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영(金駿榮)-2


김준영(金駿榮)-2                                                       PDF Download
181842(헌종 8)~1907(융희 1). 조선 말기의 학자. 본관은 의성(義城)이며, 자는 덕경(德卿)이고, 호는 병암(炳菴)이다. 전편의 내용을 이어서 여기서는 김준영의 예학을 소개한다.

스승인 전우가 김준영을 위해 지은 「행장(行狀)」에서 그를 이렇게 칭찬했다.

 

“그는 예학에 있어서 특히 힘을 다했다. 주장하는 것마다 모두 근거가 있고 명확하였으며 억지로 끌어 붙이는 일은 절대로 없다.……예를 바꾸는데 있어서 특별히 신중히 했다. 김준영이 말하기를, 권(權)이란 도를 깨달은 군자가 아니면 함부로 써서는 안되는 것이다. 만약 배움이 부족하면서도 ‘권’에 대해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그의 학문은 병들은 것이다. 우리들은 그저 원칙을 지킬 다름이다.”

 

그의 문집인 병암집에서 예와 관련된 서술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김준영은 특히 각종 예제(禮制)에 대한 연구에 세심했는데, 이와 관련해 때때로 스승인 전우와 함께 토론하기도 했다. 예제에 대한 김준영의 서술은 비교적 구체적인데, 여기서는 그의 예론만을 언급한다. 김준영의 예론은 시대적 특징이 뚜렷하며 그의 존화양이(尊華攘夷), 위정척사(衛正斥邪) 사상과 일맥상통한다.

‘존화양이’는 중국(명나라)을 존중하고 오랑캐(청나라)를 물리친다는 뜻으로, 중화사상의 일부 관념이다. 줄여서 화이론(華夷論)이라고도 한다. 이 말은 원래 오경(五經) 가운데 하나인 「춘추」에서 나온 말로, 공자가 주나라를 존중해야 한다고 한 존주론(尊周論)에 바탕을 두고 있다. 성리학에서는 이를 춘추대의(春秋大義)라 하여 중요한 명분으로 삼았다. 또한 ‘위정척사’는 조선 후기에 일어난 사회운동으로, 정학(正學)인 성리학과 정도(正道)인 성리학적 질서를 수호하고(위정), 성리학 이외의 모든 종교와 사상을 사학(邪學)으로 보아서 배격하는(척사) 운동이다. 이 운동을 하는 정치세력을 ‘위정척사파’라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유교 학파이기도 하다. 또한 전통 사회 체제를 고수했으므로 수구당(守舊黨)이라고 불렸다.

그의 예론은 세 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첫째, 예는 중화와 오랑캐를 구분하는 경계선이다. 예는 사회구성원을 여러 등급으로 나누어 그것들이 고정되도록 하는 작용을 한다. 「예기」에는

 

“예가 아니면 임금과 신하, 윗사람과 아랫사람, 어른과 어린이의 지위를 분별할 수 없다. 예가 아니면 남자와 여자, 부모와 자식, 형과 동생의 친함, 혼인이나 서로 왕래하는 사귐을 분별할 수 없다”

라고 하였다. 또한

“임금과 신하, 윗사람과 아랫사람, 부모와 자식, 형과 동생의 분수도 예가 아니면 정해질 수 없다”

 

라고 하였다. 유가의 전통적인 예론이 주로 정치에서의 군신․상하, 윤리에서의 부자․형제․부부․장유․친소 등의 구별을 통해서 ‘예는 차이를 분별하는 것이다’를 해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전통적 예론에서 예를 중화와 오랑캐를 구분하는데 쓰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매우 드문 일이다. 조선이 서양 오랑캐와 일본 오랑캐의 침략을 받고 있을 때, 심지어 일본은 조선을 집어삼키려고 하는 시대를 살았던 김준영은 특별히 예가 중화와 오랑캐를 구별하는 경계임을 강조했다. ‘중화와 오랑캐를 분별하는 것’이 예의 사회적 기능임을 강조한 것이 김준영의 예론이 가지는 뚜렷한 특징이다.

예의 이러한 기능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는 「의제설(衣制說)」 세 편을 썼다. 예는 사회의 전장제도(典章制度)이고, 의제(衣制)는 그것을 구성하는 중요한 성분이라고 보았다. 중화의 성왕은 ‘반드시 사대부 복장에 대한 제도를 만들어 천하에 대대로 가르침을 전하지만, 오랑캐들은 안장과 말을 집으로 삼고 사냥으로 살아간다.’ 그러므로 그들은 옷이 짧고 소매가 좁다. 즉 ‘의제’는 중화와 오랑캐를 구별하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만약 사람이 옷을 입지 않는다면 소나 말과 다름없다. 옷을 입었더라도 소매가 짧으면 오랑캐와 같다. 당시 사람들이 조정의 명령에 굴복하여 오랑캐처럼 복장을 바꾸는 것에 직면하여 김준영은 날카롭게 지적하였다.

“넓은 소매와 좁은 소매 사이는 부모의 유해가 중화가 되느냐 오랑캐가 되느냐 이므로 즉각 결정해야 한다.”

 

둘째, 예는 나라를 세우는 근본이다. 사회의 전장제도로서의 예는 ‘국가를 다스리고 사직을 안정시키는’ 작용을 하는 국가의 근본이다. 김준영이 이런 작용을 갖고 있는 예에 대해 논한 것도 중화와 오랑캐를 구별하는 입장에서 전개한 것이다. 김준영은 예란 나라를 세우는 근본으로 보고

“정치에 있어서 예로써 풍속을 지도하는 것보다 귀중한 것은 없다”

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예가 나라의 근본이라는 것은 중화와 조선에서의 근본을 가리킨다. 중화가 중화의 나라가 되고, 조선이 조선이 되는 이유는 바로 예의를 지키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오랑캐의 것으로 중화를 변화시키면 조선도 더 이상 조선이 되지 않는 것이다.

 

“예법이 땅에 떨어지면 기강이 끊어진다. 이렇게 되고서도 국가가 국가가 될 수 있겠는가?”

“지금 그 소매를 제거하니 나는 그 사람의 마음이 이미 세상의 도를 떠나 더욱 오염되어 국가가 국가가 될 수 없는 것을 두려워한다.”

 

김준영의 예는 나라를 세우는 근본으로서의 사상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조선민족의 예의풍속과 민족적 독립성을 보호하여 조선이 일본에 동화되는 것을 방지하자는 이론이다.

셋째, 예의 변화에 신중해야 한다. 김준영의 예론에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예의 개혁에 있어서 신중한 태도를 취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는 예제의 개혁에 완전히 반대한 것은 아니다.

 

“고수해야 하면 고수해서 굳세게 계속 따르고, 변통해야 할 때에 변통하는 것 또한 계속 따르는 것이다.”

“전 세대의 그릇된 예에 고쳐야 할 것이 있는데, 고치지 못할 이유가 있겠는가? 고쳐서 바르게 하는 것이 바로 효(孝)를 행하는 방법이다.”

 

이러한 서술들이 그의 예제 개혁에 대한 융통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국난이 눈앞에 닥쳐있는 이때, 예를 변화시키는데 있어서 만약 ‘오랑캐로써 중화를 변화시킨다’면, 이것은 바로 조선 뿌리의 상실과 조선 민족의 독립성 상실을 의미한다. 이 점을 고려해 김준영은 함부로 변례(變禮)를 말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예의 개혁을 신중히 해야 한다는 주장은 당시 조선의 통치자가 의복개량과 단발령 등을 명령한 것을 겨냥하여 나온 것이다. 그러나 당시 조선 군주의 ‘변례’는 이렇지 않고 오랑캐로써 중화를 변화시키는 것이었다. 김준영은

 

“중화와 오랑캐의 구별이 임금과 신하의 구별보다 엄하다”

 

는 유가의 원칙에 근거해서 당대의 왕의 혼미한 유언은 따르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만약 당대 왕의 명령 때문에 폐를 끼치게 되는데도, 그것을 쫒아 짧고 좁은 옷을 입는다면, 이것은 진실로 오랑캐 되기를 원하는 것이다.”

 

[참고문헌]: 「병암집(炳菴集),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병암 김준영 학문의 계승성과 독립성」(마진탁, 「간재학논총」제3집, 간재학회,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