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귀(李貴: 1557~1633)


이귀(李貴: 1557~1633)                                         PDF Download

 

선 중기 충청남도 공주에서 활동한 문신(文臣)으로,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옥여(玉汝), 호는 묵재(默齋), 시호는 충정(忠定)이다.
할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이기(李夔)이고,  아버지는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된 이정화(李廷華)이며,  어머니는 안동 권씨(安東權氏)로 청송부사(靑松府使) 권용(權鎔)의 딸이다.

율곡 이이(李珥)와 우계 성혼(成渾)의 문인인 그는 1582년(선조15)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는데,  이듬해에 박근원(朴謹元), 송응개(宋應漑) 등동인(東人)이, 당쟁을 조장한다며 스승인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을 공격하자, 그가 상소를 올려 부당함을 지적하였다.  동서 분당 이후 정치권에서 이슈가 된 인물은 1589년에 있었던 역모사건의 주인공이 되는 정여립(鄭汝立)이었다.  정여립은 원래 이이의 문하에 있었으나 동인으로 당을 옮긴 인물로, 요즘으로 치면 당적을 바꾼 정치인 이라는 점에서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이귀는 스승을 배반한 정여립을 강력히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스승인 이이와 성혼을 비판하는 움직임에 대해서도 강력하게 대응하였다. 《선조수정실록》1587년 (선조20)  3월 1일조에 이귀가 진사 조광현 등과 함께 이이와 성혼을 옹호하는 수만언이나 되는 장문의 상소문을 올린 것이 수록되어 있다.  당시에 선조는

“이귀의 말이 만세의 공론이다.”

라고 하여 그를 적극 지지하였고,  결국 동인의 핵심 인물인 이발(李潑)과 이산해(李山海)는 사직을 하였다.

1592년(선조25)에 그가 강릉 참봉(康陵參奉)으로 있을 때 임진왜란(임진倭亂)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하였고,  이어 이덕형(李德馨)과 이항복(李恒福)등의 추천으로 삼도소모관(三道召募官)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삼도선유관(三道宣諭官)이 되어 체찰사 유성룡(柳成龍)을 도와 군사를 모집하고 양곡을 거두어 개성으로 운반함으로써 한양 수복을 도왔다.  정도였다.  유성룡은

“장성현감 이귀는 신이 그의 사람됨을 몰랐었는데 지난번 비로소 만나 보니 취할 만한 사람 이었습니다. 근래 살펴 보건대 군사를 훈련시켜 진법(陣法)을 익히게 하고 굳게 지킬 계책을 세우고 있으니 만족할 만한 것이많습니다.”

라고 하여 이귀의 전공을 인정하였다.  1593년 이후 이귀는  장성현감(長城縣監), 군기시판관(軍器寺判官), 김제군수(金堤郡守)를 역임하면서 전란 이후의 혼란을 수습하는 데에 주력 하였다.

1603년(선조36)에 정시 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고 형조좌랑(刑曹佐郞)과 안산군수(安山郡守)와 양재도찰방(良才道察訪) 등을 역임하였다.  1609년(광해군1)에 함흥판관(咸興判官)을 거쳐 숙천부사(肅川府使)로 있을 때 수감 중인 해주목사(海州牧使) 최기(崔沂)의 역모 사건에 연루되어 1616년(광해군8)에 이천으로 유배되었다가 3년만에 풀려나고 1622년(광해군14)에 평산부사(平山府使)가 되었다.  이후 광해군(光海君)의 폭정이 계속 되자 이를 개탄한 나머지

1623년(인조1)에 김류(金瑬), 신경진(申景禛) 등과 함께 광해군을 폐위하고 선조의 손자인 능양군(綾陽君)을 추대하여,  인조반정(仁祖反正)을 성공 시킴으로써 정사 공신(靖社功臣) 1등으로 녹훈 되었다.  그의 두 아들인 이시백(李時白)과 이시방(李時昉)도 역시 반정에 참여하여 부자(父子)가 함께 공신으로 책봉 되었다.  그 뒤 이귀는 호위대장(扈衛大將)과 이조참판(吏曹參判) 겸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우참찬(右參贊), 대사헌(大司憲), 좌찬성(左贊成)을 역임하고,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에 봉해지면서 공서(功西)1)공서(功西): 조선 시대, 당파(黨派)의 하나인 서인(西人) 중,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에 가담하여 공을 세운서인(西人)으로, 김유(金瑬), 심기원(沈器遠), 김자점(金自點) 등이 주장하던 소당파(小黨派)를 일컫는다.의 영수가 되었다.

반정에 성공한 후 광해군은 교동도로 유배되고,  피의 숙청이 시작되었다. 광해군을 보좌한 대북 세력의 핵심들은 대부분 처형되거나 유배되었다.  이위경, 한찬남 등 대북파들은 많은 사람들이 보는 시장거리에서 처형되었고, 외척으로서 권세를 한껏 누렸던 박승종은 아들과 함께 도망하다가 스스로 목을 매어 자결하였다.  광해군 정권의 정신적 영수 정인홍도 고향인 합천에서 서울로 압송되어 왔다.  그는 이미 89세의 고령의 몸이었지만,  광해군 정권의 정신적 후원자였다는 점과 반정의 주역인 이귀 등 서인과의 오랜 악연 때문에 처형을 면할 수가 없었다.  광해군과 북인 세력의 빈자리에 인조(仁祖)와 서인(西人)  세력들이 들어서면서 완전한 정권 교체가 이루어졌다.

인조반정 이후 총53명이 정사공신(靖社功臣)에 책봉되었는데,  일등공신에는 이귀를 비롯하여 김류(金瑬), 김자점(金自點), 심기원(沈器遠), 신경진(申景禛), 이서(李曙), 최명길(崔鳴吉), 이흥립(李興立), 구굉(具宏), 심명세(沈命世)등 10명이 이름을 올렸다. 이들은 대부분 광해군 정권에서 정치적으로 소외 되었던 서인들이었다. 《당의통략》에서도

“문무훈신 김류, 이귀, 신경진, 구굉, 장유(張維),홍서봉(洪瑞鳳), 최명길, 심명세 등은 모두 예전에 이이와 성혼의 문인 및 이항복이 일찍이 천거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나아가는 데 가로막혀 금고에 처해져 유폐되었다가 중도에 일어나서 의거에 협력하여 도왔다.”

라고 기록하여 반정의 주체 세력들이 이이와 성혼, 이항복의 제자인 서인이었음을 언급하고 있다.
그러 나반정을 통해 권력을 잡은 서인 내에서도 정치적 분열이 일어났다.우선 훈서(勳西)와 청서(淸西)로 갈려졌고, 훈서는 다시 노서(老西)와 소서(少西)로 나뉘어졌다.  문제를 둘러싸고 대립하였다.  인조 초반 인조의 숙부인 인성군(仁城君)대립하였다.  이귀는 인조의 왕통 안정을 위하여 인성군의 처벌을 적극 주장하는 반면,  김류는 온건한 입장을 취한 것이다.  후금에 대한 대외 정책에서 이귀는 현실론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국가 체제가 제대로 정비되지 않은 시기에 후금과 정면으로 맞서는 것은 무모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는 주화론(主和論)의 주창자(主唱者)였던 최명길과 뜻을 같이한 것으로,  서인의 주류세력과는 대립되는 입장에 있었다.
한편 이귀는 그리고 그동안 남한산성(南漢山城)의 수축, 호패법(號牌法)의 실시, 무사의 양성, 국방 강화 등을 적극 건의하여 이를 실현시켰다.  이귀는 자신이 적극 참여하여 만든 인조정권의 안정을 위해 누구보다도 노력한 관료였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1626년(인조4) 인헌왕후(仁獻王后)의 상기를 만2년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가 대간의 탄핵을 받고 사직하였다.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임금을 강화도(江華島)로 호종(扈從)하여 최명길(崔鳴吉)과 함께 화의를 주장하였다가 다시 탄핵을 받았다.  저서로는 《묵재일기(默齋日記)》와 《이충정공장소(李忠定公章疏)》가있고, 편저에는《한음공언행록(漢陰公言行錄)》이 있다.

묘소는 충청남도 공주시 이인면 만수리 계성산 능선에 있다.  묘소 앞에 1641년(인조19)에 건립된 묘비가 있는데,  이식(李植)이 비문을 지었다.  만수리 입구에는 신도비가 서있다. 신도비 앞면에는 영의정에 추증된 연평부원군 이귀의 신도비임을 나타내는 비명이 새겨져 있다. 조익(趙翼)이 비문을 짓고 오준(吳竣)이 본문 글씨를 썼으며 여이징(呂爾徵)이 전서 글씨를 썼다.
신도비는 충청남도 유형 문화재 제89호로 지정되어 있다. 영의정에 추증 되었으며, 인조(仁祖)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어 있다. 성봉서사(盛峰書社)는 1871년(고종8)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어 현재까지 복원되지 못하고 있다.  그의 시호(諡號)는 충정(忠定)이다.

<참고문헌>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일성록》
《백과사전》
《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