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이의 몸가짐이 바르지 않을 때


내 아이의 몸가짐이 바르지 않을 때

 

애들은 애들답게?
소싯적에 어른들께 들은 얘기다. 젊은 부부가 지나칠 정도로 아이의 일거수일투족에 참견하며 가르치려고 하자, 나이가 지긋한 어른이

“그냥 내버려 둬요. 원! 애들은 애들답게 키워야지.”

라고 말하는 것을 종종 본 적이 있다. 이것이 한 집안에서 대체로 시부모와 며느리가 손자의 교육방식을 두고 갈등하는 하나의 상징이 될 법도 하다. 그래서 요즘은 나이든 부모나 친정부모에게 그런 문제로 아이를 맡기지 않으려는 젊은 부부도 있다고 한다. 아마 그들의 기준에서 생각하는 구식인 옛날 사람들의 교육적 악영향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추측건대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한 아이들을 놀게 내버려 두거나 아니면 언어나 지식의 악영향일 가능성이 크다.

사실 아이들 행동 하나하나에 참견하는 것은 초등학교 저학년 도덕 교과서에도 보이는데, 아이들이 어떻게 몸가짐을 해야 할지 상세하게 나와 있다. 그것이 몸에 배지 않은 이상 하나하나 지키기에는 벅차다. 그래서 어릴 때 익히도록 수없이 그 행동을 반복시킨다. 그 과정에서 아이들이 지루하고 짜증낼 수도 있다. 옛날 시골 노인들이 그 모습을 본다면 틀림없이 또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냥 내버려 둬요. 애들은 애들답게 키워야지, 그렇게 좁쌀영감처럼 하나하나 간섭하면 그 아이가 자라서 어떻게 되겠소?”

얼핏 들으면 그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하다. 아이의 일에 지나치게 간섭하면 그 아이는 분명 우유부단한 판단력이 결핍된 사람으로 자랄 가능성이 있다. 동아시아 전통의 노자나 장자의 사상, 그리고 서구의 자연주의 교육관 등의 관점도 이론의 방향에서 볼 때 이를 지지하고 있다.

두 교육관의 충돌

그렇다면 정말 애들을 애들답게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야 할까?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또 율곡 선생은 어떤 관점을 지지했을까? 여기서 두 교육관이 충돌한다.

〔8〕공수가 단정하지 않고 옷소매를 풀어 놓고 한 쪽다리로 기대서는 것(拱手不端, 放袖跛倚)

공수(拱手)란 두 손을 공손히 앞으로 맞잡는 것으로 읍(揖)을 하거나 절을 할 때 주로 사용한다. 또 한쪽 다리에만 의지해 서는 것은 바른 자세가 아니다. 그러니까 공수를 공손하게 하며 옷소매도 잘 여며야 하고 서 있을 때는 두 다리에 힘을 균등하게 배분하여 바른 자세로 서야 단정한 모습이다.
선생은 여기에 더하여 또 이런 것을 경계한다.

 

〔9〕발걸음이 가볍고 뜀박질하고 뛰어 넘는 것(行步輕率, 跳躍踰越)

발걸음이 가볍다는 뜻은 경망스럽게 가벼이 움직인다는 뜻이다. 뜀박질하고 뛰어 넘는 것이 그 사례이다. 어찌 보면 발걸음이 가볍고 뜀박질하고 뛰어 넘고 하는 것이 아이들의 자연스런 모습이 아닌가? 아이들의 기운은 어른보다 훨씬 생동감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동물들의 새끼를 보라. 그래야 신체가 발달하여 성숙해지는 것이 아닌가? 따라서 선생이 금하는 것은 아이들의 자연스런 모습이다. 그래서 선생의 입장은 애들을 애들답게 자연스럽게 자라도록 내버려 두는 입장은 분명히 아니다.

구용(九容)

여기서 선생이 강조하는 사례를 더 살펴보기 위해서는 또 『격몽요결』을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몸과 마음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구용만큼 절실한 것은 없다. 이른바 구용이란 발걸음을 무겁게 하고[가볍게 행동하지 않는 것으로 어른 앞에서 걸을 때는 예외임], 손 모양은 공손히 하고[손을 게을리 하지 말되 일이 없으면 공수하여 함부로 움직이지 않음], 눈은 단정하게 하고[눈동자를 고정시키고 시선을 바르게 하여 흘겨보거나 훔쳐보지 않음], 입은 다물고[말하거나 음식을 먹을 때가 아니면 입은 언제나 움직이지 않음], 목소리는 조용하게 하고[모습과 기운을 가다듬어 구역질이나 트림 등의 잡소리를 내지 않음], 머리는 꼿꼿이 세우고[머리를 바르게 하고 몸을 곧게 하여 기울이거나 돌리거나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게 함], 숨 쉬는 것은 엄숙하게 하고[호흡을 고르게 하되 소리가 나지 않게 함], 서 있는 모양은 덕스럽게 하고[가운데 서고 한쪽으로 기울지 않으며 의젓하여 덕이 있는 기상이어야 함], 얼굴빛은 장엄하게 하는 것이다[얼굴빛을 정돈하여 가지런히 하고 게으른 기색이 없어야 함]

(「지신장」).

이 구용은 군자가 항상 지켜야 할 신체 아홉 부분의 몸가짐인데 원래 『예기』에 나오며 후대에 편찬한 『소학』에도 실려 있다. 주자의 『동몽수지』에도 이와 유사한 말이 나온다. 곧

“걸음걸이는 단정하게 해야지 달리거나 뛰어넘거나 머뭇거려서는 안 된다. 그러나 부모나 어른이 부를 때에는 잽싸게 달려가야지 느긋하게 느리게 가서는 안 된다.”

라는 말이 이것이다. 선생의 두 번째 말과 거의 동일하다.

이 구용의 내용을 자세히 보면, 아마 요즘 아이들에게 이걸 시켰다간 봉변을 당할지 모르겠다. 아이들의 자연스런 천성을 무시하고 너무 자잘하게 간섭한다고. 필자의 경험에 따르면 아이들은 천성적으로 발걸음이 가볍다.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뜀박질을 하거나 움직인다. 손은 공수는커녕 조금도 가만히 내버려 두지 못하고, 부지런히 움직인다. 장난감을 조립하거나 가지고 놀거나 게임을 하거나 또 무엇을 하던 항상 바쁘다. 눈은 또 어떤가? 뭐가 그리 궁금한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고 엿보는 것을 예사로 안다. 또 아이들에게 입을 다물게 하거나 목소리를 조용하게 하는 것은 어려운 우리나라 경제를 살리는 것보다 더 어렵다. 그러니 머리나 숨 쉬는 것이나 서 있는 모양이나 얼굴빛 따위는 더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옛날 아이들이라고 해서 오늘날 아이들과 천성적으로 뭐가 그리 달랐겠는가? 굳이 말한다면 아동에 대한 옛날의 관습이나 문화가 지금에 비해 더 엄격하고 억압적이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동의 천성(天性)에 반하여

그렇다면 왜 이렇게 아이들의 천성에 반하여 이러한 몸가짐을 주문했을까? 이 구용의 내용이 『예기』에 들어 있으니 오랜 옛날부터 유가들 사이에 강조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이걸 보면서 정말로 옛날의 아이들이 이랬을까 하는 정당한 의문을 가져야 한다. 모든 고전이나 경전 또는 책 속에서 강조하는 동기는 그것이 잘 안 되기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닐지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굳이 사회가 잘 돌아갔다면 공자가 인(仁)을 주장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고, 아동교육이 잘 되었다면 굳이 선생이 이 『소아수지』나 『격몽요결』 같은 책을 펴낼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이 구용이 『예기』에 최초로 등장하였다는 점은 특수한 사례라고 보아야 한다. 당시는 계급사회였기 때문에 이른바 군자로 불리는 왕족이나 귀족의 자제에게 요구되는 사항이지 노예나 평민자제에까지 강조되었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조선시대 또한 신분제 사회였고 사대부가 지배층으로서 사회를 이끌어 갔다. 따라서 사대부가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역할을 잘 하려면 어릴 때부터 자신의 사적인 욕망을 이겨내고 예법을 준수하는 모범을 보여주어야만 했다. 그러니 그 욕망을 어릴 때부터 이겨내는 방법이 음식을 탐내지 않는 것부터 시작하여 이 구용만큼 좋은 것이 또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예기』의 그것을 『소학』에서 또 『격몽요결』까지 강조하고, 더 나아가 그 구체적 사항을 『동몽수지』나 『소아수지』에 반영하였다는 점은 뭔가 냄새나는 구석이 있다. 이것은 성리학을 완성하고 계승한 신유가(新儒家)들의 이상사회 건립을 위한 철학적 이념과 공부방법과 관련이 있다. 인간의 본성은 선하지만 육체적 욕망에 의하여 그 선이 잘 발휘되지 않으므로 사회가 혼란해진다고 보고, 그 욕망을 극복하고자 하는 공부방법을 여러 가지로 모색하였다. 그 가운데 하나가 어릴 때부터 욕망을 이겨내는 방법으로서 어린이들이나 초학자를 위한 책을 펴냈다. 그것이 『소학』이나 『격몽요결』 등이다.

그래서 인간 욕망의 근거를 인욕(人欲)으로 보아서 그것을 막고자 하여, 어릴 때부터 몸을 단속하는 학습을 시켰던 것이다. 그러니까 이런 교육방식은 다분히 도덕적이다. 아동의 심리발달이나 생리적 특성을 고려하기보다 도덕적 사회를 만들기 위한 엄숙주의가 자연히 작동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것은 모든 아이들에게 강요하였다기보다 자연히 사대부가 자제를 중심으로 교육했을 공산이 크다. 어찌 보면 아동의 입장에서는 미래에 지도층이 되기 위한 의무적으로 따라야 하는 교육이라 생각하면 되겠다.

물론 이것만으로 충분히 납득되는 것은 아니다. 가능한 모든 아이들이 이 같은 예법을 지킴으로써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려는 의도도 배제할 수 없다. 사회에서 통용되는 관습, 대부분 예법이라는 이름으로 강요되겠지만 그것을 통해 사회를 통제하고 체제를 유지하였다. 따라서 이런 도덕적 행위 규범은 전통문화 속에서는 하나의 보편적인 것이 되어 그 체제를 재생산할 수 있었던 강력한 도구였다.

한국인들의 공중도덕

오늘날은 이런 구용과 같은 규범을 거의 지키지 않는다. 그런 용모를 오히려 시대에 뒤떨어지는 이상한 것으로 본다. 발걸음을 무겁게 하거나 머리를 꼿꼿이 세우거나 얼굴빛을 장엄하게 하면 십중팔구 거만하게 여긴다. 그러나 입은 다물고 목소리는 조용하게 하고 손 모양을 공손히 하고 덕스럽게 서는 것은 아직도 유효하다. 그런데 이걸 지키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의문이다.

사실 오늘날 학교에서 도덕시간에 이와 유사한 것을 현대에 맞게 교육시키지 않는 것은 아니다. 사회가 복잡하므로 이와 유사한 것에 더 많은 규범을 추가하여 가르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사회에서 도덕 지수가 낮은 것은 무엇 때문일까? 다 제쳐두고 공공장소에서 지키는 예절만 해도 그렇다. 물론 예전보다 다소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아직은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일들은 여전하다. 그 사례가 너무 많이 일일이 지적하지는 않겠다. 왜 초중고 보통교육을 통해서 가르치지만 정작 어른이 되었을 때 지키지 않은 사람이 생길까?

필자는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학교에서 배운 것이 사회에 통용되지 않는 점이 그 이유 가운데 하나라고 본다. 이른바 ‘학교의 모범생이 사회의 모범생은 아니다’라는 말도 여러 맥락에서 쓰이기는 하지만, 이런 점에도 사용된다. 곧 불의에 적당히 타협하고 실속을 챙길 줄 모르는 융통성이 없는 태도를 가리킬 때도 사용된다. 우리가 국회청문회를 통해서 눈여겨보았듯이 사회지도층부터 비리의 온상처럼 보인다. 지도층이 되기를 포기하고 실속만 챙기는 사람들은 이보다 더할지도 모른다. 영악하게도 요즘 아이들은 그것을 잘 안다. 그래서 학생 때도 잘 안 지킨다.

공중도덕을 비롯하여 한국인들의 도덕성 지수가 낮은 것, 다시 말해 실용성과 편의를 따라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제적 이득만 챙기려는 행태는 근원적으로 욕망을 절제할 줄 모르는 데서 기인한다. 유가(儒家)들은 이렇게 욕망의 끝이 어떻게 될지 알았기에 다소 무리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렇게 어릴 때부터 자기 몸단속하는 교육을 시켰다. 그럼 우리는 자신의 욕망을 절제하기 위해 어떤 교육을 시키는가?

때와 장소에 따라

옛날의 예법이라고 해서 다 케케묵거나 나쁜 것도 아니다. 얼핏 보면 옛날에는 어린이들의 자연스런 생리를 모르고 엄숙주의나 도덕주의 같은 교육을 시킨 것처럼 보이지만, 오늘날 전혀 무의미한 것만은 아니다. 아이들이 평소에 자연스럽게 생기발랄하게 자라도록 해야 하지만, 올바른 예절이나 바른 몸가짐이 필요할 때도 많다. 바로 선생도 『격몽요결』에서 작은 글씨(앞의 [ ] 속의 글)로 예외를 인정하고 있듯이 때와 장소에 따라 융통성 있게 적용할 것을 말해준다.

인간은 혼자서 살 수 없다. 남과 더불어 살아야 하기 때문에 예절이 필요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몸가짐부터 바르게 해야 한다. 이것은 백 번 강조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다. 어릴 때부터 바른 몸가짐을 갖추지 못하면 커서 더욱 어렵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하지 않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