필연적으로 배반을 일으킨다. 학생 자신의 삶에서나 그 학생이 관계하는 가정이나 사회 안에서 그러하다. 왜냐하면 인간은 반성하고 부정하고 때로는 저항하거나 반항하면서 성장하기 때문이다. 모든 종교의 가르침에 대해서도 그러하다. 유아기 때에 형성된 관념과 도덕적 기준과 잣대를 버리지 않은 한 그 인간의 자아는 결코 성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아이들의 관심사로 돌아가 보자. 아이들이 공부에 관심이 없는 것은 공부가 재미가 없기 때문이다. 설령 재미가 있어도 요즘 세상에는 공부보다 재미있는 일이 백 배나 더 많다. 공부를 재미있게 가르치려고 교사들이 컴퓨터나 동영상, 게임, 애니메이션 또 그 무엇을 동원하여 가르치려고 부단히 애처롭게 노력해도, 아이들을 유혹하는 세상의 상술을 당해낼 재간은 그 어디에도 없다.

아이들은 동물적이다

게다가 아이들은 천성적으로 노는 것을 좋아한다. 동물의 새끼들을 보라. 다 놀면서 장난치면서 성장하지 않는가? 사람이라고 해서 특별히 이성적인가? 필자는 개인적으로 성인(成人)이 되기 이전까지의 아이들을 감성적 욕망에 이끌리는 동물로 본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고 이들을 대하는 것이 되레 마음이 편하다. 성인이 되어서도 동물수준의 인간들이 또 얼마나 많은가? 주변을 둘러보라.
이 말은 인간에 대한 모독이 결코 아니다. 인간의 이성과 그 이성적 행위는 처음부터 완성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초등학교 저학년의 수준이 되면 대체로 먹는 것에 집착하고 또래집단에서 노는 것을 즐긴다. 그러다가 중학년 정도 되면 거기에 보태서 입는 것에도 관심이 쏠린다. 부모가 사주는 옷을 순순히 입는 것보다 자신의 취향을 고집하기도 한다. 그것은 또래집단에서 유행에 뒤떨어져 따돌림을 당하지 않으려는 노력과도 연관되어 있다. 노는 것도 또래집단을 갖지만 점점 개인화 되어 게임에 빠지기도 한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 여기에 보태 이성(異性)에도 관심을 갖는다. 그래서 옷차림이나 용모 등에 무척 신경을 쓰고 부모나 교사의 말보다 연예인의 말 한마디 행동하나가 더 영향력을 미친다. 심지어 반항적이기까지 하고 자기 또래집단끼리만 소통한다. 또래 사이에 중시하는 일종의 명예심이랄까 의리 때문이다.

이러한 특성을 종합하면 이들이 이성적이고 도덕적 가르침을 자발적으로 따를 것이라 기대하기는 매우 어렵다. 설령 겉으로는 도덕적으로 행동해도 그 동기는 칭찬을 받고 비난을 피하는 관습적인 수준,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수준에서 행동하는 것이지, 도덕적 양심과 원리에 따라 행동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유교식으로 말하면 소인의 행동이지 군자의 행위가 결코 아니다. 그리니까 쉽게 말해 자신의 욕망에 따라 행동한다는 의미이다. 그것이 얼마나 직접 노출되느냐 감추어져 있는가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사실 성인(成人)들도 대부분 그러하지 아니한가?

노는 것을 인정해야

그러니 아이들을 동물적이라고 해서 기분 나쁠 일도 아니고, 동물 취급을 해야 한다는 말도 더욱 아니다. 다만 그런 수준을 이해하고 생각해 보자는 뜻이다. 그래서 아이들이 공부보다 놀기 좋아한다는 경향을 받아들여야 한다.

사실 노는 것은 그냥 무의미하게 노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특히 아이가 어릴수록 그러하다. 노는 것이야 말로 창의력의 원천이며 상상력의 보고이다. 놀면서 물리적이고 구체적 경험을 통해 사고력이 발달하고 창의력도 싹튼다. 흔히 ‘정규 학교에서 공부한 놈보다 가방끈은 짧지만 사회에서 굴러먹은 놈이 머리가 잘 돌아가고 융통성이 있다.’는 속언은 이런 경험을 통해 나름의 사고력과 판단력이 발달했음을 반증하는 사례이다. 학교의 경험이 온실 안의 그것이라면 사회의 경험은 노지(露地)의 험한 경험이 아닌가?
그리고 필자가 작품을 구상할 때 언제나 상상력의 창고가 되었던 것은 어릴 때 놀았던 기억이다. 장면과 스토리 구성, 그리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만들어 낼 때 언제나 옛날의 추억에 의존한다. 그래서 어릴 때 충분히 잘 놀았던 사람이 훗날 적절한 교육을 받았을 때 큰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이 필자의 신념이다. 잘 놀았지만 적절한 교육이 없거나 잘 놀지 못하고 오로지 학원과외를 통해 일류학교 졸업한 사람에게는 큰일을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 그 때문이다.

그러니 어릴 때 충분히 노는 것을 막으면서 유아기 때부터 오로지 영어니 수학이니 또 무엇을 강제로 주입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이렇게 놀아보지 못한 아이는 훗날 분명히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잘 자라기도 어렵겠지만 설령 나름대로 잘 자랐다고 하더라도, 어릴 때 잘 놀아보지 못했던 보복으로 성인이 되어 엉뚱한 데서 잘 놀아보려고 할 것이다. 그래서 인생을 망치고 삶이 험난한 구렁텅이에 빠질지도 모른다.

도덕적 엄격주의

자, 그렇다면 율곡 선생은 아이들이 이렇게 놀기 놓아하는 습성을 몰라서 이런 말을 했을까? 선생의 말 가운데 행간을 읽어보면 그 점을 알았던 것 같다.

‘다른 일에 마음이 달려가게 하는 것(馳心他事)’

이라는 표현이 그것이다. 인류 역사상 이른바 교육이 존재하는 이상 피교육자의 마음에는 다른 곳에 마음을 쏟는다. 특히 그 대상이 나이가 어리다면 그러하다.
그렇다면 그렇게 한 점 여유도 없이 마음을 단속하라고 왜 이렇게 말했을까? 이점은 아마도 비록 아이들의 습성이 그러하지만, 그것을 바로잡아 올바른 인간으로 만드는 것이 성현의 가르침이라고 선생은 믿었던 것 같다. 당시는 성현의 가르침 외에는 특별한 답이 없었기 때문이다. 성리학이 국가의 이념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욕망을 극복하고 몸을 잘 닦아 남을 대하는 것이 사대부의 교육목표였기 때문에, 인간의 욕망이 교육의 방법이나 목표에 개입되는 것을 허용치 않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면 도덕적 엄격주의가 교육의 방법에 적용될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사회적 환경이 그러했기 때문이다. 이 도덕적 엄격주의가 국왕을 비롯한 사대부들에게 요구되었던 태도였다. 그래서 공부의 내용이 온통 도덕과 관련된 것이 많았다.

노는 것을 어찌할 것인가?

오늘날에도 학부모나 교사들은 아이들이 공부에만 전념했으면 하고 바라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전해오는 ‘오성과 한음’의 이야기에서 어릴 때 장난치며 놀았어도 훗날 훌륭한 인물이 되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아이들이 교육의 목표에 접근하도록 가르쳐야 하지만, 아이들이 노는 것을 금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어쩌면 아이들은 놀이를 통해서 배우는 점이 더 많다. 너무 아이들이 고분고분하도록 강요하면, 기가 센 아이들은 반항하며 다른 길로 빠지고, 기가 약한 아이는 눈치 보며 우유부단한 습성을 길러줄 것이다. 아이들도 정해진 시간과 규칙에 따라 잘 놀게 하고, 그런 휴식과 즐거움에서 동력을 얻어 배움에 정진하도록 해야겠다. 그런 절도가 없이 아이가 노는 데만 정신을 놓고 있다면, 전문가를 찾아 별도로 상담해 봐야 한다. 아이를 망쳤다기보다 그 특성에 맞는 교육이 필요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