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간(李柬, 1677-1727)

이간(李柬)                                                                  PDF Download

이간은 본관은 예안(禮安)이고 자는 공거(公擧)요 호는 외암(巍巖)이다. 아버지는 부호군 이태형(李泰亨)이다. 권상하(權尙夏)의 문인이며,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 중 한 사람이다. 호락논쟁(湖洛論爭)에서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을 주장한 낙론계의 대표적 인물이다.

34세(1710, 숙종 36) 순무사 이만성(李晩成)에 의하여 장릉참봉(莊陵參奉)으로 천거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37세(1713) 이유가 호서 사인(湖西士人) 이간 등 한두 사람을 등용할 만하다고 세자의 시강원으로 추천하니 숙종이 옳게 여겼다.

39세(1715) 이간을 자의(諮議)로 삼았다. 교리(校理) 홍석보(洪錫輔)가 상소 말미에 “자의 이간은 나이가 젊고 덕망을 쌓지 못했는데 갑자기 높이 의망하였으니 너무 갑작스럽다는 논의를 면하기 어렵습니다.” 했다.

40세(1716) 사간원에서 “자의 이간은 본디 범용한 사람으로 일찍이 학문이 있다는 일컬음이 없었는데 한갓 남의 장점을 추켜세우는 데에 힘쓴 덕분에 외람되게 시강의 줄에 흠을 내게 되었으므로 물정이 놀라하고 비웃은 지 오래 되었는데도 그치지 않으니, 청컨대 개정하소서.” 청했지만 숙종이 따르지 않았다.

49세(1725, 영조 1년) 영조가 이간에게 “산림에서 독서하였으니, 반드시 학문하는 요점을 알 것인데, 내가 듣고자 한다.” 했다. 이간이 말하기를, “신은 듣건대, 학문하는 본말은 지와 행이라고 합니다. 지행 가운데 각기 큰 이치가 있고, 한 물건 한 일의 이치는 모두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나 심신에 일용하는 윤상과 기강 상에는 반드시 먼저 곧바로 결단하여 이해해야 하니 이것이 치지(致知)의 큰 이치입니다. 행(行)으로 말하자면 하나의 선(善)과 하나의 행실을 진실로 마땅히 극진하게 해야 하나 수기(修己)에 나아가 말하면 천인(天人)과 이욕(理欲)의 나눔에서 곧바로 판단하여 구별해 내어야 하며, 치인(治人)에 나아가 말하자면 선을 선하게 여기고 악을 악으로 여겨 진실 되게 힘을 쓰면 이것이 역행(力行)의 큰 이치입니다. 학문을 하면서 그 큰 이치를 먼저 하지 않으면 학문하는 요점이 아닐까 싶으니 맹자가 이른바 ‘먼저 그 큰 것을 세워야 한다.’고 한 것이 이것을 이른 것이 아니겠습니까?” 했다. 영조가 “말을 어찌 많이 해야 되겠는가? 의리의 대체는 한 마디면 다 된다. 듣건대 노모가 있다 하니 지금은 우선 내보내나, 강학하는 사람을 얻기가 매우 쉽지 않다. 조만간 올라와 강론하여 내가 미치지 못한 점을 보완하도록 하라.” 했다.

정언(正言) 한덕전(韓德全)이 상소하여 “초야에 숨어 있는 선비를 초빙하시되, 직명(職名)의 유무를 막론하고 별유(別諭)로 부르시고, 직사(職事)를 강제로 맡기지 마시고, 경연에서 윤번으로 시강하게 하소서.” 하면서 “이간(李柬)의 통달하고 걸출함과 이이근(李頤根)의 조용하고 근신함과 윤봉구(尹鳳九)의 순박하고 온아함과 한원진(韓元震)의 해박하고 두루 아는 식견이 이번 선발에 참으로 합당합니다.” 했다.

50세(1726) 이간이 경연관으로 하명 받고 상소하길, “신은 생각건대, 옛사람은 순수하고 성실함이 남음이 있어서 질박을 이룸이 심후하고, 총명을 발휘하지 아니하여 수고롭고 겸손함이 여유 있으며, 지려(志慮)가 정밀하고 전일하여 힘을 내어 일하는 까닭에 성인의 말을 듣지 않아도 그 마음이 진실로 이미 정성스러웠습니다. 한 가지 말을 듣기에 미쳐서는 마음속으로 깊이 들어가는 믿음이 참으로 어린애가 자애로운 어미를 만남과 같고, 충족을 구하는 성의가 참으로 기갈(飢渴)에 음식을 기다림과 같으며, 반드시 그렇게 될 기미가 참으로 나그네가 집으로 달려감과 같을 것이니, 대저 그렇게 하고 비록 군자가 되지 않고자 한들 될 수가 있겠습니까? ……다스리는 방도는 작은 일이 아닙니다. 주자(周子)가 말하기를, ‘그 마음을 성실히 할 뿐이다.’하였으니, 마음이 성실하면 어진 인재가 돕고 어진 인재가 도우면 천하가 다스려질 것입니다. 또 말하기를, ‘마음은 성실함이 요점이 된다.’고 하였으니, 아! 깊은 이치에 통달한 말이 어찌 그다지도 지극히 절실하고 지극히 요약하며, 반드시 이루는 방도가 어찌 그다지도 지극히 간략하고 지극히 쉬운지요?” 했다.

51세(1727) 졸하였다. <영조실록> 영조 3년 윤3월 기사에 졸기가 있다. “경연관 이간이 졸하였다. 임금이 예관을 보내어 치제하고 초상과 장사에 쓸 것을 넉넉하게 제급하도록 하였다. 이간은 선정신 권상하의 문인으로, 경학에 깊어 한원진과 명성이 비등하여 경연관으로 뽑혔던 것인데, 이에 이르러 졸하므로, 임금이 듣고서 놀라 애도하여 이런 명이 있은 것이다. 경연관들이 증직하는 은전을 내리기를 청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내가 산림에 있는 사람에게 비록 경연관으로 초계하게 하기는 했지만, 작록으로 묶어 놓으려고 하지 않음은 대개 그의 소원이 아닌 것을 억지로 시키면 도리어 예대하는 도리에 어그러지게 된다고 생각했다. 만일 지금 죽은 뒤에 증직한다면 생존과 사망에 따라 예로 대우하는 것을 다르게 하는 것이 되니 증직할 것 없다.’ 하고 제술관에게 명하여 제문 내용에 오늘 내린 분부로 말을 만들어 제진(製進)하도록 하였다.”

이간 사후 1777년(정조 1년) 이조참판, 성균관좨주에 추증되고 순조 때 이조판서가 증직되었다. 1810년(순조 10년) 문정(文正)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순조실록> 순조 10년 12월 기사에 시호를 내리는 내용과 더불어 평이 나온다. “이간의 호는 외암인데, 문순공 권상하를 사사하였고 학문을 많이 하고 행실이 돈독하여 큰 선비가 되었다. 영조조에 유일로써 자의를 제수하였으나 나오지 않았다. 남당 한원진과 함께 동문수학하였는데, 본연지성(本然之性)과 기질지성(氣質之性)에 대해 서신을 왕복하여 논변하다가 마침내 대립하기에 이르러 호학(湖學)과 낙학(洛學)이란 이름이 있게 되었다. 이간을 받드는 자를 낙학이라 하고 한원진을 받드는 자를 호학이라고 하였다.”

이간은 한원진과 더불어 호락논쟁의 맹장이다. 조선조 성리학은 중기를 고비로 사단칠정(四端七情)에 대한 이황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과 이이의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의 대립 이후 치열한 논변이 벌어졌다. 중기에 접어들면서 한동안 잠잠했던 사단칠정 논변이 주리(主理)와 주기(主氣)의 논변으로 이행됨으로써 성리학의 불꽃이 재연되었다. 그것은 주기적인 이이 계통의 기호학파(畿湖學派) 안에서 다시 주리와 주기로 대립하여 논쟁이 일어난 것이다. 이것이 권상하의 문하에서 야기된 이른바 호락논쟁(湖洛論爭)이다.

논쟁은 처음에는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의 오상(五常)을 금수(禽獸)도 가지느냐 못 가지느냐 하는 오상편전론(五常偏全論)과 사람의 희노애락(喜怒哀樂)의 정(情)이 발동하지 아니하였을 때[未發]의 상태, 심체(心體)에 기질(氣質)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미발심체순선론과 미발기질지성유선악론으로 대립이 생겼다. 본격적인 논쟁은 권상하 문하의 이간과 한원진 사이에서 시작되었다. 권상하가 한원진의 설에 찬동하자 이것이 점차 확대되어 전국의 석학들의 관심거리가 되었다.

이간의 설을 지지하는 이재(李縡), 박필주(朴弼周), 어유봉(魚有鳳) 등의 낙하(洛下: 서울) 학자들은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은 다 같이 오상을 가진다는 인물성구동론(人物性俱同論)과 미발한 마음의 본체는 기질의 선악이 없으므로 본래선(本來善)이라 하여 미발심체본선론(未發心體本善論)을 주장하였다. 이것을 낙론(洛論) 또는 낙학(洛學)이라 부르게 되었다. 비록 이간은 호서, 즉 충청도에 살았지만 이간의 설을 지지하는 학자들은 낙하, 즉 경기도와 서울에 많이 있었으므로 낙학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원진의 설을 찬동하는 권상하, 윤봉구(尹鳳九), 최징후(崔徵厚), 채지홍(蔡之洪) 등의 호서학자(湖西學者)들은 인성은 오상을 가지지만 물성은 그 오상을 모두 가지지는 못한다면서 인성과 물성은 서로 다르다는 인물성상이론(人物性相異論)과 미발한 마음의 본체에도 기질의 선악이 있다는 미발심체유선악론(未發心體有善惡論)을 역설하였다. 이것을 호론(湖論) 또는 호학(湖學)이라 부르게 되었다.

호락론자들은 이이 계통의 기호학파에 속하므로 이이의 이통기국설(理通氣局說)을 철칙으로 신봉하였다. 이통기국설은 주희(朱熹)의 이동기이설(理同氣異說)에서 유래한다. ‘이통(理通)’이란 이는 인(人)과 물(物)에 공통적·보편적인 것으로서 동일하게 상통한다는 것이고, ‘기국(氣局)’의 기는 인과 물에 국한적·특수적인 것으로서 상이하다는 것이다.

이간은 주리적 입장에 서서 이통과 이동(理同)을 내세움으로써 인성과 물성을 구동(俱同)으로 보아 한 가지로 오상을 가진다는 동시오상의 논리로써 그의 철학 체계를 일관시켰다. 이에 대해 한원진은 주기적 관점에서 기국과 기이(氣異)를 강조함으로써 인성과 물성을 상이한 것으로 보며, 그것은 기질의 차이로 말미암은 것이라 주장하여 인기(因氣)의 논리로써 그의 철학 체계를 세웠다.

이간은 성(性)은 곧 이(理)이므로 인성과 물성은 모두 이로서의 태극(太極), 천명(天命)의 원형이정(元亨利貞), 사덕(四德)을 본성으로 품수함으로 말미암아 오상의 본연(本然)을 구유하므로 그들 본성은 이통으로 동시오상이라고 보았다. 다만 인성과 물성이 상이한 것 같이 보이는 것은 그들 기질의 국한성, 즉 차이에 따라서 상이하게 드러날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인과 물의 본성, 즉 본연지성(本然之性)은 동시오상으로서 구동이요, 또 사람의 미발심체는 본선이라는 것이다. 이는 홍대용(洪大容) 등 북학파에게 이어져 전통적 화이론(華夷論)의 극복에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한원진은 인성과 물성은 각기 그 기질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으로 상이한 것이며 그 기질지성(氣質之性)이 각기 인과 물의 본연지성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인물의 본성 즉 그 기질지성은 인기질(因氣質)로서 상이하다. 따라서 사람의 미발심체도 기질지성으로서 선과 악이 공재한다는 유선악론을 주장하였다.

이 호락논쟁은 이간 이후 오래도록 계속되었지만 끝내 귀결을 보지 못하고 말았다. 그러나 여기에서 제기되었던 여러 가지 문제들은 성리학의 근본 문제들이었고, 또 그 근본 문제를 해결하려는 철학적 방법론이 뚜렷이 드러나고 있는 것 등은 매우 주목할 만하다.

 

참고문헌
<국역 조선왕조실록>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