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중회(趙重晦:1711~1782)


조중회(趙重晦:1711~1782)                                PDF Download

 

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함안(咸安)이며, 자(字)는 익장(益章), 호는 독락재(獨樂齋), 시호(諡號)는 충헌(忠憲)이다. 조선 전기 생육신(生六臣)인 조려(趙旅)의 10세손이며, 유수공 영복(榮福)의 아들이다. 일찍이 도암(陶庵) 이재(李縡)의 문하에서 수업하여, 1736년(영조12)에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급제하고 가주서(假注書)를 제수받았으며, 1739년(영조15)에는 설서(說書)를 역임하고, 1743년(영조19)에는 정언(正言)정언(正言): 간쟁(諫爭)을 맡았으며, 다른 관원들과 함께 간관(諫官), 언관(言官) 또는 대관(臺官)으로 불리었다.이 되었다. 이때 영조가 사묘(私廟)인 육상궁(毓祥宮)육상궁(毓祥宮): 영조의 생모 숙빈 최씨를 모신 사당을 이른다.에 참배(參拜)하는 것이 부당함을 직간(直諫)하였다가 처형될 뻔하였다. 실록에 실려 있는 그 기록을 잠사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영조가 육상궁으로 거둥하려하자, 그가 앞을 가로막고 다음과 같이 직간하였다.

“새해에 태묘(太廟)에 배알하는 예를 행하지 않고 사묘인 사당에 먼저 거동하시는 것은 예법이 아닙니다.”

하자, 이 말에 영조는 크게 노하여 곧장 홍화문(弘化門)을 나가 육상궁에 당도하여 눈물을 흘리며 손발을 차가운 연못에 담갔다. 정월 초의 매서운 바람과 추위에 당시 세손이었던 정조가 눈물을 흘리며 간하자, 영조는 조중회의 머리를 가져오라 일렀다. 세손이 대신들에게 영조의 말을 전하니, 영의정 김상복(金相福)이 아뢰길,

“조중회는 죽어야 할 만한 죄가 없습니다. 어찌 죄 없는 신하를 죽이려 하십니까? 저하께서는 성의를 다하여 전하의 뜻을 돌리도록 하시옵소서.”

하였다. 이에 영조는 여러 대신들의 간언으로 조중회에게 내린 참수(斬首)하라는 명을 거두고, 대신 그를 흑산도(黑山島)로 위리안치(圍籬安置)하게 하고 환궁(還宮)하였다. 그 날로 조중회를 귀양 보내면서 보통 사람의 세 배의 길을 걸어가도록 명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흑산도에 도착하기 전에 조중회를 석방하라는 명이 다시 내려져 한양으로 돌아왔다.

다른 기록을 보면, 그가 1743년(계해)에 영조의 사묘(私廟) 참례와 사행(使行)의 폐해에 대해 상소하는 글을 올리자, 영조는 진노하여 6일 동안 정사를 보지 않았고, 조중회는 18일이나 석고대죄를 하였다. 사람들은 모두가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고 했는데, 도암 이재는 혼자 이르기를,

“직언한 것이니 죽지 않을 것이다.”

라고 했다. 과연 그의 말대로 조중회는 수일 후에 풀려났다.
영조실록》 19년(1743)조에 ‘언로, 종묘 행사, 심양 문안사와 관련한 존명(尊明) 등에 관한 조중회의 상소문이 수록되어 있어 다시 살펴보기로 한다.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언로가 막힌 것이 요즈음보다 심한 적이 없어서 장주(章奏)의 사이에 한마디 말이라도 뜻에 거슬리면, 전하께서 문득 당론(黨論)으로 의심하여 찬출(竄黜)하고 천극(栫棘)하는 것이 앞뒤에 연달았고, 심지어는 항양(桁陽)과 질곡(桎梏)으로 다스리기도 하였습니다. 이러므로 대각(臺閣)에서는 결단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것이 습속을 이루었고, 조정에서도 풍도와 기절이 사라지고 꺾였는데, 점차 변하여 풍속이 허물어지고 세도가 점점 낮아졌으니, 어찌 크게 걱정스러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더구나 지금 천재지변이 나날이 더하여 사직단(社稷壇)의 나무에 벼락을 친 변괴는 더욱 마음을 놀라게 하는 일입니다. 인애(仁愛)하신 하늘의 경고(警告)가 깊고 간절한데, 자신에게 허물을 돌려 구언(求言)하는 거조를 보지 못하였고, 정원과 옥당의 진계(陳戒)도 매우 적막하여 들을 길이 없으며, 비지(批旨) 또한 범연히 수응(酬應)하는 데에 지나지 않을 뿐이니, 이렇게 하고도 어떻게 하늘의 뜻을 돌리고 재앙을 소멸할 수 있겠습니까?
종묘를 봉심하고 수개하는 것은 으레 봄가을 중월(仲月)에 행하는 것이 국전(國典)에 실려 있는데, 금년 가을에는 무슨 연고가 있는지 알 수 없으나, 초순 전에 행했어야 할 봉심을 공연히 그믐께로 미루어 수개를 9월로 연기하도록 하시는 것입니까? 종묘사직보다 막중한 일이 없는데, 대관(大官)이 이러하니 서료(庶僚)들을 어찌 책망하겠습니까? 게으른 관원을 신칙하고자 하면 대관(大官)들부터 먼저 사직하여야 합니다. 전하께서도 또한 스스로 유의하여 정성으로 자신을 책망하려 하고 숨기는 바가 없어야 하며, 널리 언로(言路)를 열어 하늘의 견책에 보답하소서.
…..중략….
돌아보건대, 오늘날 천하에 예의(禮儀)가 바른 나라는 오직 우리나라뿐입니다. 저들이 사해(四海)를 석권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편방(偏邦)에 무슨 어려움이 있어서 홀로 그 풍속에 따르게 하지 않겠습니까? 이는 다름 아니라, 조신(朝臣)과 위포(韋布) 가운데 충신(忠臣)ㆍ의사(義士)가 가끔 나타나 그들의 마음을 두렵게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에 와서는 세교(世敎)가 여지없이 허물어졌으니, 이로부터는 3백 년 동안 유지해 오던 예의의 나라가 장차 모두 오랑캐의 지경에 빠져들게 될 것입니다.
오직 저 황단(皇壇)에 드리는 규벽(圭璧)마저 장차 거의 성실하지 못한 허위(虛僞)에 돌아갈 것이니, 이것이 어찌 우리 영고(寧考)께서 대보단(大報壇)으로 명칭한 본의(本意)이겠습니까? 생각이 이에 미치면, 신은 몹시 마음이 애통합니다. 선정신 송시열(宋時烈)이 임종할 때 그 문인(門人)과 자손들에게 경계하기를, ‘인통함원박부득이(忍痛含冤迫不得巳)라는 여덟 글자를 죽음으로 지킴이 옳다.’고 하였습니다. 신은 이 말에 진실로 느낀 바가 있어서 감히 무릅쓰고 올립니다.”

이 상소문을 통하여 그의 종묘사직을 위한 충성심과 그의 성향을 확연히 인식할 수 있겠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언로를 활짝 열어놓아야 국가의 장래가 밝아진다는 사실은 고금의 진리인 듯하다. 그가 이 부분을 더욱 강조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만 할 듯하다.

그는 1748년에 부수찬으로 복직되어 부교리(副校理)와 헌납(獻納) 등을 역임하고, 이듬해에 탕평책(蕩平策)을 반대하는 윤급(尹汲)을 변호하다가 한때 파직되기도 하였다. 그 뒤 다시 기용되어 1751년에 사은 겸 동지사(謝恩兼冬至使)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와 부수찬(副修撰)과 겸 필선(兼弼善) 등을 지내고, 1753년 승지(承旨)를 거쳐 1757년에 대사간(大司諫)이 되었다. 이어 승지, 병조참의(兵曹參議), 영변부사(寧邊府使), 양주목사(楊州牧使) 등을 역임하였다. 1762년에 다시 승지로 재직하던 중에 왕세자(王世子)인 장헌세자(莊獻世子)가 폐위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는 관을 벗어 머리를 조아리고 울면서 극간(極諫)하였다.

“예로부터 세자가 임금께 어떤 과오를 저질렀다 하더라도 어찌 죽음에 이르게 한 적이 있었습니까? 신은 만 번이라도 죽겠나이다.”

이에 영조는 진노하여 그를 무장(茂長)으로 귀양을 보냈으나 곧 풀어주었다. 1770년에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가 되고 이듬해에 도승지,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예조판서(禮曹判書)가 되었다. 1775년에 이조판서를 역임하고, 이듬해 다시 예조판서가 되었으며, 그 해에 정조가 즉위하자, 함경도 관찰사(咸鏡道觀察使)로 전직했다. 1779년(정조3)에 공조판서(工曹判書)를 역임하고 이듬해에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의 사위 홍낙빈(洪樂彬)이 세도가인 홍국영(洪國榮)의 숙부이므로 한 때, 그에게 아부하려는 사람이 있었으나, 성품이 고결하여 이를 모두 배척하고 지조를 지켰다. 그의 일생에 대한 평가는 다른 누구의 말보다 영조가 자신의 측근에게 일러준 회한이 담긴 몇 마디 말에서 여실히 확인할 수 있다.

“일을 곧게 처리하고 잘못된 것은 고치게 한 자는 이 사람이 가장 으뜸이었다. 당시 뜰을 메운 많은 신하들이 증기에 찐 곡식처럼 입을 연 자가 한사람도 없는 중에 유독 조중회는 진언을 하였으니, 만약 이러한 자가 한 사람만 더 있었다면 저 지경에 이르지는 안았을 것이라 생각하니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다. 옛말에 ‘모진 바람 앞에 굳센 풀을 알고 난세에 충신을 안다’고 하더니, 오늘날의 조중회를 두고 이른 말이로다.”

위의 기록은 비록 임금에게 직간(直諫)을 하여 노여움을 사기도 하였지만, 영조는 이렇듯 그를 충직한 신하로 여겼으며,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씻을 수 없는 후회를 설토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의 저서인 《입조일기(入朝日記)》는 그가 45년간의 관직생활을 기록하여 남긴 생생한 기록이다. 이 《일기(日記)》에서 자신을 비판하거나 혹은 탄핵한 상소까지도 개인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왕조실록》과 같은 관찬(官撰) 기록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일들을 담고 있어서 당시 정치상황을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역사문헌으로 활용되고 있다. 또한, 조선시대 관료의 일생이 어떻게 구성되었는지를 자세히 살필 수 있으며 당시 관직 임명 실태를 알아보는데 귀중한 사료(史料)로 평가받고 있다.

끝으로 죽음도 불사하고 직간을 서슴지 않았던 그에 대하여 함안조씨(咸安趙氏) 대종회(大宗會) 홈페이지에서도 자세히 소개하고 있으며, 《매산선생문집(梅山先生文集)》 권34에 그의 신도비명(神道碑銘)이 수록되어 있다.

<참고문헌>
– 《강한집(江漢集)》
– 《도곡집(陶谷集)》
– 《도암집(陶菴集)》
– 《어계집(漁溪集)》
– 《병산집(屛山集)》
– 《영조실록(英祖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