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엽(鄭曄, 1563-1625)


 

정엽(鄭曄, 1563-1625)                                            PDF Download

 

character-img-3-s4_01

엽(鄭曄, 1563-1625)은 조선시대의 문신이자 성리학자, 정치가이다. 율곡 이이, 성혼(成渾), 송익필(宋翼弼)의 문인으로, 도승지, 대사헌, 우참찬 등을 역임하였는데, 맡은 바 일에 너무 충실하다 격무로 사망하였다.

1563년(1세, 명종 18)에 진사 정유성(鄭惟誠)과 증찬성 윤언태(尹彦台)의 딸 파평 윤씨(坡平尹氏) 사이에 태어났다. 본관은 초계(草溪). 자는 시회(時晦), 호는 수몽(守夢) 혹은 설촌(雪村)이라 하였다. 그의 호가 ‘수몽(守夢)’인 것은 그가 어느 날 꿈속에서 주자(朱子)를 만난 것에 연유한 것이다. 주자는 그의 손을 잡고 ‘하늘에도 가득 차고 땅에도 가득 찼으니, 잊어버리지도 말고 조장하지도 말라.(盈天盈地勿忘勿助)’라는 여덟 글자를 써보였다고 한다. 그 꿈을 잊지 않기 위해 여덟 글자를 벽에 써놓고 호를 ‘수몽(守夢)’이라고 지었다.(묘비명)
정엽의 집안은 대대로 문관을 지냈는데, 증조할아버지는 좌승지에 추증된 정희년(鄭熙年)이고, 할아버지는 대사헌에 추증된 정선(鄭璇)이다. 아버지 정유성은 사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1565년(3세, 명종 20)에 글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 이듬해에 시를 지었는데, 율곡 이이(李珥)와 정유길(鄭惟吉)로부터 신동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1578년(16세, 선조 11)에 학자 이산보(李山甫)의 딸과 결혼하였다. 이 결혼으로 북인 당수로 유명한 이산해의 당조카 사위가 되었다. 장인인 이산보는 정엽에게 훌륭한 스승을 찾아 공부하라고 권유하였는데, 이에 따라 먼저 송익필(宋翼弼)을 찾아가 뵈었고, 이어서 성혼(成渾)·이이(李珥)의 문하(門下)에 출입하였다. 토정비결로 세상에 널리 알려진 토정선생(土亭先生) 이지함(李之菡, 1517-1578)은 장인 이산보의 숙부인데 그를 통해서 송익필 등을 소개받았다.

1581년(19세, 선조 14)에 집에서 책을 지고 나와 도봉서원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학문에 매진하였다. 2년 만인 1583년(21세, 선조 16)에 별시 문과에서 병과 12위에 올라 승문원에 선발되었다. 이후 부친상을 당하여 관직을 사퇴하고 삼년상을 치렀다.

1587년(25세, 선조 20)에 감찰·형조 좌랑이 되었다.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서 김포 현감(金浦縣監)을 자청하였다. 4년 뒤, 1591년에는 할머니 상을 당하여 삼년상을 치렀다.

1593년(31세, 선조 26)에 황주 판관으로 임명되어 왜군을 격퇴하였다. 그 공으로 중화부사(中和府使)가 되었다. 그 이듬해 홍문관 수찬과 장령을 거쳐 서천군수를 역임하였다.

1594년(32세, 선조 27년)에 상복을 벗고,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으로 복귀하였다. 당시 정승 유성룡(柳成龍)이 조정에서 왜적에게 화친을 요청하는 것에 대해 “우리나라는 드러내놓고 화친을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단지 명(明)나라 장수의 말에 의거해서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고 하니, 정엽은 “화친을 하고 싶으면 화친을 하고, 불가하면 불가한 점을 개진해야 합니다.”라고 발언하여 “선비는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한다.”고 선조(宣祖)로부터 칭찬을 들었다.

1597년(35세, 선조 30), 예조정랑으로 있을 때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고급사(告急使)로 명나라에 파견되어 원군을 요청하였다. 나중에 귀국 후 성균관 사성을 거쳐 수원부사가 되었다. 당시 수원은 난을 치르면서 큰 피해를 입었으나, 그는 현지의 군민을 잘 다스려 오히려 서천군수 때와 마찬가지로 주민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1598년(36세, 선조 31)에 응교, 집의로 시강원 필선을 겸하였다. 이후 동부승지·우부승지를 거쳐 형조참의로 임명되었다. 형조 참의로 있을 때에는 동지사(冬至使)로 명나라를 다녀왔다. 귀국 후 나주목사를 거쳐, 병조참지·대사간·예조참의를 역임했다.

1602년(40세, 선조 35)에 동인에 속한 정인홍(鄭仁弘)이 권력을 잡아 성혼을 배척하였다. 성혼의 문인이었던 정엽도 함경북도 종성부사(鍾城府使)로 좌천되었다. 하지만 임지에서 그는 학교 교육을 크게 일으켰다.

1603년(41세, 선조 36)에 오랑캐의 기병 수만 명이 갑자기 함경북도의 종성 아래에 접근했다. 정엽은 성루로 올라가 성 안의 백성들을 동원하여 군복을 입히고, 깃발을 많이 세워 조용히 기다렸다. 그러자 적병이 7일 동안 성을 포위하다가 떠났다. 당시 한 사람이 잡혀갔는데, 그것을 이유로 사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던 기자헌(奇自獻)이 트집을 잡아 죄를 꾸며서 동래(東萊)로 귀양을 보냈다. 하지만 2년 뒤에 복귀하였다.

1606년(44세, 선조 39)에 외직인 성주(星州)와 홍주(洪州)의 목사를 차례로 맡았다. 2년 뒤에는 예조참의가 되었으며, 그 이듬해에 대사성에 임명되고, 충청도 관찰사·예조참의·승지·대사간·도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1612년(50세, 광해군 4), 도승지로 있을 때 왕의 경연에 자주 나갔다. 광해군이 경연을 소홀히 하는 것을 보고 직언을 하였다. 광해군은 간언을 듣고 그 다음날 경연에 나왔으나 정엽은 호조참의로 강등되었다. 하지만 곧 참판에 올랐다. 이후 대북이 집권하였을 때도 그는 관직에 계속 남아 있었는데, 처당숙 이산해 덕분이었다.

1613년(51세, 광해군 5)에 다시 도승지가 되었다. 이해에 계축옥사(癸丑獄事)가 일어났다. 정엽이 사실을 밝히고자 했으나, 어머니가 만류하여 상소를 포기하고 도승지를 사직하였다.

1617년(55세, 광해군 9)에 조정에서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해야 한다는 폐모론(廢母論)이 제기되자 반대하고, 자원해서 외직을 요청하여 양양부사로 나갔다.

1618년(56세, 광해군 10), 백관들이 대궐에 나가 모후 폐위를 청하였다. 이때 같이 따라가지 않은 사람들은 모두 법망(法網)에 걸렸다. 정엽은 전 해에 이미 외직 벼슬로 옮겨 숨어살다가 화를 면했다. 하지만 그도 결국 파직되어 여강(驪江, 여주)으로 돌아갔다. 그 때 광해군이 엄하게 하교를 내려 “정 아무개는 일체 출사하지 않으니 그 의도를 알 수 없다.”고 하면서 책망하자, 정엽은 상소를 하여 처벌을 기다리면서 “신이 일찍이 임금의 측근에 있을 때에 정성을 쌓고 뜻을 다하여 성상을 감동시키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어버이는 늙었는데, 형제가 없어서 어버이 곁을 떠날 수 없습니다.”라고 사양하여 끝내 나가지 않았다. 그는 이후 서인들과 교류면서 인조반정을 지지하게 되었다.

1623년(61세, 인조 1),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조정에 나가 강화도로 유배되는 광해군을 위해, “폐주(廢主)가 비록 스스로 하늘과 관계를 끊기는 하였으나 신하들이 일찍이 섬기었으니 마땅히 곡하며 전송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의 오해를 사기도 하였으나, 대신의 천거로 인조는 그를 대사성 임명하였다. 그는 대사성 외에도 동지경연(同知經筵), 원자사부(元子師傅) 등을 겸하는 중책을 맡았으며, 성균관을 다시 크게 일으키는 공적을 남겼다.
인조는 이러한 정엽을 존중하여 그의 의견에 잘 따랐다.인조반정 이후 그는 친명 정책을 표방하고 후금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계책을 제시하였는데 인조는 그 의견을 따랐다. 또, 이괄(李适)의 난 때에는 공주로 파천하자는 제안을 하여 인조는 공주로 피신을 하였다. 그는 공주에 있을 때에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진되고, 환도 후 다시 정헌대부(正憲大夫)로 대사헌에 임명되었고, 또 우참찬이 되었다. 대사헌을 다섯 번이나 겸하고, 한꺼번에 여러 가지 직책을 겸하는 등 맡은 바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였다.

하루는 정엽이 인조임금에게 말하기를, “들은 바에 의하면 여염의 여자들이 궁중에 있고 폐위된 광해군 재임 때의 궁녀들이 다시 궁중으로 들어왔다고 합니다. 과연 그렇다면 모두 다 축출하였으면 합니다.”라고 하였다. 인조 임금은 그 의견을 가상히 받아들였다. 또 유배된 광해군이 병환에 고생하고 있을 때 정엽이, 중종(中宗)이 연산군(燕山君)을 대우한 사례를 인용하여 “신이 광해군을 10여 년간 섬겼으니 견마(犬馬)의 마음속에 어찌 옛정이 없겠습니까?”하고 이어 눈물을 흘리니, 인조 임금이 감동하여 담당 관리로 하여금 의복과 생활용품을 넉넉히 보내라고 명하였다고 한다.(⌈묘비명⌋)

1625년(63세, 인조 3)에 격무로 병을 얻어 사망하였다. 부음을 들은 인조 임금은 매우 슬퍼하며 그에게 의정부 우의정의 벼슬을 내리도록 명하였다. 아울러 조회를 중지하고 채소 반찬을 들었으며 특별한 애도를 표하였다고 한다. 정엽의 저서로는 ⌈근사록석의(近思錄釋疑)⌋와 ⌈수몽집(守夢集)⌋이 있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