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원(吳瑗, 1700-1740)


오원(吳瑗, 1700-1740)                                          PDF Download

 

재(李縡)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스승 이재는 낙론의 거두인 김창협의 수제자로 1725년 영조가 즉위한 뒤 부제학에 복직해 대제학, 이조참판을 거쳐 이듬해 대제학에 재임되었다. 그러다가 1727년 정미환국으로 소론 중심의 정국이 되자 문외출송(門外黜送 : 서울 성문 밖으로 쫓겨남)되었으며, 이후 용인의 한천(寒泉)에 거주하면서 많은 학자를 길러냈다. 1740년 공조판서, 1741년 좌참찬 겸 예문관제학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직하였다. 영조의 탕평책을 부정한 노론 가운데 준론(峻論)의 대표적 인물로, 윤봉구(尹鳳九), 송명흠(宋命欽), 김양행(金亮行) 등과 함께 당시의 정국 전개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본관은 해주(海州)로 자는 백옥(伯玉)이고 호는 월곡(月谷)이다. 할아버지는 오두인(吳斗寅)이고, 아버지는 오진주(吳晋周)이다. 어머니는 예조판서 김창협(金昌協)의 딸로 이재와는 처질(처조카) 간이다. 오태주(吳泰周)에게 입양되었다.

조부 오두인은 1648년(인조 26)에 진사시에 1등으로 합격하고 이듬해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효종조에 지평(持平)을 거쳐 장령(掌令) 헌납(獻納), 사간이 되었다. 정조사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고 부교리(副校理), 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숙종조에는 공조참판으로서 사은부사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와 이듬해 호조참판이 되고 경기도관찰사를 거쳐 다음해 공조판서에 올랐다. 1689년 형조판서로 재직중 기사환국으로 서인이 실각하자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에 세 번이나 임명되고도 나가지 아니하여 삭직 당하였다. 이해 사직(司直)을 지내고, 5월에 인현왕후 민씨(仁顯王后閔氏)가 폐위되자 이세화(李世華), 박태보(朴泰輔)와 함께 이에 반대하는 소를 올려 국문을 받고 의주로 유배 도중 파주에서 죽었는데 그 해에 복관되었다. 1694년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국조인물고⌋에 실린 김창협이 쓴 비명에 이렇게 적혀있다.

“금상(今上) 15년 기사년(己巳年, 1689년 숙종 15년)에 중궁(中宮, 인현 왕후(仁顯王后) 민씨)이 손위(遜位)하니, 판서(判書) 양곡(陽谷) 오두인(吳斗寅)공이 참판(參判) 이세화(李世華)공과 응교(應敎) 박태보(朴泰輔)공 등 80여 인과 더불어 대궐에 나아가 상서(上書)하여 극간(極諫)하였는데, 오공이 기실 수장이었다.”

김창협의 셋째 딸이 오원의 생부인 오진주에게 시집을 갔으니, 오두인과 김창협은 사돈 간이다.

부친 오진주는 1714년(숙종 40) 갑오(甲午) 증광시(增廣試)에 생원(生員) 3등으로 급제하였으며 문학(文學)으로 이름이 났다. 진사(進士)로 나아가 관직이 군수(郡守)에 이르렀다. 형제로는 여흥 민씨 소생의 오관주(吳觀周), 원주 김씨 소생의 오정주(吳鼎周), 상주 황씨 소생인 오태주(吳泰周), 오이주(吳履周)가 있다. 오진주는 오태주의 동생이다.

오태주는 12세인 1679년(숙종 5) 현종의 딸인 명안공주(明安公主)와 혼인하여 해창위(海昌尉)에 봉해졌고 명덕대부(明德大夫)의 위계를 받았다. 숙종은 누이동생인 명안공주를 지극히 사랑하여 청나라에서 고급 비단이 들어오면 후궁보다 명안공주에게 먼저 보냈고, 공주의 거처인 명안궁을 전례가 없는 1,826칸의 대규모로 지어주었다. 1687년(숙종 13) 젊은 나이에 사망하였는데, 공주가 갑자기 사망하자 숙종이 매우 슬퍼하여 소복 복장에 머리를 풀고 10일간이나 육식을 금하였다고 전한다. 오태주가 후사가 없게 되자 오원이 오태주에게 입양되었다. ⌈영조실록⌋에 오원에 관한 기사 중 ‘명안 공주(明安公主)의 아들이다’라는 내용은 바로 여기서 연유한다.

오태주는 1723년(경종 3) 사마시에 합격하고 1728년(영조 4) 정시문과에 장원하여 문명(文名)이 높았다. 사서(司書)로 있을 때 영조에게 학문과 덕을 닦는 요령을 진언(進言)하여 받아들이게 하였고 직언을 잘 하기로 이름이 났다.

1729년 정언으로 있으면서 탕평책을 적극 반대하다가 한때 삭직되었다. 1732년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왔고 이어 교리(校理), 검토관(檢討官), 이조좌랑, 응교(應敎) 등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1736년 참찬관(參贊官)으로 민형수(閔亨洙)를 신구(伸救)하려다가 또 파직되었으나 곧 다시 기용되어 1739년 부제학(副提學)이 되고 승지, 공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영조실록⌋ 16년에 오원의 졸기가 실려 있다.

“공조 판서 오원(吳瑗)이 졸(卒)하였다. 오원은 충정공(忠貞公) 오두인(吳斗寅)의 손자인데, 일찍이 갑과(甲科)에 급제하여 문학(文學)으로 이름이 났고 벼슬은 대제학에 이르렀다. 사람됨이 깨끗하여 욕심이 없고 소탈하였으므로 꾸미는 것을 일삼지 않았는데, 졸(卒)할 때 나이 41세였다. 임금이 나라를 위한 일편단심이 있는데도 일찍 죽은 것을 애석히 여겨 차탄하고 애도하였으며, 시호를 내리라고 명하였다.”

성품은 정직하고 성실하면서 온후(溫厚)하였으며 총명함이 남보다 훨씬 뛰어나고 문장 또한 깨끗한 절개를 지녔다 하여 진정한 유신(儒臣)이라는 평을 들었다.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목(文穆)이다.

저서로는 『월곡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