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능상(宋能相, 1709-1758)


송능상(宋能相, 1709-1758)                                 PDF Download

 

송능상은 본관은 은진(恩津)이고 자는 사룡(士龍), 호는 운평(雲坪) 또는 동해자(東海子)이다.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현손이다. 송시열의 학맥을 계승한 권상하(權尙夏, 1641-1721)의 수제자인 한원진(韓元震, 1682-1751)의 문인이다.

송시열은 효종과 동심동력하여 설욕을 갚고자 북벌을 준비한 당대의 거유로 소중화(小中華), 존화양이(存華攘夷) 등 춘추의리(春秋義理)의 화신이었다. 도학에는 정암 조광조요 학문에는 퇴계 이황이요 성리에 율곡 이이라고 하는데 조선 역사를 통틀어 의리에 관해서는 우암 송시열을 으뜸으로 삼는다. 그의 학문은 제자 권상하를 거쳐 한원진 – 송능상 – 송환기, 김정묵 – 송치규 – 송달수, 송근수 – 송병선, 송병순으로 이어지는 학맥을 이룬다.

권상하는 송시열의 수제자다. 송시열 제자 중에는 김창협(金昌協), 윤증(尹拯) 등 출중한 인물이 많았으나 스승의 학문과 학통을 계승하여 훗날 ‘사문지적전(師門之嫡傳)’으로 불렸다. 숙종 연간 1689년에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득세하여 송시열이 다시 제주에 위리안치 되고 이어서 사약(賜藥)을 받게 되는데, 유배지로 달려가 스승의 임종을 지켰고 의복과 서적 등의 유품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 후 송시열의 유언에 따라 괴산 화양동(華陽洞)에 만동묘(萬東廟)와 대보단(大報壇)을 세워 명나라 신종과 의종을 제향했다. 학술적으로 그는 이이-송시열로 이어지는 기호학파의 학통을 계승했다. 문하에서 공부하던 이간과 한원진을 거쳐 이른바 호락논변(湖洛論辨)이 발생한다. 권상하는 한원진의 입장을 견지한다.

 

한원진은 권상하의 수제자다. 자는 덕소(德昭)이고 호는 남당(南塘)이다. 세종 때 영의정을 지낸 상경(尙敬)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통덕랑 유기(有箕)이다. 권상하(權尙夏)의 문하의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 중 한 사람이다. 호락논쟁(湖洛論爭)에서 호론(湖論)인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을 주장한 대표적 인물이다. 저서로는 『남당집』이 있으며, 편저로는 『임시취고(臨時取考)』·『경의기문록(經義記聞錄)』·『퇴계집소석(退溪集疏釋)』·『의례경전통해보(儀禮經傳通解補)』·『장자변해(莊子辨解)』·『선학통변(禪學通辨)』·『왕양명집변(王陽明集辨)』·『거관록』·『심경부주차기(心經附註箚記)』·『춘추별전(春秋別傳)』·『근사록주설(近思錄註說)』·『이락연원록(伊洛淵源錄)』·『가례소의의록(家禮疏擬疑錄)』·『가례원류의록(家禮源流疑錄)』·『고사편람(古事便覽)』 등이 있다. 많은 저술 가운데 1741년 저술한 『⌈주자언론동이고(朱子言論同異攷)』는 송시열과 권상하를 거쳐 50년 만에 완성된 한국 성리학사상의 거작이다.

주자언론동이고⌋는 6권 3책으로 1741년(영조 17)에 완성되었다. 이 책은 송시열이 1689년(숙종 15)에 착수했지만 그가 미처 완성하지 못하고 죽자 그의 문인인 한원진이 스승의 유업을 이어 이룩한 유학 사상의 대작이다.

한원진은 후인들이 주자의 논설을 올바로 이해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공자와 같은 성인의 사상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며, 따라서 도(道)가 밝혀지지 못하고 있다고 하였다. 따라서 공자를 알기 위해서는 주자를 알아야 하고 주자를 모르고서는 공자를 알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공자는 나면서부터 아는 사람(生而知之者)이므로 그 말의 처음과 끝이 한결같으나, 주자는 배워서 아는 사람(學而知之者)이므로 초년설과 만년설이 다를 수 있다고 전제하고 이 책을 만들었다고 하였다.

 

주자의 설에 대해 시간상의 선후와 의리(義理)라는 표준을 세우고 말은 비록 다르더라도 내용에 있어서는 뜻이 서로 통하는 것, 본래는 다름이 없는 것인데 학자들이 다르게 본 것 등으로 나누어 일일이 변정하였다. 이 책에서는 조선조 성리학의 핵심 문제들을 주자의 만년정론(晩年正論)으로 확정해 풀어나가는 것이 주목된다.

첫째, 기(氣)는 유위(有爲)로써 발동하는 것이고, 이(理)는 무위(無爲)로써 무발동이라 하여 퇴계학파의 이발(理發)을 부인하고 있다.

둘째,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에 대해 둘이 모두 성의 용(性之用)으로서 정(情)이라는 이이(李珥)의 설을 확인하고 있다.

셋째, 인물성동이(人物性同異)에 대해서는 한원진의 인물성상이(人物性相異)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넷째 이기선후(理氣先後)에 대해서는 유행의 면에서는 이기무선후이고, 본체론으로 보면 이선기후이며, 발생에서 보면 기선이후이나 이기(理氣)는 원래 선후가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마지막으로 이동기이(理同氣異)에 대해서는 이통기국(理通氣局)이라는 이이의 입장인 이일분수(理一分殊)를 주장하고 있다. 결국 이이의 학설을 충실히 계승하고 나아가 본인이 주장하는 호론(湖論)을 확인하려는 목적에서 서술된 저작임을 보여준다.

송능상은 1739년(영조 15) 5월 송인명(宋寅明)이 왕세자를 가르칠 적합한 인물로 다섯 명을 천거하였는데 그 중 한 명에 들어 시강원 자의가 되었다. 이듬해 3월 춘추의리를 강조하여 원수를 갚고 치욕을 씻는 의리를 논하였다. 1744년 이후 여러 차례 장령에 임명되었다.

 

1750년 정우량(鄭羽良)이 우리나라의 도통(道統)에서 김장생(金長生)을 넣지 않고, 윤증(尹拯) 부자를 언급하자 노론의 입장에서 도통에 대하여 아뢰었다. 1752년 8월과 12월에 계속 장령에 임명되었고 1754년과 1755년 두 차례 집의에 임명되었다. 1758년 묘향산에 들어가서 『대학』을 강론하다가 객사하였다. 자품이 고매하고 규모가 정대하였다고 한다. 경학·예학 등에 밝았다. 저서로는 『운평문집』이 있다.

 

운평문집』은 문학적인 면보다는 학술적인 면이 두드러진다. 시 역시 학문적인 제재가 많다. 서(書)에는 스승 한원진(韓元震)을 비롯해 윤봉구(尹鳳九)·이재(李縡)·임성주(任聖周)·송환기(宋煥箕) 등 노론 학자들과 학문에 관하여 문답한 서한이 많다.

기의 「종회사사실기(宗晦祠事實記)」·「종회사이건기(宗晦祠移建記)」는 송시열(宋時烈)이 청주 화양동으로 들어가기 전에 제자들을 훈도하던 곳에 김천택(金天澤)·민익수(閔翼洙) 등이 세운 사묘(祠廟)인 종회사에 관한 기록이다. 종회사는 송시열이 정계에 등장하기 전의 복거지(卜居地)인 동시에 말년에 퇴거한 곳이다. 따라서 이 기록은 송시열의 족적을 살펴보는 데 참고가 된다.

간서잡록(看書雜錄)」은 『악기(樂記)』·『맹자』·『장자(莊子)』에 관한 연구서로, 도량형에 관한 자의(字義)를 고증해놓은 것이 있어 흥미를 끈다. 규(圭)·촬(撮)·초(抄)·작(勺)·합(合)과 되[升]·말[斗]·섬[石] 등 양(量)에 관한 단위, 서(黍)·누(絫)·수(銖)·냥(兩)·근(斤)·균(勻)·석(石) 등 무게의 단위가 고증되어 있어 도량형 연구에 도움이 된다.

독례수차(讀禮隨箚)」는 『의례』에 관한 규정을 초록해놓은 것이다. 「제목주의(題木主議)」는 『가례』에 관한 의논을 기록해놓은 것이다. 「비래강록(飛來講錄)」은 『대학』에 대한 제자 문흠(文欽) 등의 문의에 답변한 강의록이다. 「독서법(讀書法)」에서는 글을 읽는 방법으로서 삼도(三到)·삼요(三要) 및 문장구조의 형태법 설명인 십이법(十二法)을 제시하고 있다.

 

<참고문헌>

국역조선왕조실록
한국민족문화대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