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섭(金漢燮,1838-18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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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섭(金漢燮)은 전라남도 장흥 출생으로 30세 때부터 이항로, 임헌해, 기정진의 문하에서 공부를 하여 독자적인 성리학 세계를 구축하였다. 40세 이후 강진군의 대월리와 수양리 등지에 정자를 짓고 제자들을 양성하였으며, 1894년 동학농민군이 일어나 전라도 각지를 점거하자 당시 강진현 보암면의 도총장(都摠長) 직책으로 농민군의 강진 입성을 저지하다 5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1838(1세, 헌종 4) 5월 23일에 전라남도 장흥군 부산면 흥룡동(현 내안리 내동)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선조인 문인 김광원(金光遠)이 을사사화 때(1519) 전라도 해남으로 유배되었다가 이곳에서 생을 마쳐 그 후손들이 여기에 정착한 것이다. 본관은 영광(靈光), 자는 치용(致容), 호는 오남(吾南)이다. 아버지는 김노현(金魯鉉), 어머니는 해남윤씨(海南尹氏)인 윤상열(尹商說)의 딸이다. 4남 1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난 김한섭은 어려서부터 집에서 가까운 수인산 필봉 아래의 서당 흥룡재(興龍齋)를 다니며 글공부를 하였다. 11세 때부터 문장에 재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1855(18세, 철종 6)에 ⌈중용⌋에 관한 글을 지어 앞선 학자들의 주석을 비판하였다. 이후 십 수 년간 과거 시험에 도전하였으나 성과가 없었다.

1862(25세, 철종 13)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1867(30세, 고종 4)에 이항로(화서, 1792-1868)의 문하에 들어갔다. 1년이 못되어 스승이 사망하자, 상례를 치룬 뒤 스승의 문집 등을 가지고 귀향하였다. 이후 임헌해(任憲晦, 1811-1876)의 문하에 들어가 그가 별세할 때까지 8년간 스승으로 모셨다. 그 뒤에 기정진(노사, 1798-1879)의 문하에서 수업하였다. 이때 김평묵, 최익현, 전우 등 많은 유학자들과 교류하였다.

성리학에 대한 그의 관심과 애정은 그가 강진의 화수정(花樹亭)에서 지은 글(「화수정차제생운(花樹亭次諸生韻)」)에 다음과 같이 담겨있다.

士處憂虞時 선비의 처신은 어려울 때를 걱정하고,

須勤學禮詩 반드시 힘써 예와 시를 배워야한다.

寒後春生理 추워진 후에 봄이 오는 이치는,

試看庭樹枝 정원의 나뭇가지를 보면 안다.

1877(40세, 고종 14)에 월각산(月角山, 지금의 강진군 성전면 송월리) 아래로 이사했다. 그곳의 골짜기를 대명동(大明洞)이라 부르고, 그곳에 서재와 서당을 짓고 제자들 교육에 힘썼다. 서당의 이름을 한천정사(寒泉精舍)라고 하였다. 한천정사라는 이름은 주자가 그 어머니의 무덤을 지키기 위해 지은 움막의 이름이다. 주자는 그곳을 찾아온 친구 여조겸과 그곳에서 근사록을 저술했다. 이러한 정자의 이름에서 주자를 본받고자 하는 그 마음이 잘 알 수 있다.

당시의 사정을 김한섭은 이렇게 말했다. “아! 나는 관산의 흥룡동에 대대로 살면서 일찍 아버지를 여읜 불효 여생이 어머니를 모시고 살다가 지난 정축년(1877)에 금릉의 북쪽 월각산 아래 대명동으로 이사하여 살았다.”(「한천정사실기」)

당시 그는 주자의 영정을 한쪽에 모셨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규정을 정하여 학생들을 가르쳤다.

“독서의 순서는 마땅히 율곡 선생이 정한 바에 따라야 한다. 그러나 어린 초학자는 소학을 배우기도 어려우니, 모름지기 먼저 주자가 지은 동몽수지(童蒙須知)를 읽어 자신을 단속할 대략을 알게 해야 한다. 그 다음에 소학과 효경 등의 책을 읽어 그 기본을 세우고, 그 다음에 율곡선생이 지은 격몽요결을 읽어 뜻을 세우고 몸을 챙기는 학문의 대강을 알며, 그 다음에 사자서(四子書)․근사록․심경을 숙독하고 상세해 완미함으로써 옛 성인들이 학문을 논하고 인격을 닦으며 성명(性命)과 이기 체용의 현미(顯微)를 밝힌 이치를 살펴야할 것이다.”(한천정사寒泉精舍의 학규學規)

1882(45세, 고종 19)에 아들 봉식(鳳植)을 지도(智島)에 있는 김평묵(金平默)에게 보내 공부를 하게 하였다. 그는 이 아들에게 큰 기대를 걸었으나 24살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그에게는 아들 외에도, 세 형이 요절하고 둘째 아들이 요절하는 등 가족적으로 불행한 일들이 많았다. 경제적으로도 항상 빈곤하였으나, 학문과 덕행을 닦은 일에 매진하였다. 그의 문집에 이런 글이 있다.

“성인의 학문을 배우면 비록 성인의 경지에 이르지 못하더라도 그 좋은 이름은 잃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속인의 학문을 배우면 비록 온갖 정교한 연구를 하더라도 단지 속인에 불과할 뿐일 것이다. 사람이 한 세상 사는 몸으로 헛되이 살 수 없다. 이 날은 다시 오지 않기 때문이다. 부귀도 원하는 바가 아니요, 문장도 원하는 바가 아니며, 공명도 바라지 않고 장생도 바라지 않는다. 소원이라면 성인을 배우는 일이다.”

가정적으로나마 사회적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불행한 현실을 초월하여 오로지 성인의 도를 찾아 추구하는 그의 마음이 잘 드러나 있다.

1887(50세, 고종 24)에 가족을 수양리(首陽里, 지금의 강진군 도암면 수양리水良里)로 옮겼다. 자신은 계속 대명동에서 강학활동을 하였다.

1890(53세, 고종 27), 대명동을 떠나 가족이 있는 수양리로 거처를 옮겼다. 그곳 봉양동에 봉양정사(鳳陽精舍)를 짓고 제자들을 가르쳤다. 당시 제자들은 20~30명 정도였다.

이즈음 그의 생활을 잘 보여주는 시로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陋巷春風入 조그만 마을에 봄바람 불어오니

幽人樂未央 세상 피해 사는 즐거움은 끝이 없구나.

階梅白如玉 계단 아래 매화는 구슬처럼 하얗고

自爾動淸香 맑고 고은 향기가 저절로 풍겨오는구나.

1894(57세, 고종 31), 동학농민 봉기가 일어났다. 1월(음력)에 고부에서 일어난 농민군은 4월에 전주성을 함락하고, 9월에는 전라도 일대로 세력을 확대하였다. 당시 강진현은 농민군의 집강소 설치를 반대하였는데, 이 때문에 동학접주 이방언은 강진현을 1차 공격대상으로 삼았다. 이방언은 장흥의 묵촌 출신으로 일찍이 김한섭과 글을 같이 배운 동료였다. 김한섭은 그러한 이방언에게 「적도들에게 경고하는 글(警示賊徒文)」을 지어 보내는 등 적극적으로 동학군을 배척하였다. 아울러 의병을 모집하여 수성군을 조직하고 보암면(현 도암면) 도통장(都摠將)으로 동학군의 진입에 대비하였다.

12월 7일 오전에 농민군이 강진현에 들이닥쳤다. 당시 현감 이규하(李奎夏)는 곧바로 달아났고, 김한섭은 다른 의병들과 함께 성위에서 포를 쏘았지만 중과부적으로 당해낼 수 없었다. 인근지역의 병영에서 구원군도 오지 않는 상태에서 동문과 남문이 부서지고 농민군이 밀려들어오면서 김한섭은 사망하였다.

제자들이 나중에 스승의 글을 모아 유집 오남문집(吾南文集)을 발간하였다. 13권 7책으로 엮어져 있다. 그의 글은 성리학에 대해서 논한 것이 많은데, 「삼극도설(三極圖說)」·「유석심학부동변(儒釋心學不同辨)」·「일감문답(一鑑問答)」등이 있다. 이외에도 정치 문제를 다룬 「벽사설(闢邪說)」·「통화변답(通貨辨答)」·「농정신서서조변(農政新書序條辨)」 등 문장도 있다.

성리학자로서 그의 학문적 특색은 리(理)를 강조한 것이었다. 특히 명덕주기설(明德主氣說)·성즉리심즉기설(性卽理心卽氣說)·성위심재설(性爲心宰說) 등에 반대하고, 명덕(明德, 밝은 덕)은 기(氣)가 아니라 리(理)가 주(主)이며, 심(心)은 리와 기가 합한 것으로 몸의 주재자라고 보았다.

<참고문헌>

권영대, 「김한섭」,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강진일보, 「주자를 닮고자했던 한말 유학자 김한섭」(2015. 7. 30일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