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윗사람에게 공손하지 않을 때


아이가 윗사람에게 공손하지 않을 때

 

싸가지 없는 놈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흔히
“이런? 싸가지 없는 놈!”
이라고 상스럽게 내뱉거나 아니면 마음속에서라도 이렇게 말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이 말은 대개 젊은 사람이나 아이가 어른에게 공손하지 못한 말이나 행동을 했을 때 비속어로서 사용된다. 이런 말을 듣는 젊은이나 아이는 어른한테 대들지는 못하고 아마도 마음속으로 불쾌하게 여기면서
‘왜 아랫사람들만 어른에게 공손해야 하는가?’
‘어른들은 아랫사람들에게 공손하면 안 되나?’
‘나이가 무슨 벼슬인가? 나이 값을 해야 어른이지.’
라는 따위의 불만을 터뜨릴 수 있다. 대들지 않고 이렇게 생각만 해도 양반이다. 요즘은 젊은이에게 그렇게 말했다간 봉변당하기 일쑤다.
이런 사례는 찾아보면 엄청 많다. 학교현장에서 교사가 학생을 때려서 폭력 시비가 생기는 일 가운데도 이런 일이 많다. 학생의 언행이 불손하여 분노를 참지 못한 교사가 욱하는 마음에서 순간적으로 저도 모르게 나오는 폭력이 그런 예이다. 아마 모르긴 해도 가정에서도 부모가 돌발적으로 아이들 때리는 경우에도 이것과 관련이 꽤 있다. 그 밖의 학교의 선후배 사이, 군대 내 선임자와 후임자 사이, 직장의 상사와 부하 사이, 한 마을 안에서, 무릇 인간 사회가 존재하는 곳에서는 이런 나이나 경력을 가지고 따지는 서열의식 내지 질서의식이 있다.

젊은 사람들은 젊기 때문에 그런 점에 대해서 불만을 갖고 있다가도, 정작 자신이 어른이 되거나 선배가 되었을 때는 아랫사람들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
“요즘 것들 참 싸가지가 없어.”
라고 내뱉는다.
선생이 살았을 조선사회에도 이러한 질서의식이 사회의 규칙으로서 자리 잡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선생은 이렇게 경계시켰다.

〔3〕형이나 어른을 공경하지 않고, 화낸 듯이 사납게 말하는 것 (不敬兄長, 發言暴勃)
어른 공경과 효제

그런데 어른들은 아이들의 불손한 태도에 왜 화를 낼까? 교사나 부모에게 불손하게 대드는 아이를 보고 불문곡직하고 화를 낼 수밖에 없는 정서는 어디서 기원하고 있을까? 앞의 선생의 말을 가지고 볼 때 전통에서 기원하고 있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그것은 전통에서 연장자를 공경하는 풍습과 관련이 있고, 가족 내에서 부형(父兄)을 공경해야 한다는 유교적 윤리와도 관련이 있다.
그런데 어른을 공경하는 것은 이해가 되는데, 형을 공경하라는 말은 요즘 사람들의 정서로 볼 때 전혀 이해하기 어려울 듯하다. 옛날에는 조혼의 풍습이 강했기 때문에 생식 능력만 있으면 대체로 일찍 혼인을 시켰다. 그러다 보니 형제 사이 나이 차이가 크게 났다. 큰 형과 막내 동생의 나이 차이는 무려 스무 살 이상 차이가 나서, 큰 형은 막내에게 거의 부모와 같은 위치에 놓이게 된다. 게다가 부모가 일찍 죽으면 어린 동생들은 형의 보호를 받고 자라게 된다. 그런 시대적 배경에서 보면 형을 부모처럼 공경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되었다. 먹여주고 키워주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유교는 부모 공경의 효도와 함께 형을 공경하는 효제(孝弟 또는 孝悌)를 강조해 왔다.

선생도 『격몽요결』에서 이렇게 말한다.

사람을 대할 때는 온화하고 공경해야 하니, 나보다 나이가 갑절이 많으면 아버지처럼 섬기고, 10살이 많으면 형처럼 섬기고, 5살이 많으면 약간 공경해야 한다(「접인장」).

이렇게 나이를 기준으로 공경의 정도를 말하고 있다. 더 나아가 읍(揖)하고 절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나이를 가지고 말하고 있다.

아버지의 친구이면 절해야 하고, 동네에서 15살 이상이면 절해야 한다. 벼슬이 당상관이고 나보다 10살 이상이면 절해야 하고, 같은 고장 사람으로서 20살 이상이면 절을 해야 한다(「접인장」).

선생이 참고했을 법한 주자의 『동몽수지(童蒙須知)』에서도 이런 사례가 등장한다.

자식과 동생들은 항상 말소리를 낮추고 흥분을 가라앉혀서 상세하고 천천히 말해야지, 고상한 말을 시끄럽게 떠들거나 뜬소문 같은 말을 장난치듯이 말해서는 안 된다. 고개를 숙이고 윗사람이 하는 말을 경청해야지 망령되이 그들과 크게 논의해서는 안 된다.

여기서 말하는 논의(論議)는 요즘말로 토론에 가까울 것 같다. 어떤 일에 대한 시비나 미추 따위를 웃어른과 함께 따져서는 안 된다는 의미로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자식과 동생을 대상으로 한 말이므로 부모나 형에 대해서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말로 보인다.

왜 어른을 공경해야 할까?

그렇다면 왜 젊거나 나이 어린 사람들은 윗사람들에게 공손해야 할까? 거기에는 설득력 있고 타당한 논리가 있어야 한다. 앞에서 부모나 형을 공경해야 하는 문제는 어느 정도 해소가 된 것 같다. 철학적 문제를 떠나 윤리적 의무라는 가치에서 볼 때 세대 간 상부상조의 관점에서 설득력이 있다. 그런데 나와 특별히 상관이 없는 남을 특별히 나이가 많다고 공경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런 문제를 밝히려면 꽤 많은 지면이 요구된다. 그래서 좀 거칠지만 알기 쉽게 말하면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특히 공자와 맹자의 유학이 태동하게 된 것도 춘추전국시대라는 사회의 혼란함이 그 배경을 이루고 있다. 물론 그 혼란함은 사회 전체에 걸쳐 있었지만, 치자의 논리를 강조한 유교의 입장에서는 제후나 대부들의 행태를 두고 논의한 것이 많다. 곧 자식이 아버지를 시해하거나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능멸하는 하극상, 곧 지도층의 비도덕적 행위가 사회를 혼란시킨다고 보았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효도나 효제, 그리고 장유유서 등의 오륜이 중시될 수밖에 없었다.

조선사회 또한 사대부가 지배하던 사회였으니 이에 더하여 그러한 윤리가 더욱 고착화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전통시대의 산업은 농업이었으므로 인구의 이동이 거의 고착화된 향리와 씨족 중심의 공동사회였기 때문에 이런 윤리가 더욱 필요했을 것이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나이가 기준이 되었고, 그것이 풍습이 되어 지금까지 남아있다. 그 때문에 아랫사람이 버릇이 없을 때 윗사람으로서 견디기 힘들 정도로 모멸감을 느낀다.

서열의식

그렇다면 이런 장유유서나 나이를 가지고 서열을 매기는 것이 유교만의 잔재일까? 유교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은 숙고 없이 습관적으로 그렇다고 한다. 자칭 진보라고 자부하는 인사들 가운데서도 우리 사회의 부정적인 병폐의 대부분이 유교 때문이라고 말할 때가 더러 있다. 어느 문명권을 막론하고 전근대인 시대와 사회를 거쳐 왔고, 거기에는 비판받아야 할 모습들이 있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이점은 유교 또한 마찬가지다. 필자는 여기서 유교가 무조건 좋은 것이라고 숭상하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반면에 자신의 전통을 곡해하거나 폄훼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어느 문명이고 다 장단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장유유서랄까 아니면 나이를 기준으로 공경을 해야 한다는 점이 꼭 유교에만 있는지 따져 볼 필요는 있겠다. 일찍이 나이 곧 연치(年齒)를 기준으로 남을 높이는 문제는 『예기』나 『맹자』 등에 보인다. 특히 『맹자』에는 벼슬과 나이와 덕을 가지고 높이는 문제를 다루었는데, 마을에서는 나이가 기준이 된다는 말에 등장한다. 여기서 나이를 가지고 사람을 높이는 기준을 마을에서 적용한 것은 대단히 자연스러운 것이며 자연 발생적이다. 아마도 씨족 중심인 마을이라면 자연이 나이 많은 사람이 부모나 형뻘 되는 사람이니 공경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자연발생적이란 말에 좀 더 신경을 써보자. 이런 서열은 동물사이에서도 존재한다. 동물의 서열은 대개 힘센 놈이 기준이 된다. 어찌 보면 나이를 기준으로 삼는 것은 그래도 가장 인간적이다. 모르긴 해도 아마 나이로 따지기 이전엔 힘이나 외모 또는 어떤 능력을 가지고 했을지도 모른다.
필자는 이렇게 나이 곧 연도순이 서열의식으로서 어떤 조직이나 직장에서 그것으로 자연히 연결되었다고 본다. 이른바 군대에서는 병사끼리의 ‘짠밥’ 순, 학교에서는 먼저 입학한 순, 회사에서는 입사한 연도 순, 공무원의 호봉도 근속연수 순 등이 그것이다. 그러니까 나이를 가지고 인위적으로 서열을 결정한 것은 아니지만 자연스럽게 고착화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현상을 굳이 우리문화에는 있는 것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세계 어느 곳이든 이와 비슷한 현상이 있을 것이다.

나이가 무슨 벼슬인가?

그렇다고 해서 나이만 가지고 기준으로 삼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더구나 나이만 가지고 높여야 한다면 나이가 적은 사람은 나이가 많은 사람에게 한 번도 공경을 받을 수 없다. 비록 나이로 공경의 기준을 삼은 것은 전통사회에서 최소한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장치로 인정하더라도 나이만으로 그것을 결정하면 상당히 억울한 문제가 생긴다. 다시 말하면 어떤 덕(德)이나 능력(能力)이 공경 받는 경우도 있다. 앞의 『맹자』에서 덕으로 공경 받는 사례가 그것이다.

필자가 볼 때 비록 나이가 상대적으로 어려도 어떤 덕이나 높은 학문 때문에 나이 많은 사람으로부터 공경 받는 경우가 과거에 더러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 분이 어디에 행차할 때 공경하는 마음에서 흠모하여 남녀노소 막론하고 그를 보고자 몰려들었다는 기록도 있다. 그러니까 무조건 나이만 기준이 되었던 것은 아니다.
그래도 뭔가 찜찜하다. 높은 덕이나 능력이 없는 사람은 공경을 받을 수 없는가? 더 나아가 공경 받을 만큼의 인격도 부족하고 나이만 많다고 꼭 공경해야 하는가? 현대인들에게는 이건 정말 납득시키기 어려운 문제이다. 심지어 부모라 할지라도 공경할 만한 점이 없으면 공경하지 않는 것이 요즘 세태가 아닌가? 그래서 아이들은
“나이 값을 해야 공경하지.”
라고 말하든지 생각할 것 같다.
바로 여기서 유교적 장유유서나 연장자를 공경하는 유교적 윤리에 대한 재해석과 새로운 적용이 필요하다. 이것은 유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의 몫이다. 옛날에 이랬으니 성인이 그렇게 했으니 무조건 따르라는 식의 방식은 이제 먹히지 않는다. 새로운 대안을 내야 따르지 않을까?

자신을 낮추고 남을 높이라

유교적 논리가 젊은 사람들이나 또 세계 어느 나라사람들이든 먹히려면 보편타당해야 한다. 철학자 칸트가

“네 의지와 격률이 동시에 항상 보편타당한 입법원리가 되도록 행위 하라.”

라고 말한 것과 같이 누구에게나 보편타당하게 적용되고 지킬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나이 많은 사람 또는 능력이나 덕이 높은 사람만 높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사람들은 누구나 남으로부터 존중받기를 원한다. 남을 공경하는 것도 자발적으로 나오게 해야지 어떤 윤리적 규범으로서 강요할 수는 없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바로 율곡 선생의 『격몽요결』에서 그 단초를 찾을 수 있다.

다만 항상 자기를 낮추고 남을 높이는 생각을 가슴속에 품어야 마땅하다(「지신장」).

 

자기를 낮추고 남을 높이려면 나이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예수가

“남에게 대접을 받고 싶으면 네가 먼저 대접하라.”

고 한 말을 생각해보라. 인류가 남긴 모든 고전의 주제를 몇 마디로 말하라면, 그 가운데 ‘겸손’이라는 말도 끼지 않을까 생각된다. 자기를 낮춤으로써 남을 높인다면 나이가 문제 될 수 없고, 지위나 덕이 높은 사람도 아랫사람에게 겸손해질 수밖에 없다.
필자도 언제부터인가 후배들이나 강의를 들은 제자들에게 반말이나 예삿말을 쓰지 않는다. 선배에게 하듯이 그대로 존댓말을 쓴다. 그러나 자식에게는 아직 그러지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