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진(金相進)


김상진(金相進)                                                             PDF Download

 

상진(1736년∼1811년)은 조선 후기의 학자로 홍명원(洪命元), 김원행(金元行), 송명흠(宋明欽) 등에게 배웠다. 일찍이 19살 되던 1755년에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20대 들어 부모가 돌아가시고 하나 밖에 없는 동생이 사망하는 등 우환을 겪었다. 그러는 중에 집안일과 과거준비를 함께 하였으나, 때마다 뜻을 이루지 못하여 벼슬길을 단념하였다. 이후 산림에 은거하면서 『주자대전(朱子大全)』과 『주자어류(朱子語類)』에 심취하고, 주자학의 연구와 실천에 힘쓰면서 일생을 보냈다.

 

1736년(1세, 영조 12년)
5월 20일, 보은(報恩, 지금의 충청북도) 탁곡리(濯谷里)에서 김덕사(金德泗)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선산곽씨(善山郭氏)로 곽세규(郭世圭)의 딸이다.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사달(士達), 호는 탁계(濯溪)이다.

 

1748년(12세, 영조 24년)
신와(愼窩) 홍명원(洪命元)에게 글을 배우다.

 

1754년(18세, 영조 30년)
할아버지 상을 당하였다.

 

1755년(19세, 영조 31년)
진사 초시(생원시)에 합격하였다. 이후에는 과거와 인연이 없어 매번 실패하여 벼슬길을 단념하였다. 박윤원(朴胤源), 임정주(任靖周), 김이안(金履安), 송시연(宋時淵) 등과 교류하면서 주자학 연구에 힘썼다. 특히 운호(雲湖) 임정주와는 예송(禮訟) 문제 등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해서 서신을 주고받으며 의견을 교환하기도 했다.
이즈음에 「남한감회(南漢感懷)」를 지었다. 병자년을 맞이하여 남한산성에서 인조(仁祖)시대 병자년의 난리에 대한 감회를 적은 문장이다.

 

1758년(22세, 영조 34년)
모친상을 당하였다.

 

1760년(24세, 영조 36년)
역천(櫟泉) 송명흠(宋明欽)에게 편지를 써서 제자의 예를 청하였다. 이해, 11월에 부친상을 당하였다. 부친에 대해서 김상진은 이렇게 썼다.

“부친은 글을 읽은 적은 없었다. 그러나 집안에서의 몸가짐이나 사람들을 상대하며 일을 처리하는 것을 보면 대부분 옛사람의 도리에 합당했다. 일찍이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어제일을 오늘 생각해보면 후회스럽다. 작년 일을 금년에 생각해보면 후회스럽다. 지금 40이 넘었다. 이제 좀 사람의 일을 알 것 같다. 그러나 역시 사람의 일을 정말로 알지는 못한다. 부친은 임종 시에 나에게 이렇게 경계를 말씀을 해주셨다.

농사를 지어서 생계를 도모해라. 그리고 독서를 하여 몸가짐을 경계해라.
이 두 가지는 어느 한쪽을 버리면 안 된다. 입고 먹는 일은 너무 중시하기 쉽고, 글공부는 항상 소홀함을 걱정하기 쉽다. 그러나 너는 반드시 두 가지를 다 힘써라.
경중(輕重)과 완급(緩急)을 두 가지 사이에서 따지지 마라.”

 

또 부모를 모두 잃고 자신이 가정을 이끌어가는 사정을 김상진은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일찍이 부모를 잃고, 부친을 대신하여 가정을 돌보았다. 농사를 짓고 누에를 치며, 세금과 부역을 담당하는 일이며, 손님을 접대하고 하인들을 관리하며, 밑으로는 마당청소에서 문단속에 이르기 까지 모든 자질구레한 일들을 직접 다 했다. 또 멀고 가까운 곳으로 배움을 찾아다니며 독서하는 일도 전력을 다했다. 사람들은 그래서 모두 칭하기를 옛사람의 풍모가 있다고 하였다.”

 

1763년(27세, 영조 39년)
11월, 동생 김상훈(金相薰)이 사망하였다. 부모님을 차례로 여의고 다른 식구들도 없이 두 형제만 서로 바라보고 살았기 때문에 충격이 컸다. 동생에 대해서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家庭古蹟」)

“이웃 사람들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김씨네집 형제들은 참 이상하다. 형이 말하면 동생이 웃고, 동생이 말하면 형이 웃고. 그런데 옆에 사람이 다가가서 무슨 말 때문에 웃는지 들어보면, 별로 웃기는 이야기도 아닌데 말할 때마다 항상 웃는다.’
우리 형제간에 우애하는 마음은 아마도 하늘에서 내려준 모양이다.”

동생을 위하여 다음과 같이 제문(祭亡弟相薰文)을 지어 올렸다.

 

1764년(28세, 영조 40년)
보은으로 이사 온 미호(渼湖) 김원행(金元行)에게 나아가 글공부를 하였다. 이 때 「미강어록(渼江語錄)」을 지었다. 스승의 언행을 상세히 기록한 문장이다.

 

1766년(30세, 영조 42년)
여름, 당쟁으로 쫓겨나 용유동(龍遊洞)에 있던 송명흠(宋明欽, 1705∼1768)을 찾아갔다. 그곳에서 「소학(小學)」, 「대학(大學)」, 「근사록(近思錄)」 등에 대해서 의문사항을 물었다. 이때 들을 것을 기록하여 문장으로 남겼는데, 「탁계집」에 실린 「병천기문(甁泉記聞)」이 그것이다. 또 문장(「神龍吟上宋先生」)을 지어 송명흠에게 써서 올렸는데, 다시 정세를 걱정하는 내용이었다. 이해 가을에, 김원행을 찾아가 뵈었다.

 

1768년(32세, 영조 44년)
스승으로 모시던 송명흠이 사망했다.

 

1771년(35세, 영조 47년)
스승 김원행에게 「맹자」에 관한 자신의 의견을 써 보냈다. 「맹자」 고자장(告子章)에서 고자가 동물의 성(性)과 사람의 성을 똑같은 기(氣)로 본 것을 지적하고, 그것에 대한 자신의 여러 가지 견해를 적어 보낸 것이다.

 

1772년(36세, 영조 48년)
여름에 스승으로 모시던 김원행이 사망했다. 김이안에게 글(「답삼산재금공(答三山齋金公)」)을 써서 보냈다. 스승의 무덤에 쓸 ‘회격(灰隔)’에 대해 고찰한 내용이었다. 또 제주도로 귀양가는 송시연에게 애통해하는 글을 써 보냈다.

 

1776년(40세, 영조 52년)
가을에 딸이 사망했다.

 

1779년(43세, 정조 3년)
여름에 추천을 받아 완산부(完山府) 조경묘(肇慶廟)의 참봉(參奉)이 되었다. 근무지에서 「태극도해(太極圖解)」와 「여도위체설(與道爲體說)」등을 지었다. 이즈음에 「규고설(刲股說)」을 지었다. 여기에서 그는 자기의 허벅다리 살을 베어 부모의 병간호를 하는 것은 효도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그 문장은 다음과 같다.

“임청주(任靖周)가 일전에 청산현에서 벼슬할 때의 일이다. 청산현의 백성 중에 자신의 허벅다리 살을 베어 효도를 한 사람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크게 놀래서 책망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사람의 신체와 머리털, 피부는 모두 부모로부터 받은 것이다. 감히 훼손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효도의 시작이다.

이것은 효경이 시작되면 바로 등장하는 맨 첫 번째 뜻이다. 그 사람은 자신의 신체를 훼손한 것이다. 어찌 효도를 하였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인육은 먹어서는 안 된다. 부모로서 자식의 살을 먹는 것을 어찌 참을 수 있겠는가? 그 사람은 또 병든 부모를 속인 것이다. 그리고 부모로서 아들을 먹는 악행에 빠지게 하였다.

이러한 것은 무슨 명분이 있겠는가? 사람을 어리석게 만드는 일이며, 지금까지 그것이 군자의 효라고는 듣지 못했다. 이러한 말을 듣고 나는 무의식중에 탄복을 하였다. 그래서 나는 이제 명나라 역사를 뒤져 보았다.(이하 생략)”

 

1780년(44세, 정조 4년)
가을에 임기가 만료되어 귀향하였다. 겨울에 선공감(繕工監) 부봉사(副奉事)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이후에는 바깥에 나가지 않고 후학양성에만 힘을 썼다.

 

1784년(48세, 정조 8년)
11월, 부인상을 당하였다. 부인은 풍천임씨(豐川任氏) 임한성(任漢星)의 딸로 부인과 사이에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두었다. 이때의 슬픔을 다음과 같은 제문(祭文)으로 지어 올렸다.

“나와 부인은 상투를 틀고 쪽을 찌고 서로 만났네. 30년 넘게, 한방에서 같이 살아, 딸을 낳아 사위를 보고, 아들을 낳아 며느리를 보았네. 그리고 이미 손자들도 안아 보았네. 할머니라 불리며, 아침부터 밤까지 부지런히 일하였고, 집안에서는 원망하는 소리가 드물었네. 성품은 겸손하고 말 또한 과묵하였네. 우둔함과 평범함이 서로 짝을 이루고 진실로 서로 잘 어울렸네.

가난함이 비록 심했지만, 화목함과 기쁨이 쇠하지는 않았지. 인간 세상에서 50년, 평온하게 지내고 때가 이르니 명이 다하고, 이제 승화하여 참된 곳으로 돌아갔네. 세상에 많은 부인들이 있지만, 이러한 행복을 얻은 자가 몇 사람이나 되겠는가? (이하 생략)”

 

1791년(55세, 정조 15년)
가을에 밭을 매입하여, 의전택(義田宅)을 만들었다.

 

1797년(61세, 정조 21년)
여름, 조정에서 전국에 「향례합편(鄕禮合編)」을 반포하였다. 이를 보고 「향음주례고증(鄕飮酒禮考證)」을 지었다. 이평(梨坪)에서 행한 향음주례의 16개 조목을 기록한 「향음주례약속(鄕飮酒禮約束)」도 이즈음에 지었다.

 

1799년(63세, 정조 23년)
여름에 증조 할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천여 권에 달하는 서적을 모아 장서각을 만들고 ‘묵장각(墨莊閣)’이라 이름을 지었다. 겨울에 문중의 규약, 즉 문약(門約)과 종맹(宗盟), 가숙절목(家塾節目) 등을 만들었다. 이해 이후로 줄곧 병마에 시달렸다.

 

1801년(65세, 순조1년)
3월에 「가정고적(家庭古蹟)」을 지었다. 자신의 선조 및 부모, 외조부까지의 일화를 기록하였다. 또 이즈음에 손자들에게 경계의 뜻으로 「서시직신(書示直信)」, 「서여직신익신(書與直信翼信)」 등의 문장을 지어 주었다.
이즈음(1802년)에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는 글(「병중감회病中感懷」)을 썼다. 평생 동안 정자와 주자만을 흠모하여 공부를 하고, 국가를 위해 자그마한 보탬이라도 되고자 하였으나, 세상 물정을 모르는 유학자밖에 되지 못하였음을 토로한 내용이었다.

 

1805년(69세, 순조 5년)
주자(朱子)의 옛 이야기를 근거하여 「고가묘문(告家廟文)」을 지었다.

 

1811년(75세, 순조 11년)
8월 17일, 사망하였다. 가을에 먼저 사망한 부인 풍천임씨의 묘에 합장하였다. 「예설잡지(禮說雜識)」, 「경전경의(經傳經義)」, 「미강어록(渼江語錄)」 등 많은 저술을 남겼다. 저서로 「예설잡지(禮設雜識)」, 「경전경의(經傳經義)」, 「미강어록(渼江語錄)」, 「탁계집(濯溪集)」(10권 5책) 등이 있다.

탁계집」은 1828년 손자 김직신(金直信)이 활자로 문집을 간행하였다. 이 문집에는 당시 유학자들과 주고받은 다수의 편지가 들어 있고, 「대학」, 「논어」, 「맹자」, 「중용」, 「소학」, 「근사록」 등 경전을 읽고 자신의 견해를 쓴 문장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이 외에도 「가례차록(家禮箚錄)」, 「상례비요차록(喪禮備要箚錄)」, 「예설잡식(禮說雜識)」, 「주자시차기(朱子詩箚記)」, 「매원산록(梅園散錄)」, 「중용귀신장차록(中庸鬼神章箚錄)」, 「오륜해(五倫解)」 등이 수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