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학(李承鶴:1857~1928)


이승학(李承鶴:1857~1928)                                 PDF Download

 

의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자는 자화(子和),  호는 청고(靑皋)인데, 담양(潭陽) 장전리(長田里)에서 출생하였고, 양녕대군(讓寧大君)의 후손이며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의 문인이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몸이 약하였지만 9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모친을 여의고 울기를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12세에 처음으로 입학하였는데 총명하여《중용(中庸)》한 권을 9일만에 다 외우고, 《상서(尙書)》<요전(堯典)>을 하루 아침에 뜻을 알고 다음 날 아침에 외우는데, 집주(集注)까지 한자도 틀리지 않았다고 한다.  이를 보고 그의 부친이

“재주가 너와 같으면 누가 배우기가 어렵다고 하겠느냐.”

했다는 말도 있다.   관례(冠禮)를 치른 뒤에는 기정진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그의 부친인 진사 이최선(李最善) 역시 시대를 외면하지 않고 위태로운국 가의 안녕과 백성들의 고달픈 삶을 해소하기 위해 1862년 그의 나이 38세 때에《삼정책(三政策)》을 지어

“기강의해이와염치의상실은삼정의폐단보다더욱심하다.”

고 역설 하였으나 담양 부사(潭陽府使)에 의해 기각되어 조정에 까지 이르지 못하였다.  그러나《삼정책》을 본 기정진은 그의 경륜이 주도면밀하고 재능이 우수하여 세상에 쓰일 만하다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는 일화가 전해 온다.

그의 나이 20세가 되었을 때,  서울에 친척 한 분이 과거(科擧)를 주선 하겠다고 하였다.  자신의 외숙(外叔)이 시험을 주관하니 300금만 주면 목적한 바를 얻을 수  있다고 하였으나,  그는 거절하고 주지 않아서 불리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뒤 고종 19년 임오년에 조정에서 현량한 선비를 뽑으려고 하자,  그가 책문(策問)을 지어 올려 선발되었고,  그것이 문과초시(文科初試)를 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1884년 동학 농민운동(東學農民運動) 당시에 그를 지명하여 죽이려하자,  방장산(方丈山)으로 피신하여 있었는데,  그 이듬해에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시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기정진의 손자가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장성에서 의병(義兵)을 일으킨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승학은 한 필의 말을 달려서 팔도에격 문(檄文)을 보내었다.  그리하여 곳곳에서 답장이 오고 발송하는 일이 수 백건 이었으나,  그는 조금도 막 없이 처리하였다.  그리하여 의병을 일으키고 금성산(錦城山)에 제사를 지내면서 국조(國祚)의 융성을 빌고,  진(陣)을 광주(光州)로 옮겨 서울로 진격할 태세를 갖추었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선유사(宣諭使) 신기선(申箕善)을 보내어 임금의 명령으로 타이르기를,

“의병이 일어나면 도리어 화가 커지는 것이니,  즉 일로 해산하라.”

고 하여,  그날로 군사를 파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부친이 별세한 후에 집안에 불이 나서 5천 여권의 책과 가산(家産)이 불에 타버리자,  다시 외당을 짓고 전답을 팔아서 서적을 모으느라 가산이 기울었다.  식솔을 거느리고 살기가 곤란하여 50세에 농사에 힘쓰기 시작하여 종을 데리고 들에 나가야만 했다.  그리하여 8년만에 남의 곡식을 빌리지 않게 되자,  이후에는 들에 나가지 않았고, 회갑을 맞이한 이후부터는 집안일을 아들에게 맡기고서,

“글을 읽는 종자(宗子)가 끊어지면 10대의 집안이 맥이 끊기는 법이니 마음에 두고 새기도록하라.”

고 하였다.

담양군(潭陽郡) 창평면에 ‘문일정(聞一亭)’이라는 정자가 있다.  이 정자는 그가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책을 읽고 학문을 연마하며 현실의 문제에 관심을 가졌던 곳이기도 하다.  그들의 실천적 의식과 행동은 거기서 끝나지 않고 후손들에게도 면면히 이어지도록 하였다.  그는 을사조약(乙巳條約) 이후에 기우만(奇宇萬)이 이끄는 장성의병(長城義兵)에 가담하였으며 아관파천(俄館播遷) 때에도 의거(義擧)했던 인물이다.  성균관 박사(成均館博士)를 지낸 손자 옥산(玉山) 이광수(李光秀)는 이기(李沂), 윤주찬(尹柱瓚), 민형식(閔衡植)등과 함께 자신회(自新會)라는 조직에 가담하고 을사오적(乙巳五賊)을 암살할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는 과정에서 발각되어 사형을 언도 받기도 하였다.

이승학은 당시에 성행하던 이기설(理氣說)의 학문보다는 위기지학(爲己之學)에 전념하였다. 저서로는《청고집(靑皐集)》 4권이 있고, 《종사유록(宗事遺錄)》을 간행한 바 있다.  그가 후손에게 이르기를,

“후일에 아름다움이 넘치는 말로 행장(行狀)을 청하여서 남의 웃음거리가 되게 하지 말라.  이는 내가부 끄럽게 여기는 바이다.”

하였다.

실천을 중시하고 위기지학을 강조하기보다는 열인찬기(悅人讚己)로 외형만 추구하며 부화뇌동(附和雷同)하는 요즘 세태를 바라보면서 이승학과 같은 인물은 더욱더 발굴하여 작게나마 세인의 본보기로 삼아야 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참고문헌>
《위키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