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시징(郭始徵,1644-1713)


곽시징(郭始徵,1644-1713)                                   PDF Download

 

1644(인조 22)∼1713(숙종 39). 조선 후기의 학자이다.

관은 청주(淸州). 자는 경숙(敬叔) 또는 지숙(智叔)인데, 처음 경숙이었다가 스승인 송시열에 의해 지숙으로 고쳤다. 대대로 살고 있는 곳은 목천(木川)이며 호는 경한재(景寒齋)이다. 아버지는 사헌부집의(執義)와 지제교(知製敎)를 역임한 곽지흠(郭之欽)이며, 어머니는 안동 김씨로 도사(都事) 김옥(金鋈)의 딸이다. 아버지는 강직하고 청백한 인물로 평판이 높았다.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과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다.

1644년 6월에 서울의 근동(芹洞)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말과 행동이 장중하고 머리가 총명하였다. 성인들보다 더 뛰어난 논리력을 가지고 있어서 어른들이 질문하면 대답하는 말이 이미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소학(小學)을 읽고는 모든 일을 그대로 따라 행하려 하였으며, 또한 과거공부는 선비의 뜻을 빼앗는다고 하여 한 차례 나아가 응시하고는 그만두었다. 이때 송준길의 부름을 받아 한양으로 올라가 학문을 배웠으며, 중년 이후에는 한양 생활을 청산하고 가족을 데리고 다시 충청도 목천으로 내려갔다. 여기에서 송시열을 만나 그로부터 사사(師事)를 받고 평생토록 그를 스승으로 모셨다. 송시열의 문하에서 배우고 부지런히 하기를 몸이 야위는 데까지 이르렀으므로 집안사람들이 그만둘 것을 권유하였으나 오히려 마음에 두지 아니하였다. 송시열을 모시고 아침저녁으로 배우기를 청하며 간혹 밥을 먹거나 잠을 자는 일까지 잊었기 때문에 송시열이 매번 그의 학문 좋아함을 칭찬하였다.

1689년(숙종 15)에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과 외재(畏齋) 이단하(李端夏)의 천거로 재릉참봉(齋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기사환국(己巳換局)이 일어나 남인이 득세하자 벼슬을 그만두었다. 기사환국은 1689년(숙종 15년) 장희빈(張禧嬪) 소생의 아들 윤(昀)을 세자로 삼으려는 숙종에 반대하던 송시열 등 서인이 이를 지지한 남인에 의하여 패배당하고 정권이 서인에서 남인으로 바뀐 일을 말한다. 숙종은 서인이 제기한 원자(元子) 문제를 빌미로 서인의 횡포를 억누르고자 서인을 실각시키는 한편, 남인들을 다시 중용하게 된다. 이 일을 계기로 송시열이 제주도에 유배되자 여러 문인들과 함께 그 무고함을 상소하였고, 송시열이 죽은 뒤에는 태안(泰安)으로 들어가 두문불출하며 학문과 후진양성에 힘썼다. 1694(숙종 20)년 갑술환국(甲戌換局) 이후 송시열이 신원되자, 고향인 목천으로 돌아와 송시열이 쓴 경한(景寒)으로 편액한 정자 경한정을 세워 도를 강론하는 등 후진양성에 전념하였다.

이에 학자들이 다투어 배우기를 청하였으며 한결 같이 스승이 이루어 놓은 학문에 따라 가르쳤다. 바닷가에 있는 후미진 지역에 비로소 학문이 있음을 알게 하였고 사나운 풍속이 따라서 교화되는 것이 많았다. 도를 강론하고 여가에 산수 좋은 데를 거닐며 스스로 여유 있는 생활을 하였다. 때때로 자연을 음미하다가 즐거움이 지극하여 감흥이 일어나면 문득 시와 노래를 지어 그로써 자기의 뜻을 부치기도 하였다. 그가 시와 노래를 지은 까닭은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기 위함이다. 그는 단순히 자연을 노래하는데 그치지 않고 세상을 교화시키는데 그 목적을 두었던 것이다. 그의 대표적인 시에는 경한정시가(景寒亭詩歌)가 있다. 이것은 퇴계의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과 율곡의 「고산구곡가(高山九曲歌)」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형식의 영향을 받았다기보다는 시조의 효율성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노래를 부르면 근심도 잊어버리고, 마음을 맑게 하기도 하며, 욕심도 적게 하기 때문에 ‘배움에 뜻을 둔 자’에게 보탬이 되었다. 즉 시조는 노래 부르는 자와 그것을 듣는 자에게 모두 유익하다는 것이다.

1703년(숙종 29년)에 목릉참봉에 임명되었으나 병을 이유로 사직하였으며, 이어서 왕자사부(王子師傅)에 임명되어 왕자 연잉군(延礽君: 영조)을 가르쳤다. 이때부터 연잉군과의 각별한 관계가 형성된다. 연잉군이 등극 후에도 스승인 곽시징을 항상 염두해 두고 있었다는 것은 조선왕조실록에도 잘 나타나 있다. 영조는 곽시징을 자신의 유일한 스승으로 인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스승 곽시징에 대한 영조의 사랑이 그 후손에게까지 내려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 뒤에 1708년(숙종 34)에 빙고별제(氷庫別提)가 되었으며, 바로 이인도찰방(利仁道察訪)에 제수되었다. 이 시기 역원의 백성들을 교화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이인도찰방으로 있을 때 임금에게 소학을 익숙하게 읽고 아울러 격몽요결(擊蒙要訣)을 보도록 청하였다. 마음을 다하여 임금을 공경하기를 관직에서 떠났다고 하여 거르지 않았으며, 심지어 병이 났을 때도 근심하고 은혜를 다할 것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때문에 지금 임금의 덕과 기질이 비록 타고난 것일지라도 근원에 물을 대고 깊게 한 것은 또한 곽시징에게서 힘을 얻은 것이 많았으니, 그 쌓은 정성과 권면하고 인도한 것은 실제로 사부들 가운데서 제일이라고 하겠다.

곽시징은 품성이 이미 어질고 후덕하며 학문은 실천을 강조하였으며, 일찍이 스스로 가르침에 따라 잠시라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병이 들어 사사로이 있을 때에도 게으른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스스로 잘난 체 뽐내는 것을 병으로 여겼으며, 자신의 몸가짐은 반드시 근신하여 아무리 이익과 손해가 번갈아 변하여도 본래의 뜻을 바꾸지 않았으며, 마음을 다스리기를 진실로 엄하게 하였다. 부모를 섬김에는 아침 문안과 잠자리 보살피기를 예에 맞게 하였고, 맏형 섬기기를 어버이 섬기듯이 하였다. 어버이가 병이 들자 손가락에서 피를 내어 먹이기도 하고, 변을 맛보기도 하였다. 상(喪)을 당해서는 3년 동안 소금이 없이 죽을 먹었으며, 비록 상을 마쳤어도 묘소를 지날 적이면 반드시 곡하였다. 특히 예서(禮書)를 깊이 연구하였으며 책을 읽다가 의심 가는 곳이 있으면 책을 덮고 깊이 생각하여 의심나는 글이나 바뀐 예절은 세밀하게 분석하였다.

1710년(숙종 36) 이인도찰방의 임기를 마치고 신재(愼齋) 김집(金集)이 놀던 공주의 둔촌으로 옮겨 살던 중 1713(숙종 39) 정월 22일에 죽으니 향년이 70세다. 승정원(承政院)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었다. 처음에는 공주에 장사지냈다가 목천(木川)의 선영 아래 곤향(坤向)의 산록으로 다시 장사지냈다.

참고할만한 문헌으로는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숙종실록(肅宗實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