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희상(吳熙常)-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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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763(영조 39)∼1833(순조 33).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사경(士敬), 호는 노주(老洲)이다. 작년에 이어서 여기서는 「오희상금보(吳熙常琴譜)」 상편의 「여오금사설(與吳琴師說)」과 하편의 「창탄선후변(唱彈先后辨)」의 내용을 중심으로 오희상의 음악관을 소개한다.

먼저 「오희상금보」 상편의 「여오금사설」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오희상은 거문고 연주에 있어서 신묘함을 언급하며, 채옹(蔡邕, 132~192)의 거문고 초미(焦尾)와 혜강(嵇康, 223~262)의 <광릉산(廣陵散)> 그리고 도연명(陶淵明, 365~427)의 <무현금(無絃琴)>을 통해서 신묘한 경지에 오른 유가 성현들의 사례를 소개한다. 이어서 거문고 연주에 있어서도 신묘함을 얻는 것이 중요한데, 김사명(金士明)이란 인물이 신묘한 깨달음의 경지에 올랐으나 현재 전해지지 않다고 아쉬워하던 차에, 지금 ‘오금사’의 거문고 연주를 감상하니 그가 신묘한 경지에 오른 것 같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오희상은 「수선조(水仙操)」에 기록된 백아의 고사에 근거하여 오금사도 일찍이 부안의 변산 바닷가에 우거한 적이 있다고 하니, 거기에서 거문고의 신묘함을 얻은 것 같다고 추측한 바 있다. 이처럼 오희상은 「여오금사설」에서 시종일관 거문고 연주에 있어서 신묘한 경지에 오르는 것의 중요성을 언급한다. 이어서 오희상은 오금사의 신묘한 연주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선생이 옷을 펼치고 갓을 바로 하고서 즐겁게 거문고를 안고 앞으로 나왔다. 처음에는 더디고 느리며 소리가 성글고 절주가 드물어서 큰 구슬이 아직 쪼개지지 않은 듯하였다. 장차 중간쯤을 연주할 때는 눈썹이 올라가고 눈꺼풀이 떨리며 어깨가 솟고 손가락이 춤을 추어 터럭 하나 머리카락 하나에 이르기까지 모두 조용히 움직이는 기운이 있어서 몸과 마음이 모두 깊이 잠겨 성음(聲音)의 사이를 뛰어넘었다.

그리하여 궁성으로써 우성과 치성의 울림을 통어하고, 각성으로써 궁성과 상성의 음을 머금어서 율려(律呂)가 연주되고 조리가 어지럽지 않아서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저도 모르게 손으로 춤을 추고 발을 구르게 하였다. 곡조를 마치려 할 때는 빠르게 이어져서 돌아가는 기러기가 높이 나는 듯하고, 가늘고 길게 이어져서 헤엄치는 고니가 홀로 우는 듯하며, 빙빙 돌며 날아오르는 듯하여 고요하고 한가로워서 사람의 마음이 환하게 트이고 정신이 맑아지면서 그 까닭을 알 수 없게 하였다.”

 

그렇다면 거문고 연주에 있어서 신묘함이란 무엇인가? 거문고 연주에 있어서 신묘하다는 것은 본질을 온전히 구현하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본질을 온전히 구현한다는 것은 음악에 담고자 하는 사물에서 이탈하지 않고 음악 자체가 그 사물인 것이니, 내 마음의 간곡한 정성이 거문고 연주를 통해서 천지자연의 이치와 하나가 되어 그 본질을 온전히 구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따라서 거문고 연주의 신묘함은 마음과 손이 조화하여 움직이는 것이기에 스스로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유가에서 수신을 통해 도달하려는 궁극적인 이상은 성인(聖人)이다. 유가의 성인이란 천지와 더불어 그 덕을 합한 자이기에 신묘불측(神妙不測)하고 천지의 법칙을 이어받은 그 타고난 본성을 그대로 실현한 자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오희상은 인격수양을 위한 가장 좋은 방법으로 거문고 연주를 주목하고, 거문고 연주를 통해서 유가 성인의 신묘한 모습을 추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오희상금보」 하편의 「창탄선후변(唱彈先后辨)」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노래가 거문고 연주를 따라가는 것인가? 반대로 거문고 연주가 노래를 따라가는 것인가? 이것은 오희상이 살았던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 음악계의 화두였다. 당시의 노래하는 사람은 노래가 거문고 연주를 따라간다고 말하였고, 거문고 연주가는 연주가 노래를 앞세운다고 말하였다. 혹자는 노래와 연주는 어우러지며 서로 의지하지만, 손가락의 움직임(연주)은 입술의 움직임(노래)에 미치지 못한다고 말하였다. 그래서 오희상은 노래와 거문고 연주의 선후관계를 분명하게 밝히고자 「창탄선후변」을 지었다.

우선 오희상은 「창탄선후변」에서 노래가 거문고 연주보다 먼저인 이유에 대해서 몇 가지 근거를 들어 변증한다. 즉

 

“시를 읊는 것이 현악기를 타는 것보다 먼저이고, 현악기를 타는 것이 시를 읊는 것보다 나중이므로 악기 연주법은 모두 장구의 3점을 먼저 보내고서 제4점부터 시작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소리가 이미 목에서 나와서 시를 읊는 것이 거문고를 타는 것보다 먼저인 까닭은 화(和)하는 자로 하여금 육율(六律)의 맡은 바를 분변하길 원해서이다. 이미 음율(音律)을 분변한다면, 노래하는 자가 맑거나 탁하게 창(唱)하면 화(和)하는 자가 맑거나 탁하게 응하고, 높거나 낮게 창하면 높거나 낮게 화(和)한다.”

 

거문고 연주가 노래보다 나중인 이유에 대해서 ‘화’하는 사람, 즉 거문고 연주자가 노래 소리를 듣고 선율(음율)을 분변하기를 원해서라고 한다. 선율을 분변한다는 것은 거문고 연주자가 노래를 따라 가며 연주할 수 있다는 의미로, 거문고 연주자는 맑거나 탁한 노래에 맑거나 탁하게 호응하고 높거나 낮은 노래에 높거나 낮게 화답한다는 설명이다. 오희상은 이것이 양(陽)이 음(陰)보다 먼저이고, 남편이 아내보다 먼저 노래하는(夫唱婦隨) 이유라고 주장한다.

실례로 악기 반주에 맞춰 노래 부를 때 악기 연주는 장구의 3점을 먼저 보내고 제4점부터 시작된다고 말한다. 이러한 연주법은 오늘날 성악곡의 반주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가곡을 부를 때 1장에서 장구점의 첫 3점(5박)까지는 장구를 치지 않고 노래만 부르다가, 제4점(6박)부터 장구를 치고 제6점(9박)부터 거문고를 비롯한 악기들의 합주가 시작된다. 그리고 가사의 수성가락 반주접이나 판소리에서 소리를 처음 낼 때에 처음부터 북을 치지 않는다.

더불어 오희상은 노래함에 장단이 있고, 악기로 화답함에 느리고 빠름이 있다는 것이 무엇인지 실례를 들어서 변증하였다. 결국 느린 노래에 거문고 반주가 느리게 화답하고 빠른 노래에 거문고 반주가 빠르게 화답한다는 설명이다. 이것은 「서경」「우서」에서 ‘소리는 길게 읊는 것에 의지한다(聲依永)’에 근거한 것이다. 즉 악기가 내는 소리는 시를 길게 읊는 노래에 의지한다는 의미로, 결국 노래의 장단에 의지하여 거문고를 연주한다는 해석이다. 오희상은 이것이 「중용」에서

 

‘군자는 중용에 의지한다
(君子依乎中庸)’

 

는 말과도 일맥상통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중용에 의지할 수 있는 것 역시 성인만이 그러할 수 있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오희상은 시종일관 자신의 음악관을 유가 경전을 인용하여 고증하는 태도를 보인다. 이러한 고증적 고찰은 <진악해>에서도 나타난다. 본인의 음악관이 옛 성현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유가의 문헌에 기초하여 증거를 세워 이론적으로 밝혔고, 「예기」의 「악기」 등을 인용하여 악(樂)의 중요성을 강조하였으며, 「주역」의 하도와 낙서 등을 인용하여 옛날과 오늘날의 ‘악’이 겉보기에는 다른 것 같지만 그 원리는 동일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오희상금보 편찬의 근거 역시 「시경」에 있음을 강조하였다.

[참고문헌]: 「노주 오희상의 음악적 배경과 음악관」(최선아, 「한국음악사학보」53권, 한국음악사학회, 2014), 「老州集」, 「吳熹常琴譜」(「한국음악학자료총서」제39권, 국립국악원, 2004),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