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문(李秉文, 1826-1888)


이병문(李秉文, 1826-1888)                                 PDF Download

 

이병문은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자는 덕여(德汝)다. 이장현(李章顯)의 손자이며 이헌도(李憲度)의 아들로 좌의정 이헌구(李憲球)에게 입양되었다. 외할아버지는 김복순(金復淳)이다.

외할아버지 김복순은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숙종 때 영의정을 지낸 김창집(金昌集)의 4세손이자 부사를 지낸 김이중(金履中)의 아들이다. 조선 후기의 권문세가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기틀을 다진 김조순(金祖淳)과 친형제간이다. 여러 관직을 거쳐 황주목사, 광주목사를 지냈다. 사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부친 이헌구는 1816년(순조 16)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829년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으며 그 뒤 성균관대사성·이조참의를 역임하고, 1836년(헌종 2)에 이조참판에 올랐다. 이듬해 전라도관찰사에 임명되고, 1841년 한성부판윤·공조판서·대사헌을, 이듬해 형조판서·예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844년 사헌부대사헌으로 김유근(金逌根)·김홍근(金弘根)의 추죄를 주장하다가 덕원부에 유배, 이듬해 석방되어 사은 겸 동지정사로서 청나라에 다녀왔다.

 

1847년 형조판서·대사헌·한성부판윤을 역임하고, 1849년(철종 즉위년) 이조판서, 이듬해 예조판서·판의금부사를 역임하였으며, 1852년 우의정에 올랐다. 그 때 나이 69세로 치사(致仕)하기를 연이어 간청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으며 바로 좌의정이 되었다. 고령에도 불구하고 판중추부사·광주유수(廣州留守)를 역임하는 등 치정(治政)에 힘썼다. 70세가 되어 국가로부터 궤장(几杖)을 수여받고 기로소에 들어갔다.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청검(淸儉)하며 근면하기로 이름났다.

이병문은 1848년(헌종 14) 5월 증광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관직에 나아갔다. 1864년(고종 1) 충청도감사를 지내고 1867년에 이조참판이 되었다. 같은 해 9월에 예방승지를 거쳐 1870년 대사헌에 올랐다. 1874년에는 도총부도총관이 되었고 그해 12월에 형조판서에 승진되었다. 이듬해 4월에 진위 겸 진향정사(陳慰兼進香正使)로 부사 조인희(趙寅熙), 서장관 정원화(鄭元和)와 함께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지의금부사·한성부판윤을 역임하고, 1876년 재차 대사헌이 되었다. 이듬해에 『선원보(璿源譜)』 수정에 감인위원(監印委員)으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1879년 다시 형조판서·예조판서·한성부판윤을 역임하고, 이듬해에 의정부우참찬·광주부유수(廣州府留守)를 거쳐 그해 12월 외직인 전라도관찰사가 되었다.

2년의 임기를 마친 뒤 1882년에 예조판서가 되었으나, 이듬해 전라도관찰사 재직 시의 장물을 취득한 일로 인하여 원악도(遠惡島)에 위리안치(圍籬安置)의 형을 받아 고금도에 유폐되었다가 1884년 2월에 향리로 돌아왔고, 그해 말에 풀려났다.

 

1885년에 복직이 되어 예조판서에 임명되었으며, 이해에 다시 판의금부사가 되었다가 그해 5월 이조판서가 되었다. 그 뒤 판의금부사·이조판서를 거쳐 그 해 10월 판돈녕부사가 되었고, 1886년 약원제조(藥院提調)를 지내고 1888년에 의정부좌참찬·판의금부사·판돈녕부사를 역임하였다. 시호는 효정(孝靖)이다.

 

<참고문헌>

국역조선왕조실록
한국민족문화대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