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소학> 한문한자 인력양성 강좌 3차 수업


금요일 – <소학> 인성 한자·한문 지도자 양성 강좌 모습

2018년 9월 28일 금요일 인성 한자·한문 지도자 양성 1학기 3차 강좌를 진행 하였습니다.

인성 한문·한자교육 – 소학 1학기 2차 수업

 

금요일 – <소학> 인성 한자·한문 지도자 양성 강좌 모습

2018년 9월 21일 금요일 인성 한자·한문 지도자 양성 1학기 2차 강좌를 진행 하였습니다.

인성 한문·한자교육 – 율곡문집 1학기 2차 수업

목요일 – <율곡문집> 인성 한자·한문 지도자 양성 강좌 모습

2018년 9월 20일 목요일 <율곡문집> 인성 한자·한문 지도자 양성 1학기 2차 강좌를 진행 하였습니다.

인성 한문·한자교육 – 성학집요 1학기 2차 수업


수요일 – <성학집요> 인성 한자·한문 지도자 양성 강좌 모습

2018년 9월 19일 수요일 인성 한자·한문 지도자 양성 1학기 2차 강좌를 김종서 선생님과 함께 시작 하였습니다.

인성 한문·한자교육 – 격몽요결 1학기 2차 수업

 

화요일 – <격몽요결> 인성 한자·한문 지도자 양성 강좌 모습

2018년 9월 18일 화요일 인성 한자·한문 지도자 양성 1학기 2차 강좌를 진행하였습니다.

율곡이 바라는 통치자


율곡이 바라는 통치자

 

소라이: 그러신가요? 선생님은 나라 안 정치의 모든 문제가 임금의 실천의지와 관련된다고 생각하시지요? 백성들을 어떻게 통제하느냐는 문제보다.

율곡: 그렇습니다. 도덕적인 마음의 자세도 중요하고요. 제가 임금에게 그러한 것을 요구한 것은 선생님 생각과는 전혀 다른 이유에서입니다.

옛날 고대 성왕(聖王)들은 마음 쓰는 것이나 행동이 아주 투명하여 만물이 모두 볼 수 있었습니다. 어리석은 백성들까지도 임금의 뜻을 분명히 보고, 알지 못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죽여도 원망하지 않았고, 이롭게 해주어도 은공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조선에서는 가까운 신하들까지도 임금의 마음을 잘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일반 백성들은 어떻겠습니까? 한 나라의 최고 어른인 임금이 말씀과 행동을 너무 가볍게 하면, 아래 있는 신하들이 어떻게 행동할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소라이: 그렇기는 하지요. 그래도 최고 통치자는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해도 되지 않는지요?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만.

율곡: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그런 글을 써 올리기 며칠 전, 우리 임금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 신하들이 큰 제안을 다투어 말하고 이전에 없었던 일을 하기 좋아하니, 앞으로 우리나라 풍속이 당연히 순박해지고 정치가 참 잘 되겠구나.”

그런데 이러한 임금의 말씀이 나오자 밑에 있는 많은 신하들은 그 말씀을 그대로 믿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의혹을 가지고 임금의 눈치를 보는 일이 더욱 늘어났습니다. 옛사람들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착한 일은 말하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실천하는 것이 어렵다.”

옛날, 중국의 사상가 소옹(邵雍)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잘 다스려지는 세상에서는 덕을 높이고 어지러운 세상에서는 말을 높인다.” 정치가 잘 이루어지는 나라에서는 덕이 중시되고, 어지러운 세상에서는 말이 중시된다는 것입니다. 행동을 하지 않고 말로만 앞세우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그 나라는 어지럽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저는 우리 임금께 이렇게 건의했습니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천하에 큰 소리만 다투어 말한다고, 어찌 풍속이 순박해지고 정치가 제대로 된 일이 있었습니까? 또한 전하께서는 큰 제안을 옳다고 여기십니까? 아니면 그르다고 여기십니까? 만약 그것이 옳다면 그 큰 제안이란 것도 실은 임금을 인도하여 올바른 도리를 행하게 하고 좋은 정치에 이르게 하려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임금에게 마땅히 그 의견을 지체 없이 채택해야 한다고 건의하였지요. 혹시라도 임금이 마음속으로 딴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말하자면 “큰 제안을 다투어 말한다.”하시면서 사실은 신하들의 그런 제안을 비꼬거나 풍자해서는 안 된다고 했지요. 그러면 임금과 신하들 사이에 서로 의심하는 마음의 간격이 더 커집니다. 신하들이 제안을 올렸더라도 그것을 임금이 쓰지 않으면 그 제안이 비록 아무리 좋아도 무익합니다. 좋은 제안을 채택하여 쓰지 않으며 그런 제안들이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당면한 현안들이 제대로 바로 잡히지 않습니다.

소라이: 임금의 말과 행동에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는 말씀이시지요. 그리고 임금이 좋은 제안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씀이시지요.

율곡: 그렇습니다.

소라이: 말씀을 들으니 일리가 있습니다만, 임금에 대한 기대가 저보다는 많으시군요. 저는 그렇게까지 군주에 대해서 기대를 하지 않습니다. 저는 그들도 우리와 같은 보통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단지 그들은 그렇게, 그런 신분으로 태어났고, 우리는 이렇게 신하의 신분으로 태어났습니다. 그것이 다르지요.

율곡: 그렇습니다. 사람이라는 점에서 최고 통치자와 우리는 같습니다. 신분만 다르지요. 사람이기 때문에 그들은 우리처럼 도덕적일 필요가 있는 것이지요. 마음이 순수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일반의 시정잡배보다 그들은 더 순수한 마음과 깨끗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을 다스리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소라이: 그런 입장이시군요. 그래서 선생님은 우리와 같은 사람, 즉 도덕적으로는 우리와 같은 군주에게 다음과 같은 것도 요구하셨지요. ⌈만언봉사⌋에서 말씀하신, ‘임금에게 자기 몸을 닦는 요령’입니다.

“자기 몸을 닦는 요령은 네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전하께서 삼대(三代)의 흥성했던 시대 상황을 회복하려는 의지를 갖고 기약하는 일입니다.

둘째는 성학(聖學), 즉 유학공부에 힘써서 그 뜻을 정성스럽게 하고 마음을 바르게 하도록 노력하는데 힘쓰는 일입니다.

셋째는 한쪽으로 치우친 사심(私心)을 버리고 지극히 공평한 도량을 넓히는 일입니다.

넷째는 어진 선비를 가까이 하여 충성스런 조언이 가져올 이익의 바탕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율곡 : 그렇지요. 그렇게 하는 것이 침체에 빠지고 위기에 처한 조선의 상황을 개선할 수 있다고 보았지요. 그리고 대개는 임금의 마음과 의지가 중요하고, 그래서 임금을 향한 요구인 것이지요. 제가 우리 임금에게 그런 것을 요구한 것은, 첫째로 저는 우리 임금의 자질이 매우 훌륭하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인자하심은 백성을 보호하기에 충분하고, 총명하심은 간사한 자를 분별하기에 충분하며, 용맹은 결단을 내리시기에 충분하다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우리 임금은 성왕(聖王)이 되겠다는 의지가 없고, 좋은 다스림을 추구하는 정성이 독실하지 않았습니다. 옛날의 성왕과 같은 임금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고 뒤로 물러나 스스로 과소평가를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떨치고 일어나 분발하려는 의지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우리 임금이 자기 몸을 닦는 일에 노력을 하고 백성을 편안히 하는 일에 진실로 마음을 쏟는다면, 현인을 찾아서 함께 나라를 다스릴 수가 있고 그들과 함께 폐단을 개혁하여 어려운 시국을 해결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한 거지요.

소라이: 혹시 그러시면 임금이 절약과 검소를 숭상하면, 사치 풍조를 개혁할 수 있다는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율곡: 그 점은 상세히 말씀드리지요. 조선의 백성들은 지금 궁핍해 있습니다. 그들의 재물이 바닥난 것이 너무 심합니다. 그래서 나라에서 걷어가는 공물(貢物)을 경감해 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만약 조정에서, 그리고 궁궐에 있는 임금이 비용지출을 줄인다면, 적은 수입으로도 충분히 지출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소라이: 그렇기는 하지요. 저는 우리 쇼군에게 감히 그런 말을 못했지만, 사실 그렇습니다.

율곡: 제가 조정에 있을 때 궁중의 사치가 매우 심했습니다. 사치하고 문란한 풍속이 당시처럼 심한 적은 없었습니다. 음식은 배를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상다리가 부러지게 차려 놓고 서로 과시하기 위한 것이 되었고, 옷은 몸을 가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화려함과 아름다움을 서로 경쟁하기 위한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물론 이것은 궁중의 일입니다.

소라이: 일본에서 쇼군은 그 정도까지 사치스럽지는 못했습니다. 물가가 너무 비쌌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제가 천하의 물건은 원래 쇼군 것이다. 쇼군이 물건을 사서 먹을 것이 아니라 징발해서 먹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오직하면 그런 주장을 하였겠습니까? 그 정도로 일본 에도시대의 물가는 쇼군의 밥상을 걱정할 정도로 심했습니다.

율곡: 저는 임금에게 이렇게 직언했습니다. 궁정에서 음식 한 상 차리는 비용으로 굶주린 사람의 몇 개월 양식을 마련할 수 있고, 옷 한 벌의 비용이 헐벗고 추위에 떠는 사람 열 명의 옷을 장만할 수 있습니다. 열 사람이 농사를 지어도 한 사람을 따로 먹여 살리기가 부족한데, 농사짓는 사람은 적고 먹는 사람은 많습니다. 열 사람이 길쌈을 해도 한 사람의 옷을 따로 마련하기가 부족한데, 길쌈하는 사람은 적고 옷을 입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러니 무슨 수로 우리 백성이 굶주리고 헐벗어 추위에 떨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옛사람의 말에 “사치의 피해는 천재지변보다도 심하다.”고 하였는데, 어찌 믿지 않겠습니까? 만약 궁중에 있는 임금부터 먼저 절약과 검소에 힘써 이 병폐를 해결하지 않으면, 아무리 형법이 엄하고 명령을 부지런히 내린다 하더라도 밑에 신하들과 백성들은 듣지 않을 것입니다. 임금이 선대 임금들이 비용을 절약하기 위해서 한 노력을 살펴보고, 훌륭한 선대 임금들의 비용지출 규모와 사례를 검토하도록 명령을 내려, 궁중의 비용지출을 줄이면 나라 안의 백성들이 모두 그런 정신을 본받을 것입니다. 그렇게 조정 안팎에 모범을 보여 민간의 사치 풍습을 고쳐서, 사람들이 성대한 음식상을 차리거나 화려한 옷을 입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도록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하늘이 내려 준 재물을 아끼고 백성들이 힘을 펴게 될 것입니다.

소라이: 선생님의 그런 간곡한 호소를 듣지 않을 군주는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시간이 많이 흘렀습니다.

율곡: 예, 오늘 감사합니다.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많이 배웠습니다. 다음에 또 좋은 기회가 있으며 다시 만나 좋은 이야기를 나누지요.

소라이: 제가 더 많이 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소라이가 구상하는 사회


소라이가 구상하는 사회

 

소라이: 저는 에도 시가지를 평화로운 시가지로 만들기 위해서 방법을 조금 달리 했습니다. 들어보시지요. 에도에는 원래 거리의 안전을 담당하는 책임 공무원도 있습니다. 그런데 에도 시가지 전체를, 그렇게 넓은 지역 전체에 걸쳐있는 도로를 겨우 한 두 사람의 담당자가 두루두루 통제하기는 불가능합니다. 도둑을 담당하는 공무원도 있지요. 즉 방화나 도둑을 조사하는 공무원이 에도 시가지에 배치되어 있기는 하지만 엄청나게 많은 숫자의 에도 거리를 한 두 조직의 공무원으로 구석구석 통제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율곡: 그렇지요. 에도와 같이 큰 도시는 향촌의 시골마을과는 다르지요.

소라이: 옛날에 도둑을 담당하는 공무원이 있었습니다. 나카야마 카게유(中山勘解由, 1633∼1687)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아주 엄격한 사나이였습니다. 그는 도둑을 체포하면 곧바로 사형시켜버렸지요. 그래서 도둑들이 무서워서 모두 자취를 감추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에도에 막부를 설치한 초기의 지배 방법이었습니다. 말하자면 무력과 권위를 보여줌으로써 나쁜 사람들이 두려움에 떨며 조심하도록 한 조치였지요.

율곡: 법가주의이군요. 무사의 나라답습니다. 비웃는 것이 아니고 진실로 그렇습니다. 교육이 아니라 엄격한 법에 의해서 도둑을 제압하는 것은 아무래도 한계가 있습니다.

소라이: 그렇습니다. 그런 방법으로 모든 도둑을 전부 소탕해버릴 수는 없는 법입니다. 당시의 엄격한 유풍이 남아 있어서 지금도 그런 제도가 남아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그 때와 비교해보면 막부의 정치 방침도 변했습니다. 요즘 담당자들도 나카야마 카게유와 같은 사람은 아주 드물게 되었습니다. 또 시대가 평화롭게 되면서 무슨 일이든지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는 분위기가 형성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위와 같이 숫자가 적은 인원으로는 에도 전체에 손길이 다 미치지 못합니다.

율곡: 그렇지요. 많은 관료와 담당자들이 필요하겠지요.

소라이: 일본이나 중국 고대의 법제를 생각해보면 도둑이나 범죄자들을 체포하는 것은 궁성 수비대의 역할이었습니다. 그들은 일본에서 현재 경찰업무를 담당하는 요리키(與力)나 도신(同心)에 해당합니다. 하지만 수비대에서 형벌을 집행하는 일은 일본에서도, 중국에서도 선례가 없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어떤 공무원이 형벌을 집행하는 권한을 쥐고 있다고 하면 사람들은 그 사람에게 뇌물을 주어서라도 죄를 면하려고 하는 것이 서민의 당연한 심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수비대는 체포하는 일만을 임무로 하고, 체포한 자는 형벌을 관장하는 다른 공무원에게 넘겨주어 그 공무원이 죄를 조사하여 살리든지 죽이든지 조치를 취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재는 도둑 담당 공무원이 형벌을 집행하고 있기 때문에 요리키나 도신이 죄인으로부터 뇌물을 받아서 자기 멋대로 조치를 취할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원래 옛날의 법제와 다릅니다.

율곡: 소라이 선생님은 그런 문제까지 꼼꼼하게 체크를 하셨군요. 행정의 달인이십니다.

소라이: 과찬이십니다. 계속 말씀드리면, 넓은 에도 시가지에서 무가(武家, 무사들)의 거주지나 일반 시민의 거주지에 숨어 있는 범죄자를 찾아낼 방법은 없습니다. 이 때문에 죄인의 체포를 전문적으로 담당하는 관리들을 양성해두고 그들이 범죄자를 찾는 전담 공무원으로서 직책을 수행해나가도록 하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는 실정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범죄자를 적발하는 담당자가 사실은 원래 범죄자 출신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이용해서 범죄자를 적발하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결국 여러 가지 나쁜 일을 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자명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원래의 제도가 불완전한 상태에서 그런 직책에 임명된 것이기 때문에 임명된 자는 하는 수 없이 그런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율곡: 결국 도둑에게 도둑을 잡게 하는 것이군요. 그러면 구조적으로 문제가 있을 수밖에 없지요. 도둑을 잡는 사람들이 도둑들과 결탁하면 근본적으로 도둑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겠지요.

소라이: 그렇습니다. 또 다른 측면에서 살펴보면 요리키나 도신의 급료가 아주 적습니다. 옛날에는 그래도 편하게 생활할 수가 있었지만 최근에는 세상의 물가가 모두 크게 올랐기 때문에 누구나 생활이 곤란합니다. 특히 도신과 같은 낮은 신분의 관리는 급료로 가족을 부양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모두 부업으로 여러 가지 세공물을 만들어 팔아 그 수입과 급료를 합하여 아내와 아이들을 부양하며 집을 보유하고 자기가 맡은 당번 근무를 수행합니다.

당번 근무라는 것은 한 달에 3일 정도인데, 이렇게 가벼운 근무를 수행하는 것조차도 위와 같은 실정입니다. 그런데 일반적인 요리키나 도신과 달리 도둑 담당 조직에 소속된 경우라면, 겨우 한 조직이나 두 조직으로 도둑을 체포하기 때문에 매우 바쁩니다. 매일 밤이나 낮이나 요리키나 도신이 여기저기를 순회하면서 돌아다니지 않으면 안 되지요. 외출하려면 의복도 집에 있을 때와 다른 것을 입게 되고, 짚신이나 도시락 등에 들어가는 경비도 필요합니다. 너무 가혹한 업무지요.

율곡: 그것은 조선의 상황과 비슷합니다. 지방 관리에게 충분한 급료를 못주니 지방 관리들이 어쩔 수 없이 백성들의 먹을 것을 빼앗게 되는 것이지요.

소라이: 예, 관리들이 매일 나가서 돌아다닌다면 안에서 근무할 틈이 없게 됩니다. 그것은 놔두고라도, 급료가 부족하니 무엇으로 부모와 처자를 부양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신분의 관리에게 형벌의 권한을 맡기기 때문에 아무리 정직한 사람이 임명된다고 하더라도 그들에게 언제까지나 부정한 일을 저지르지 않도록 하는 것은 매우 곤란합니다.

율곡: 그렇지요.

소라이: 이런 사태가 된 것은 막부의 중요한 직책을 담당하는 사람들이 모두 다이묘(大名)의 신분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세상 물정을 모르는 것이지요. 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부귀하기 때문에, 아무리 재능이나 지혜가 있더라도 민간의 실정을 잘 모르고 아랫사람들의 생활 상황을 잘 알지 못합니다. 또 학문을 모르기 때문에 일본이나 중국에서 시행한 옛 시대의 법제와 비교 고찰하는 것도 할 수 없습니다. 단지 옛날부터 전해지는 관례의 형식만을 지키고 정무를 수행할 뿐입니다. 결국에 이치를 앞세워 살펴본다면 무리한 추진이라고 할 수 있으나, 그러한 점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율곡: 결국, 고위 관료들의 문제이고 군주를 둘러싼 정치의 문제이기도 하지요.

소라이: 저는 그래서 바둑판에 질서 정연하게 선을 긋는 것처럼, 에도 전체를 잘 계획해서 확실하게 장악, 관리하자는 것입니다. 저의 핵심적인 의견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구체적인 방법으로는 무가(武家) 거주지가 있는 지역도 일반 시민의 거주지처럼 거리마다 나무로 만든 출입구, 즉 기도(木戶)를 설치하여 출입구마다 지키는 사람, 즉 ‘기도 담당(木戶番)’을 두는 것입니다. 지금은 일반 시민들만 그렇게 통제가 되어 있는데, 관료들인 무사들의 거주지도 그렇게 하자는 것이지요.

율곡: 역시 제도를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자는 주장이시군요.

소라이: 그렇습니다. 거리마다 담당자를 임명하여 여러 가지 일에 대해서 각 거리에서 상담을 하도록 하고, 도둑이나 혹은 사체를 유기하는 자가 있다면 출입구를 닫도록 합니다. 만약에 그런 일이 야간에 일어나면 각목을 부딪쳐 소리를 내거나 대나무 피리를 불어 인접한 거리 거리에 알리도록 합니다. 사전에 규칙을 정하는 것이지요. 또 무사들의 거주지마다 출입문을 설치하여 야간의 통행을 금지합니다. 영주(大名)가 아니거나 혹은 하인에게 창이라도 쥐어줄 수 있는 정도의 신분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은 특히 엄중하게 통과를 금지해야 합니다.

율곡: 흥미로운 발상입니다.

소라이: 에도 시가지 전체를 이와 같이 합니다. 그래서 공무로 통행하는 사람이나 그렇지 않고 개인적 일이라도 임신부나 급한 병에 걸린 사람을 치료하러 가는 산파, 즉 조산부(助産婦)나 혹은 의사 등을 보내고 맞이하는 경우에는 각 문마다 차례차례 확인하면서 통과시킵니다. 순차적으로 거리에서 거리로 통과시키거나 금지한다면 위에 소개한 여러 가지 나쁜 일들은 자연히 사라질 것입니다.

율곡: 하하, 백성들을 철저하게 시가지 내에 가두어서 살게 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 조선 사람들 같으면 바로 반란이 일어날 겁니다. 답답하다고.

소라이: 에도에서 모든 무가의 거주지는 원래 직무상 하나의 조직에 속한 사람들을 하나의 거주지에 모아서 거주시키려고 계획을 했습니다. 대번(大番 오반, 에도성의 경비대)이 원래 12조직으로 나뉘어 있는 것에 대응하여, 거리도 1번(一番) 거리에서 6번 거리까지 각각 바깥과 안쪽으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12조직에 상응하는 12곳의 거리가 거주 구역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는 그 때는 대번팀(大番組)의 멤버인 번사들(番士, 당번이 된 무사)뿐만 아니라 그 아래에 소속되어 있는 요리키나 도신 등 하급 신분의 관리들도 함께 조직별로 모여서 집단을 이루고 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다른 직책으로 전근을 가게 되는 경우도 생기고, 다시 새롭게 조직에 들어오는 경우, 그리고 직무에 과실이 있어 면직된 경우도 생기면서 그러한 질서가 흐트러지고 혼란스럽게 된 것입니다.

율곡: 신기한 제도가 있었군요. 하나의 마을이 정부의 한 조직에 대응하도록 짜여 있었군요.

소라이: 그렇습니다. 그러던 것이 시간이 흐르면서 흐트러진 것이지요. 특히 권위가 있고, 높은 지위에 오른 사람들이 자기들 마음에 맞는 거주지를 선택하였기 때문에 이 제도가 혼란스럽게 되어 지금은 같은 직책이나 같은 조직에 속한 관리들이 서로 다른 곳으로 나뉘어 살게 된 것입니다. 그런 결과 지금은 다른 직책이나 다른 조직의 사람들이 서로 이웃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같은 조직의 무사가 무사(武士)로서의 인품이 갖추어져 있는지, 그 집안의 살림살이가 어떤지 서로 살펴볼 도리가 없게 되었지요.

율곡: 당연하게 그렇겠지요.

소라이: 같은 거리 안에서 살고 있다면 자기 집안의 상세한 일까지 무엇이든지 이웃 사람들에게 알려질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이웃사이에 서로가 상세하게 안다고 하더라도, 직장에 출근하면 서로 다른 직책과 다른 조직에 소속되어 있기 때문에 상호간에 간섭하지 않고, 한집 한집이 모두 자기 멋대로 살아가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무사들은 매우 버릇없고 이기적이 되었으며 무슨 일이나 속박을 받지 않고 방탕하게 되었습니다.

율곡: 그러면 선생님의 제안은 무엇인지요?

소라이: 저는 그래서 어떻게든지 옛날의 법과 제도처럼, 번사들이나 요리키, 도신들도 모두 같은 조직에 속한 자들은 한 곳에 함께 거주하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조직의 대표자도 같은 곳에 거주를 시켜 다른 직책을 맡아 전근을 하거나, 신규로 자기 조직에 들어오는 자가 있을 경우에는 거주지를 바꾸어 주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한다면 조직의 대표자는 자기 조직에 속한 자의 사람 됨됨이라든지 뭐든지 상세히 알 수 있기 때문에 도둑 담당 관리 등이 자기 부하의 나쁜 일을 모르는 경우는 완전히 없어질 것입니다.

율곡: 다소 이상하지만, 흥미로운 통제방법입니다.

소라이: 만약에 이러한 제도를 시행하였는데도, 자기 조직에 소속한 사람들을 잘 통제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그 조직을 맡은 책임자가 능력이 없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꾸로 이러한 제도를 실시하지 않으면 조직의 책임자로 누구를 임명한다 하더라도 훌륭하게 조직을 통솔해나갈 수는 결코 없을 것입니다. 물론 위와 같이 거주지를 바꿔가면서, 그리고 조직의 책임자까지 한 곳에 거주를 시킨다는 것은 대단히 힘든 일로 금방 실행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충분하지는 않지만, 거리마다 담당자를 정해두고 각거리에서 발생하는 여러 가지 일을 조직이나 직책과는 상관없이 정해둔 담당자가 모두 관리를 하도록 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율곡: 마치 현대 일본의 고반(交番)과 비슷하군요. 물론 기능은 많이 다르지만.

소라이: 그리고 같은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서로 친하게 교류를 하는 것이 좋습니다. 현재의 풍속처럼 서로 허세를 부리고 집집마다 자기 멋대로 생활해서는 노름이나 시문(詩文)을 이용한 도박 등을 찾아낼 수가 없습니다. 상속이나 양자에 관해서 거짓이 있는지 없는지도 조사할 수가 없으며, 개인의 행실이나 살림살이가 엉망이라고 하더라도 알 수가 없습니다. 또 직급이 낮은 무사이면서 집을 지키는 가족이나 하인이 많지 않을 경우, 만일 화재가 발생하거나 도둑이 들었을 때에 혹은 부하들이 서로 싸움을 할 때에는 그런 사태를 장악하고 처리할 사람이 없어 매우 불편합니다.

그러한 일이 발생할 경우에는 위와 같은 제도를 만들어 둔다면, 바둑판에 미리 줄을 그어놓은 것과 같습니다. 그런 일이 일어난 뒤에는 어떻게 해서라도 바둑을 둘 수가 있는 것처럼 조직적으로 일을 처리해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이와 같이 한다면 처음에는 그것이 부자유스럽게 생각되어 싫어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입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사회 풍속으로 자기들 멋대로 하는 일에 습관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지장이 생기는 일도 있겠지만, 나중에 시간이 지나면 에도 시가지는 결국 평온하게 되고 치안이 잘 유지될 것입니다.

율곡: 전부 듣고 보니 매우 이상한 제도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농공상을 말씀하시면서 사회전체가 군사조직에 가깝다는 말씀을 하셔서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제 생각으로는 이상한 제도인 것 같습니다.

소라이: 그렇게 생각이 드실 겁니다. 그러나 아마도 많은 일본사람들은 선생님처럼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을 겁니다. 저 혼자만의 생각도 아닙니다. 이미 일부는 에도시대 초기에 시도했던 제도이기 때문이지요.

율곡: 알겠습니다. 선생님은 제도와 법률에 의해서 백성들을 잘 다스릴 수 있다고 하셨는데 그 뜻을 잘 알겠습니다. 저는 선생님의 생각과는 반대 지점에 서 있는 것 같군요.

대동사회와 향약


대동사회와 향약

 

율곡: 남의 물건을 훔치는 도둑이나 건물에 방화를 하는 사람들은 그들 심성의 문제가 크지요. 사람들이 드믄 길에서 강도짓을 하는 사람들도 그렇고 나이 어린 부랑자들도 그렇고 사람 시체를 몰래 버리는 문제도 그렇고 도덕과 교육의 문제가 크다고 봅니다.

소라이: 선생님은 역시 정통 유학자이시며, 정통 성리학자이시군요.

율곡: 저는 1571년에 청주목사로 임명된 적이 있었지요. 그곳에서 향약(鄕約)이라는 것을 만들어 실시해본 적이 있었습니다. 향약이란, 소위 향촌 사회의 자치규약이지요. 어떤 사람들은 조선 중기에 지방의 사림이 농민이나 노비 등 하층민을 강력하게 지배하기 위해서 만들었다고 하는데,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유교 윤리를 기반으로 농촌의 공동체를 유교에서 말하는 대동사회로 이끌어가는 수단이지요.

소라이: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대동사회란 무엇인지요.

율곡: 제가 생각하는 대동사회는 ⌈예기⌋ 예운편에 나오는 대동사회와 같은 것이지요. 말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큰 도가 행하여지자, 사람들은 천하를 모든 사람들의 것으로 생각했다. 어질고 유능한 인물을 선택하여 정치를 맡겼고, 서로 믿고 화목하도록 가르쳤다. 그래서 사람들은 단지 자기의 어버이만을 친애하지 않았으며 단지 자기 자식들만을 사랑하지 않았다. 늙은이들이 그 생을 편안히 마칠 수 있게 되고, 장년들은 항상 쓰일 곳이 있게 되었으며, 어린아이들은 의지하여 성장할 곳이 있게 되었다. 홀아비나, 과부, 고아 그리고 자식이 없는 사람들, 폐질에 걸린 사람은 모두 다 부양을 받을 수 있게 되었으며 남자는 자기 직업이 있고, 여자는 모두 돌아갈 남편의 집이 있었다. 재화가 헛되이 땅에 버려지는 것을 꺼려하였지만 반드시 자기만 사사로이 감추어 두지 않았으며 몸소 일하지 않는 것을 미워했지만 반드시 자기만을 위해서 일하지는 않았다. 이래서 간사한 꾀가 막혀서 일어나지 못했고, 도둑이 훔치거나 도적들이 난을 일으키지 못했다. 그래서 바깥문을 여닫지 않았으니 이것을 대동의 세상이라고 한다.

소라이: 제가 생각하는 사회도 결국은 그런 것이지요. 다만 그 과정이 조금 다르지만요.

율곡: 저는 그 다음해 청주에서의 일을 사양하고 해주로 내려갔다가 고향인 파주 율곡 촌으로 돌아가 학문에 힘썼습니다. 청주목사 때, 서원향약을 만들어 실시하면서 다소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래서 한동안 임금 앞에서 향약을 반대하기도 했지요. 예를 들면 이런 주장을 하기도 했지요.

“요사이 신하들이 급히 향약을 행하고자 청하므로 주상(임금)께서도 행하도록 명령하셨으나 신의 생각으로는 향약을 행하기는 너무 이르다고 생각합니다. 백성이 잘 살도록 하는 일을 먼저하고, 백성을 가르치는 일은 나중에 해야 합니다. 백성들의 삶의 고통이 오늘날보다 더 심한 때가 없으니, 시급히 모든 폐단을 빨리 없애서 거꾸로 매달린 듯한 백성들의 고통을 풀어준 다음에야 향약을 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도덕 교육은 쌀밥과 고기반찬과 같은 것입니다. 만약 건강이 아주 나빠서 죽도 잘 소화가 안 된다면 쌀밥과 고기반찬이 아무리 좋은들 먹을 수 있겠습니까?”

소라이: 그렇지요. 배가 부른 뒤에 예의가 있는 것이지요. 경제적으로 안정이 되어야지요.

율곡: 당시 궁정에서 제 의견에 반발하는 사람들이 많았지요. 어떤 사람은 제 면전에 대고 비난을 하기도 했지요. 그런 사람에게 저는 이렇게 반박했습니다.

“당신의 생각에는 민생의 곤란이 아무리 심하여도 향약만 행하면 과연 백성을 교화시켜 좋은 풍속을 이루어 정치가 태평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되오?”

그랬더니 그 사람은 “그렇소.”하고 대답하기에, 제가 그럼 “당신은 능히 향약으로 집안을 다스리고 있소?”라고 물었지요. 저는 또 그 사람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전부터 민생이 도탄에 빠지고도 예속(禮俗: 예의 풍속)을 이루는 일이 있소? 지금 부자간이 비록 지극히 친한 사이라고 하지만 만일 아들의 기한을 생각해 주지 않고 날마다 매질이나 하며 학문을 권한다면 반드시 서로 헤어지고 말 것인데 하물며 백성들은 어떻겠소?”

제가 당시 그렇게 향약을 반대한 것은, 지방에 가보니 지방에서 큰소리치는 관리나 유지들이 향약을 핑계로 백성들을 매우 괴롭혔기 때문이요. 그것을 걱정한 것이지요. 그런 나쁜 사람들을 누가 단속할 것인가? 만약 향약을 행하게 되면 백성들은 더욱 곤란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서 반대한 것이지요. 하지만 향약 자체는 반대하지 않습니다. 향약은 필요하지요. 그래서 나중에 다시 향약을 시도해서 나중에 해주향약(海州鄕約)을 만들었는데, 후세 사람들은 그 향약의 체제와 내용이 잘 짜여 있어서 조선 향약 중 가장 완벽한 것으로 평가하기도 합니다.

소라이: 해주 향약은 어떤 내용인지요?

율곡: 예, 농촌의 같은 마을 사람들, 즉 향약 구성원들 가운데 수재나 화재를 만나면 서로 돕게 했습니다. 그리고 도둑이 들었을 때나 질병과 상사(喪事)가 있을 때, 그리고 어린 자녀를 두고 어른이 죽었을 때도 주위 사람들이 그 남은 자식들을 돌보도록 했지요. 너무 가난한 사람이 있을 때도 주위 사람들이 상부상조하는 정신으로 그들을 돕게 했습니다. 그럼으로써 농촌 사회가 평화롭고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했지요.

개혁방법의 차이


개혁방법의 차이

 

소라이: 그런데 선생님의 개혁안을 보고 제가 깜짝 놀란 것이 있습니다.

율곡: 무엇인지요?

소라이: 임금에 대한 건의가 너무도 많다는 것입니다.

율곡: 어떻게 많다는 것인지요?

소라이: 예를 들면 ⌈만언봉사⌋(1. 상하가 서로 믿는 실질적인 노력이 없음을 논함)에서 선생님은 이렇게 건의합니다.

“임금께서는 밝은 지혜가 넉넉하시지만 덕이 넓지 못하시고, 착한 것을 좋아하하기는 하시나 의심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여러 신하들이 의견을 올리려고 힘쓰면 지나친 월권이라고 의심하시고, 기개와 절개를 높이는 자를 보면 과격하다고 의심하십니다. 신하 가운데 어떤 자가 여러 사람들의 칭송을 받으면 당파가 있어 끼리끼리 어울린다고 의심하시고, 신하 중에 어떤 사람이 죄가 있을 경우, 그를 공격하면 삐딱하게 모함한다고 의심하십니다.”(원문을 현대어 문장으로 의역함, 이하 같음)

저는 우선 이렇게 한 나라의 최고 권력자에게 무차별적으로 직언을 한다는 사실이 무척 놀랍습니다.

율곡: 허허, 그게 그렇게 놀라운 일인가요?

소라이: 저는 제가 제시하는 개혁안(⌈정담⌋)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최고 직위에 있는 군주에게는 그렇게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요구가 거의 없다고 할 수도 있지요.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도는 성인이 창조한 것입니다. 또 거꾸로 말한다면 성인이란 도를 창조한 사람이지요. …… 옛날에 도를 예악형정(禮樂刑政)의 제도로 체계화한 사람은 요․순․우․탕 그리 문왕과 무왕 등 이른바 삼대의 군주들입니다. 그들이 성인 중에도 성인들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성인이 성인인 까닭은 어디까지나 예와 악을 만든 사람들이라는 점에 있는 것이지, 그 사람들이 도덕을 완전무결하게 모두 갖춘 사람들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성인도 어디까지나 사람일 뿐입니다. 그들에게 도덕을 요구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규 소라이, ⌈일본정치사상사연구⌋, 211-212참조)

선생님은 임금에게 덕이 넓지 못하고 의심이 많다고 지적하시지만 사람의 덕은 그 사람의 성(性)에 따라 서로 다릅니다. 비록 성인이라 하더라도 그 덕이 어찌 하나같이 다 같겠습니까?

율곡: 제 생각하고는 많이 다르시군요.

소라이: 예, 그렇지요. 선생님이 위에 제시한 내용 외에도 ⌈만언봉사⌋를 보면 군주에 대한 요구가 너무 많습니다. 예를 들면

‘보필하는 신하들이 맡은 일에 실질적 노력이 없다(臣隣無任事之實)’, ‘경연(經筵)을 해도 성취되는 실질적 노력이 없다(經筵無成就之實)’, ‘현인을 등용하는 실질적 노력이 없다(招賢無收用之實)’,
‘재이(災異)에 대응하는 실질적 노력이 없다(遇災無應天之實)’,
‘여러 정책에서 백성을 구제하는 실질적 노력이 없다(群策無救民之實)’
등도 거의 모두 임금을 향한 요구가 아닙니까?

율곡: 구체적으로 어떤 점인지요?

소라이: 예를 들면 경연과 관련하여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요즘에는 경연을 자주 열지 않아 신하들이 임금을 접견하는 일도 드물지만, 경연을 열어도 전하께서 예를 차리는 모습이 엄숙하여 참석자들이 말을 자연스럽게 하지도 못합니다. 게다가 문답이 매우 드물지만 전하께서 따져서 묻는 것도 자세하지 못할뿐더러, 정치의 요체와 시대의 당면한 폐단을 물어보신 적이 없습니다.

간혹 한두 명의 강관(講官)이 성학(聖學)에 힘쓸 것을 권하면, 전하께서는 대수롭지 않게 들으시기만 할 뿐, 달리 체험해 보고 실천해 보시려는 실질적 노력이 없습니다. 경연을 마친 뒤에는 대전(大殿) 안이 깊어서 전하를 모시는 신하들은 바라보고 속만 태울 뿐입니다. 그러나 전하의 옆에는 단지 내시와 궁녀들만이 있으니, 전하께서 평소에 무슨 책을 보시고 무슨 일을 하시고 무슨 말을 듣고 계시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가까운 신하들도 그것을 알 수 없는데 하물며 밖에 있는 신하들은 어떻겠습니까?

율곡: 이런 제안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요?

소라이: 선생님은 한 나라를 개혁하는데 임금의 의지와 마음가짐이 중요하다고 보시는 것이지요? 위에 열거한 문제들도 임금이 도두가 임금의 도덕적이며 실천적인 의지와 관련된다고 생각하시지요?

율곡: 그렇지요. 그러면 선생님은 그럼 어떻게 정치를 개선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지요?

소라이: 저는 우선 정치는 최고 통치자와는 그렇게 큰 관련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제도를 만들면 될 뿐입니다. 말하자면 법과 룰을 만드는 사람들이니 그들은 그것을 잘 만들어내기만 하면 됩니다. 그래서 저는 정담의 맨 첫머리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예를 들면 바둑판에서 치수를 정확히 재서 종횡으로 선을 긋는 일과 같습니다. 바둑판에 선을 그어 넣는 것이지요. 그렇게 전체를 조망한 계획에 따라 모든 일을 추진해나가는 것입니다. 선이 그려져 있지 않은 바둑판에서는 아무리 바둑을 잘 두는 사람이라도 바둑을 제대로 둘 수가 없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계획이 없이 정치는 불가능합니다. 또 하천의 홍수를 막기 위해서는 지형을 고려하여 물이 잘 흘러가도록 우선 강의 물줄기를 만들지 않으면 안 됩니다. 물줄기를 만들지 않고 단지 홍수를 막으려고만 해서는 설사 우왕(禹王)과 같은 치수(治水)의 달인이 다시 태어난다고 하더라도 성공할 수 없습니다.

율곡: 정치하는 과정을 중시하시는 군요. 그러니까 단계를 거쳐서 일을 해야 한다, 이것이지요?

소라이: 구체적인 제도와 법률로 정치를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최근에 에도에 있었던 실제 사례가 있습니다. 에도에서 시행한 화재 예방 조치이지요. 막부가 에도 시가지에 있는 건축물에 대해서 4면의 벽에 흙을 칠하도록 한 적이 있습니다. 건물의 모든 벽을 흙벽으로 칠하라고 지도를 하여 사람들이 자기 집을 모두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에도에서 일어난 화재가 그 이전과 비교해서 많이 줄었습니다. 이렇게 구체적인 행정지도와 방안을 제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율곡: 그러한 일이 중요하기는 하지요. 그것이 말하자면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국가를 다스리는 근본적인 방법’인가요?

소라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저는, 화재 예방 이외에 막부의 정치에 관해서는 누구도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는 사람들이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일본이나 중국에서 옛 시대에 행해진 정치의 방법에 근거하여 상세하게 제 생각을 제시한 것입니다. 그것이 저의 ⌈정담⌋이라고 하는 개혁론입니다.

율곡: 그래서 결국, 선생님의 개혁 구상에는 일본의 최고 실력자인 쇼군의 역할이 잘 보이지 않는군요. 그 점은 저의 개혁론과 너무 다릅니다. 사회를 바꾸기 위해서는 최고 통치자의 의지와 마음이 중요하지 않는지요?

소라이: 그렇습니다. 저는 최고 통치자보다는 그 최고 통치자가 만들어내는 법률과 제도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군주의 마음 수양이 아니라, 군주가 만든 제도와 법규가 세상을 바로 잡아갈 수 있다고 본 것이지요.

율곡: 저와는 생각이 많이 다르군요.

소라이: 그런 방향이 제가 주장하는 고문사학, 즉 소라이학의 큰 지향점이지요.

율곡: 그럼 바둑판 이야기를 하셨는데 구체적으로 그런 제안이 있는지요? 한 가지만 소개해주시면 어떨까요? 정치의 구체적인 방법으로.

소라이: 예, 우리 에도에서 요즘 문제가 되는 일을 한 가지 소개하겠습니다. 요즘 에도에 도둑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여기저기에 나타나 사람을 죽이거나 물건을 훔치고 있지요. 아니면 건물에 불을 지르거나 야간에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곳에서 숨어 있다가 강도짓을 합니다. 또 나이어린 부랑자들이 칼을 빼 들고 사람을 위협하여 사람들이 도망가는 것을 보고 즐기기도 합니다.

율곡: 한양에도 그런 일이 가끔 있기는 합니다만.

소라이: 심한 경우에는 아이를 길에 버리거나 사람의 시체를 몰래 버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행위를 제지하는 일은 어렵습니다. 누가 “사체를 버리는 사람이 있다.”고 소리를 지르면, 그 주변 사람들은 야단법석을 피우면서 서로 자기 집 앞에는 못 버리게 할뿐입니다. 버리는 행위 자체를 제지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각 집의 담장 바깥은 사람들이 왕래하는 도로이기 때문에 그곳을 책임지고 관리하는 사람도 없지요. 그러니 에도 전체가 무질서하게 됩니다. 이것이 지금 에도의 가장 큰 문제입니다. 선생님은 이런 문제를 보면 어떻게 해결하시겠습니까?

율곡학


율곡학

 

소라이: 그렇습니다. 저의 소개가 많이 길어졌습니다. 저는 선생님의 율곡학에 대해서 호기심이 많습니다. 상세히 소개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율곡: 몇 가지 후인들이 평가한 내용을 중심으로 저의 학문을 소개하기로 하지요. 먼저 제 학문은 나중에 한국에서 김장생, 김집, 송시열, 권상하, 한원진 등 서인과 노론 혹은 소론으로 이어집니다. 이들과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은 제가 일시적이나마 승려였기 때문에 성리학자가 아니라고 논박하기도 했지요. 하지만 저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계속 성균관 문묘 종사 운동을 벌이고 또 그 사람들이 집권을 하면서 문묘에 종사되고, 조선에서 퇴계 이황의 위상에 대응할 수 있는 존재로 추앙을 받게 됩니다. 사실상 임진왜란 뒤 조선이 끝날 때까지 저를 지지하는 학자들이 계속 정권을 장악하게 되어 저의 위상은 퇴계보다 더 높게 평가되기도 했지요.

소라이: 그렇군요.

율곡: 저의 학문은 정통 성리학에 근거합니다. 선생님은 성리학을 비판하시지만 조선에서는, 적어도 주류 학자라면 성리학을 벗어나 다른 학문을 영위할 수 없습니다. 어찌 보면 일본 에도시대보다 학문적인 폭이 좁았지요. 저는 비교적 논리적으로 성리학 이론을 따지는 편이고, 그런 학문이 실생활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고 보았지요. 공리공담은 싫어했습니다. 실지로 관료생활을 하면서 그런 쓸모없는 토론보다는 실용적인 토론에 더 관심이 많았지요. 나중에 조선에 등장하는 실학은 저의 영향이 큰 것으로 평가됩니다. 말하자면 저의 그런 관점을 실학의 효시로 보기도 하지요.

소라이: 조선에서 실학의 원조이시군요.

율곡: 그런 셈입니다. 그렇다고 나중에 저를 추종하는 학자들이 모두 그런 방향으로 간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관념적, 교조적인 이론으로 빠진 경우도 많습니다.

소라이: 실학과는 반대되는 경향이군요.

율곡: 저는 조선의 개혁에 많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제가 살던 시대는 조선이 건국한 뒤에 시간이 흘러 사회가 쇠퇴해가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지요. 기존에 정비된 각종 제도가 무너져가고 사치가 만연하며 나라의 쇠락이 경각에 달려있다고 보았지요.

소라이: 그래서 제시한 것들이 ⌈동호문답⌋, ⌈만언봉사⌋ 등 개혁안이지요.

율곡: 그렇습니다. 저는 성리학자로 주자의 이기론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리는 형이상자이며 존재의 근원이자 원리이며, 기는 형이하자로 물질적 존재자이지요. 주자가 주장한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러한 리와 기가 서로 발동한다는 퇴계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비판했습니다.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이지요. 저는 리와 기가 사실은 하나나 마찬가지라고 보았습니다.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선후가 없다고 본 것이지요. 이러한 주장을 일부 후인들은 퇴계의 주리설(主理說)과 대응시켜 주기설(主氣說)이라고 평가하기도 했지요. 그렇다고 제가 기의 뿌리인 리를 부정한 것은 아닙니다. 또 저는 는 서로 떨어지지 않고(理氣不相離), 서로 섞이지도 않는다고 주장했습니다(理氣不相雜). 그리고 이런 것을 합하여 리와 기의 오묘함(理氣之妙)으로 정리를 했습니다. 사실 이론에 치우친 이론일 뿐입니다.

소라이: 그 부분에 대해서, 저는 문외한입니다.

율곡: 문외한이시라기 보다는 비판자이시지요? 선생님은 이기론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소라이: 사실 그렇지요. 그러한 논의에 대해서 저는 관심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하하.

율곡: 저는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감정이 발동할 때 도의를 위해서 발동하면 도심이요, 육체를 위해서 발동하면 인심이라고 보았습니다. 사실 인심과 도심은 한 가지 마음이지만 발동하는 원인에 따라 이름이 다를 뿐입니다. 마음은 하나인데, 성명(性命)에서 나오면 도심이요, 형기(形氣)에서 나오면 인심이지요.

소라이: 저는 그러면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형기(形氣)를 중시하는 편에 속합니다. 인간에게 도심은 없다. 인심이 모든 것이다, 이렇게 보는 편입니다.

율곡: 그런가요? 더 설명을 드리자면 임금에게 충성하고 어버이에게 효도하는 마음은 도심이요, 배고프면 먹고 싶고, 추우면 먹고입고 싶은 마음은 인심이지요. 제 생각에 인심은 자라나게 해서는 안 되고 절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도심은 마땅히 보호하고 양육하여 넓혀나가는 것이 좋다고 보고요.

소라이: 흥미로운 설명입니다. 일본 사상에서는 깊게 논의하지 않은 부분입니다. 일부 유학자들은 그 점에 대해서 논의도 하지만 저는 역시 그 문제에 대해서는 문외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