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유헌(趙有憲)


조유헌(趙有憲)                                                             PDF Download

 

유헌(趙有憲, 1736∼1815)은 조선시대 후기의 유학자로 친형 조유선(趙有善, 1731∼1809)과 함께 미호(渼湖) 김원행(金元行, 1702∼1772)에게서 글을 배웠다.

형 조유선은 과거에 합격하여 혜릉참봉, 익산군수 등을 벼슬을 하였지만, 조유헌은 벼슬을 하지 않고 글을 읽고 개성에서 후진 양성을 하는데 힘썼다. 사망 후에는 조정에서도 그의 공덕을 인정하여 호조참의에 증직되고 형 조유선과 함께 나산사(蘿山祠)에 제향하였다. 저서로 ⌈정포은선생이적기(鄭圃隱先生異蹟記)⌋가 있다.

 

1736(1, 영조 12)
조성제(趙聖躋)의 아들로 개성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직산(稷山)이다. 자는 계무(季武), 호는 지산(芝山)이다. 아버지 조성제는 관직오르지 못했다.

어려서부터 친형 조유선(趙有善, 1731∼1809)과 함께 미호(渼湖) 김원행(金元行, 1702∼1772)에게 글을 배웠다. 김원행은 김창집(金昌集, 1648년∼1722년)의 손자이며, 김제겸(金濟謙, 1680년∼1722년)의 셋째 아들이고, 담헌 홍대용(洪大容, 1731년∼1783년)의 스승이기도 하다. 당시 김원행은 경종 때 발생한 신임옥사로 할아버지 김창집, 부친 김제겸, 형 김성행, 동생 김탄행 등 가족을 모두 잃고 낙향하여 있었을 때였다. 영조가 즉위하여 가문의 권위가 복권되어 벼슬길에 나갈 수 있었으나 사양하고 독서와 후진양성에 힘썼다.

 

1771(35, 영조 47)
식년시(式年試) 과거에 친형 조유선이 합격하여 생원이 되었다.

 

1772(36, 영조 48)
스승 김원행(金元行, 1702∼1772) 사망하였다. 스승과는 그동안 여러 차례 서신을 주고받았다. 미호집에는 조유선과 조유헌 형제에게 스승이 보낸 답장이 여러편 실려 있다. 형 조유선에게는 모두 10편, 그리고 형과 함께 조유헌에게 보낸 글은 2편이다. 조유헌에게 보낸 내용을 인용해보면 다음과 같다.

 

“계식(季式, 조유헌. 아마도 계무季武의 잘못인 듯)의 편지도 또한 대단히 후련하고 기쁩니다. 그 편지에서 이른바 ‘만나는 일마다 힘을 다하되 그 일에 골몰되지 않으니 더욱 실제로 득력(得力)하는 효과가 있다.’라는 것은 참으로 좋은 말입니다.

부디 이 말을 다시 등골에 단단히 붙여 명심하고 사력을 다해 맨 채로 앞으로 나아간다면 비로소 학문하는 성과를 참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니, 진심으로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병세가 중간에 조금 차도가 있는 듯하다가 7, 8일 전부터 도리어 더 심해졌습니다. 하늘이 장차 저를 폐할 듯하니, 어이하겠습니까?”

 

1796(60, 정조 20)
개성유수(開城留守)가 조유헌을 중앙에 천거했다. 지산초당(芝山草堂)에서 교육에 힘쓴 공 때문이었다.

 

1798(62, 정조 22)
개성유수(開城留守) 조진관(趙鎭寬)과 유생 김종오(金鍾五) 등이 편집, 간행한 ⌈삼충록(三忠錄)⌋의 발문을 썼다. ⌈삼충록⌋은 임진왜란 때 사망한 세 사람의 충신에 대한 기록으로 동래부사(東萊府使) 송상현, 회양부사(淮陽府使) 김연광, 임진(臨津)전투에서 전사한 부장(副將) 유극량이다.

 

1801(65, 순조 1)
현릉참봉(顯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1809(73, 순조 9)
친형 조유선(趙有善, 1731∼1809)이 사망하였다. 당시에 ‘서경에서 수백년 내에 한번 나올만한 인물(西京數百年來一人)’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의 자는 자순(子淳), 호는 나산(蘿山)으로, 1771년 과거에 합격하여 혜릉참봉, 청하현감, 익산군수 등을 역임하였다. 1797년(66세)에는 진산군수에 임명되었으나 관직을 사임하고 오직 학문에만 전력하였으며, 저서에 ⌈고정유사(考亭遺事)⌋, ⌈사우연원록(師友淵源錄)⌋, ⌈나산집(蘿山集)⌋ 등이 있다. 낙론(洛論)의 대가 김원행의 학설을 계승, 발전시켰다.

 

1815(79, 순조 15)
사망하였다. 저서에 ⌈정포은선생이적기(鄭圃隱先生異蹟記)⌋가 있다. 이 글을 고려시대 개성에서 활동한 포은 정몽주(鄭夢周, 1338년∼1392년)을 기리는 글로서 정몽주가 살해당할 당시 선죽교에 묻은 혈흔, 영천 임고서원의 영정과 효자비 등과 관련된 이적을 정리, 소개한 것이다.

순조 24년, 1824년 9월 7일(음)에 영돈녕부사 김조순(金祖淳)이 다음과 같이 임금에게 건의하였다.

 

“연전 송경(松京, 개성)의 유생들이 고 군수(故郡守) 조유선(趙有善)과 고 참봉(故參奉) 조유헌(趙有憲) 형제가 학문을 돈독히 하고 힘껏 실천한 일을 가지고 포상하기를 청하여 조정에서 품의하여 처리하는 명이 계셨으나, 아직까지 처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금번 제가 서로(西路)에서 올라오는데 개성부(開城府)의 인사(人士)들이 서로 나와서 다시 지난번 이야기를 거듭 말하며 전달(轉達)하기를 바랐습니다. 이 두 사람에 관한 건은 과연 상소한 바와 같으니 포상하여 기리는 일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특별히 명을 내리셔서 즉시 심의하여 처리하게 하여 개성부의 인사들이 보고 분발하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하므로, 감히 우러러 아룁니다.”

 

순조임금은 이러한 의견에 대해서 그대로 시행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이로서 조유헌은 호조참의에 증직되고 형 조유선과 함께 나산사(蘿山祠)에 제향되었다.

 

참고문헌)
⌈미호집⌋권10, <한국문집총간(韓國文集叢刊)>, ⌈비변사등록⌋,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