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윤원(朴胤源:1734∼1799)


박윤원(朴胤源:1734∼1799)                               PDF Download

 

선 후기의 성리학자로, 본관은 반남(潘南)이며, 자는 영숙(永叔)이고, 호는 근재(近齋)이다. 공주판관(公州判官) 박사석(朴師錫)의 아들인 그는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과 가까운 집안사람으로, 담헌(湛軒) 홍대용(洪大容)과 함께 미호(渼湖) 김원행(金元行)의 문하에서 동문수학하였는데,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책을 한 번에 수십 줄씩 읽었다 한다.

그리하여 그는 김원행과 김지행(金砥行)의 문하에서 공부를 깊이 하여 학자들로부터 크게 추앙을 받았다. 특히 정조 임금이 당대의 저명한 학자였던 그와 지속적으로 서신을 교환하며 경전(經傳)을 그 중에 《주역(周易)》의 의미에 대하여 묻고 답한 어찰이 현존하여 당시의 상황을 대변해 주고 있다.

1792년에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선공감역(繕工監役)에 임명되었으나 바로 사퇴하였고, 1798년에 원자(元子)를 위하여 강학청(講學廳)이 설치되자, 서연관(書筵官)에 임명되었으나 역시 거절하였다. 집이 가난하여 비와 바람을 피할 수 없는 형편이었으나, 끝내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 연구에 전념하였다. 노년에 삼청동(三淸洞)의 교하정(晈霞亭)을 매입하여 그 곳에서 살았는데, 사방에 창을 내어 탁 트인 전경을 바라보며 운치 있는 삶을 영위하였다고 한다.

그는 당시 소개되던 서학(西學)의 폐해가 도교(道敎)나 불교(佛敎)보다도 크다고 하여 배척하고, 오직 경전의 훈고(訓誥)와 성리학에 몰두하였다. 김창협(金昌協)과, 이재(李縡), 김원행(金元行)의 학통을 계승한 적전(嫡傳)으로, 다시 문하(門下)의 홍직필(洪直弼)에게 전수하여 신응조(申應朝), 임헌회(任憲晦), 조병덕(趙秉德) 등으로 이어지는 조선 후기 성리학의 중요한 학파를 형성하였다.

그는 평생 성리학을 연구하던 학자로 거처에 문을 제외한 세 방향의 창에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글을 적어 두고 살았다 한다. 그의 동문인 오윤상(吳允常)과는 친분이 두터웠으므로 서로 만나면 학문에 대하여 의견을 나누는 일이 많았다 한다.

그는 심설(心說)에서 ‘심(心)은 기(氣)’라고 하였다. 《대학(大學)》 장구(章句)의 ‘허령불매조(虛靈不昧條)’의 경의에 대한 해석에서 그는 ‘허령’의 ‘기’가 ‘심’이 된다고 하여 ‘심시기(心是氣)’의 주기적(主氣的) 입장을 취하였다. 이기설(理氣說)에서는 ‘이가 기에 앞서 존재한다(理在氣先).’고 생각하여 주리적(主理的) 경향을 보이기도 하였다.

또한 예학(禮學)에 관해서도 깊은 연구와 해박한 지식이 있었다. 그의 문인으로는 홍직필을 비롯하여, 이재의(李載毅), 정도일(丁道一), 어석중(魚錫中) 등 다수가 있다. 생을 마감한 뒤에 대사헌(大司憲)에 추증되었다. 저서로 《근재집(近齋集)》과 《근재예설(近齋禮說)》이 있다.

<참고자료>
– 《근재집(近齋集)》
– 《매산집(梅山集)》
– 《전고문헌(典考文獻)》
– 《조선유교연원(朝鮮儒敎淵源)》
– 《조선유학사(朝鮮儒學史)》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