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문일(朴文一, 1822-1894)


박문일(朴文一, 1822-1894)                                 PDF Download

 

박문일은 본관이 밀양(密陽)이고 자는 대수(大殊), 호는 운암(雲菴)·운재(雲齋)·징암(懲菴) 등이다. 평안도 태천(泰川)출신으로 박도정(朴道精)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안동김씨(安東金氏)로 통정대부 김태려(金泰呂)의 딸이다. 이항로(李恒老)의 문인으로 관서지방에서 많은 제자들을 길렀는데 박은식(朴殷植, 1859-1925), 전병훈(全秉薰, 1857-1927) 등의 스승이다. 박문호(朴文五)가 동생이다.

스승 이항로는 경기도 양평 출신으로 3세 때 『천자문』을 떼고, 6세 때 『십구사략(十九史略)』을 읽고 「천황지황변(天皇地皇辨)」을 지었다. 12세 때 신기령(辛耆寧)에게서 『서전(書傳)』을 배웠다. 1808년(순조 8) 반시(泮試: 한성초시)에 합격했지만 당시 권력층 고관이 과거급제를 구실로 자기 자식과 교유하며 지낼 것을 종용했는데, 이에 격분하여 과장 출입마저 수치스럽다 하여 끝내 과거에 응하지 않았다.

이항로의 이기론(理氣論)은 주리(主理)적 철학 입장을 고수하여 이(理)와 기(氣)는 대등한 개념으로 볼 수 없다고 했다. 이(理)를 중요시하는 주리설(主理說)은 객관적 측면에서 보자면 논리적 약점을 피할 수 없지만 당시 내우외환의 상황에서 순선(純善)을 지향하고 대의(大義)를 실천하는 이론적 근거가 되었다. 영남의 이진상(李震相), 호남의 기정진(奇正鎭)과 더불어 한말 주리철학(主理哲學) 3대가로 일컬어졌다.

이항로는 주리철학의 대가일 뿐만 아니라 한말(韓末) 위정척사(衛正斥邪) 의리론(義理論)의 대표자로서 일본과 서양의 침략에 대한 민족적 저항의식의 선봉이 되었다. 문하(門下)에서 척사위정(斥邪爲正)과 창의호국(倡義護國)의 중심인물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그중 박문일과 그의 동생 박문오는 관서지방을 대표하는 유학자로 화서학파가 관서지방에 뿌리를 내리는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박은식(朴殷植)은 1884년(26세)에 영변의 산중 생활을 마치고 평안북도 태천에서 제자를 기르고 있던 박문일 (朴文一)과 그의 아우 박문오(朴文五)를 찾아뵙고 가르침을 받는다.

박은식은 박문일과 박문오 형제로부터 주자학을 체계 있게 배웠다. 박문일은 뒷날 자신의 저서 ⌈운암집⌋에서 박은식을 평하여

“세상에서 문장을 논한다면 반드시 박은식을 손꼽는다.”

라고 하였다.

 

박은식이 청년기에 수학한 계보를 세 갈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가학으로 부친 박용호로부터 주자학과 과거를 위한 시부(詩賦)를 배운 것이다. 박은식은 이 때 주자를 존숭했으며 또한 초학인 만큼 그 영향도 가장 컸다고 볼 수 있다. 정통파 주자학도로서 교육받으면서 주자학도로서 자기를 정립하기 시작하였다.

둘째는 다산 정약용의 실학을 수학한 것이다. 이는 주자학도로서의 박은식의 사상체계 안에 주자학을 내재적으로 비판할 수 있는 맹아를 심어 놓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셋째는 박문일의 문하에서 주자학을 더욱 깊이 본격적으로 수학한 것이다. 당시 관서의 큰 학자인 박문일의 문하에서 주자학을 더욱 체계적으로 깊이 있게 수학함으로써 조선 성리학의 계통을 제대로 전수받게 된다.

 

전병훈(全秉薰)은 본관이 정선(旌善)이고 평안북도 출신으로 고종 29년(1892)에 의금부 도사, 대한제국 광무 3년(1899)에 중추원 의관을 지냈다. 순종이 즉위하던 해(1907)에 관직을 버리고 중국 광동으로 건너가 정신연구에 몰두하였다. 10년 동안 도교의 수련과 ⌈도장(道藏)⌋을 연구한 다음 61세 때 도를 체득하여 북경에 정신철학사를 세우고 활동하였다. 북경에서 활동하면서 우남전(于藍田), 서변선유사(西邊宣諭使)인 정몽찰(丁夢刹), 육군중장인 강수기(江壽琪) 등을 제자로 삼았다.

자는 서우(曙宇), 호는 성암(成菴) 외에도 취당(醉堂)이 있으며 도호는 현빈도인(玄牝道人)이다. 서우란 ‘우주 안의 새로 열리는 서광(宇內之新開曙光)’이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1920년에 저서 정신철학통편(精神哲學通編)이 북경에서 출간되었다

정신철학통편(精神哲學通編)은 6권 2책을 되어 있으며 속 표제는 ‘정신심리도덕정치철학통편(精神心理道德政治哲學通編)’으로 되어 있다. 권1 정신철학통편, 권2 심리철학, 권3·4 도덕철학, 권5·6 정치철학의 순이다.

책머리에 엄복(嚴復)·강유위(康有爲) 등 당대 중국 사상계의 원로들과 전 양광총독(前兩光總督) 장준(張駿) 등 한림 출신 명사들이 이 책에 대한 논평을 싣고 있음을 볼 때 전병훈의 활동 영역과 비중을 엿볼 수 있다.

이 책에서 유교·불교·도교의 전통사상과 서양철학을 종합하여 동서고금을 관통하는 새로운 통합사상체계를 제시하고 있다. 첫머리에 실린 <단군천부경주해>는 전병훈이 추구하는 통합의 중심이 한국인의 민족종교적 심성임을 보이고 있다.

소크라테스·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 등 서양 고대철학자에서부터 데카르트·칸트·몽테스키외·아담 스미스 등 근대사상가에 이르기까지 서양사상을 긍정적으로 섭취하였고 특히 칸트의 <세계정부론>과 <영구평화론>을 극찬한다.

전병훈 자신도 <세계일통공화정부헌법9조>를 제시하면서 파리강화회의와 함께 고조된 세계평화 문제에 대한 관심을 반영하고 있다. 이 책은 한국 근대사상사에서 매우 특징 있는 저술로서, 종교학·철학·심리학·윤리학·정치학 등 여러 학문 분야에 걸쳐 근대 상황에 직면하여 전통적 통합논리를 제시하고자 한 저술이다.

후에 박문일은 1866년(고종 3) 사복시주부(司僕寺注簿)·평안도도사(平安道都事)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취임하지 않았으며, 1882년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 등의 직이 내려졌으나 모두 사퇴하였다.

전통적 유학자로 오직 도학에 전념하면서 후진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자주 서울에 출입하였으나 권문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1866년 병인양요 때는 말 한필로 상경하여 당시 실권자였던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과 더불어 나랏일을 걱정하기도 한 기개가 있었다.

1882년 요동(遼東)에 전쟁의 화기(禍機: 재변이 드러나지 않고 잠겨있는 기틀)가 박두할 기색이 있자 고향인 태천에 사창(社倉)을 설치하게 하고 병기를 갖추어 동태를 살피게 하였다. 같은 문인인 김평묵(金平默)·유중교(柳重敎)·최익현(崔益鉉)과 교분이 두터워 경전에 관한 문답의 서신내왕이 많았으며, 임헌회(任憲晦)와는 이기설(理氣說)에 관한 의견교환을 많이 하였다. 사서에 대한 해석인 「경의해(經義解)」를 잡저로 남겼으며, 저서로는 『운암집(雲菴集)』 12책이 있다.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참고문헌>

위키백과
신용하, ⌈박은식의 사회사상연구
한국민족문화대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