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의(愼爾儀, 1685-1756)


신이의(愼爾儀, 1685-1756)                                  PDF Download

 

이의는 자가 가상(可象)이고 호는 취촌(醉村) 또는 명발와(明發窩)이다. 본관은 거창(居昌)이다. 부친은 신제윤(愼齊尹)이다. 어려서는 큰아버지인 신후윤(愼後尹)에게 수학하여 시에 능하였으며, 여러 번 향시에 합격하였다. 이재(李縡)의 문인이다.

신이가 학문의 기틀을 잡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준 이는 큰아버지인 대곡(大谷) 신후윤인데, 신후윤의 스승이 타우(打愚) 이상(李翔, 1620-1690)이다. 이상은 송시열(宋時烈)의 제자로서 김집(金集)의 학통을 이어받았다. 이상은 1658년(효종 9) 박세채(朴世采)·윤증(尹拯)과 함께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자의에 임명된 뒤, 산림직(山林職) 진선을 역임하였으며, 1661년(현종 2) 이후 지평을 비롯한 장령·집의 등의 사헌부 관직을 맡기도 하였다.

현종 말년의 예송(禮訟)에서 남인인 허적(許積)을 탄핵하다가 실세하였으나, 1680년(숙종 6)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집권하자 김수항(金壽恒)의 천거로 재등용되어 1681년에 사업이 되고, 형조참의·우윤·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다. 1688년 이조참판으로 있을 때 사건에 연루되어 처벌받고, 기사환국으로 서인이 실세한 뒤인 1690년 옥사하였다.

이상이 신후윤에게 보낸 편지 중에,

“동로(東老, 신후윤)처럼 출중한 능력으로 출사하지 않고 시골 사람 살림살이를 하고 있으니 무척 안타깝기도 하다. 그러나 내가 허명을 얻어서 출사하여 당화(黨禍)를 당하고 있는 것은 그대에게 좋은 경계가 되길 바라네.”

라는 내용이 나온다. 신후윤은 이상의 고족으로 큰 기대를 받았다.

신이의는 30세에 어머니 상을 당하여 극진한 정성을 다하였고, 그 후 이재의 문하에서 학문에 정진하였다. 이재가 큰 기대를 하면서 궁리거경(竆理居敬)의 요체를 지도하였다. 56세에 부친상을 당하여 역시 극진히 정성을 다했다. 이후로 환로에 대한 소망을 완전히 접고 오로지 학문에만 매진하였다. 명발와(明發窩)라는 호는 이재가 신이의를 위해 지어준 호이다.

60세가 다 되어서도 스승 이재로부터 서명(西銘)과 태극도설 등의 가르침을 받았다. 신이의가 예기에는 60세가 되면 가르침을 직접 받지 않는다고는 하지만 아침에 도를 얻으면 저녁에 죽어도 여한이 없는데 나이 들어 가르침을 받는 것이 무슨 부끄러운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이재 또한 공의 정신이 가상하다고 칭찬하였는데, 이는 마치 우암 송시열이 그의 제자인 타로 이상에게 기대했던 것처럼 이재가 공에게 기대한 것이다.

이재가 죽자 3년간 심상(心喪)을 행하였다. 1751년(영조 27) 학행(學行)으로 선공감감역(繕工監監役)에 천거,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그 해 가을에 세자익위사시직(世子翊衛司侍直)에 제수되자

“일흔 넘어 첫 벼슬이지만 원량(元良: 왕세자) 한번 뵙는 것이 소원이었다.”

하고 벼슬에 나아가, 왕세자에게 『서경』을 진강(進講)하고, 하도(河圖)와 낙서(洛書)의 뜻을 상설하여 세자의 칭찬을 받았다.

강을 마치고 나면 세자의 공부가 어느 정도인지를 기록하여 부왕이 친람하도록 하였는데, 통례상 가급적 잘했다고 기록했었다. 그러나 신수의는 ‘천지의 도리는 공명정대하다. 어떻게 왕을 속일 수 있겠는가’ 하면서 사실대로 성적을 매겼기 때문에 세자가 무척 싫어했다. 이에 맡은 바 소임을 마무리하고 물러나왔다.

공 다음으로 진강한 이강중(李剛中)이 우리라면 도저히 공처럼 사실대로 말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탄식하면서 그 확고하고 분명한 태도를 높이 평가했다.

공은 이제 소원을 풀었으니 돌아가야지 하고 전혀 개의치 않았다. 임종에 즈음하여 효제근신독서궁리(孝悌謹愼讀書竆理)로 유서하였다.

공은 ⌈심경⌋,⌈근사록⌋,⌈가례⌋등에 정통하고 역학에 특히 조예가 깊었다. 소학은 평생 몸으로 실천했다. 경(敬)을 학문의 요체로 삼았다.

“정자 때에는 ⌈소학⌋에 전주(傳注)가 없었는데, 정자가 경을 보충하였다. 이 경은 주자가 요체로 설명한 것이니, 주자가 ⌈소학⌋을 집주한 것은 다름 아닌 정자의 경이다. 따라서 경이야 말로 상하좌우전후를 관통하는 가장 긴용한 공부다”

라고 했다.

심성론에 있어서는 남당 한원진이 주장한 “인물은 각각의 본연이 있다(人物各本然)”, 미발에 선악이 공존한다(未發前淑慝), 명덕은 분수가 있다(明德有分數)의 설에 대해 체계적인 비판을 가한다. 또한 한원진의 인물성이론을 옹호한 병계(屛溪) 윤병구(尹鳳九)와도 변론하였다.
<참고문헌>
이상(李翔), 타우유고(打愚遺稿)
임헌회(任憲晦), 『고산집(鼓山集)』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