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용익(南龍翼, 1628~1692)


남용익(南龍翼, 1628~1692)                               PDF Download

 

1655년 남용익이 참가한 조선통신사의 행렬도 (대영박물관 소장)
1655년 남용익이 참가한 조선통신사의 행렬도 (대영박물관 소장)
용익(南龍翼, 1628년~1692년)은 조선시대의 문신이며 학자다. 과거에 합격한 뒤,  문장과 글씨에 능하여 대제학,  이조판서등 요직을 두루거쳤다.  항상 근신하고 근면하였으며,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  이단상(李端相) 등과 교류하였고, 1655년 조선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와『부상록(扶桑錄)』을지었다.

1628년(1세, 인조6년)에 용인의 유곡(柳谷, 지금의경기도용인시처인구유방동)에서 부사 남득명(南得明)과 신씨(申氏) 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운경(雲卿), 호는 호곡(壺谷)이다 . 증조할아버지는 무주현감(茂洲縣監) 남복시(南復始), 할아버지는 의빈부도사(儀賓府都事) 남진(南鎭)이다.  어머니 신씨는 평산 신씨(平山申氏) 신복일(申復一)의딸이다.  부인은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채성구(蔡聖龜)의 딸을 맞이 하였다.

1646년(19세, 인조24년), 이해에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다.

1648년(21세, 인조26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남용익은어려서부터 글재주가 뛰어났는데,  이해의 정시문과에는 최연소로 급제하였다.  이후 승정원가주서(承政院 假注書), 시강원설서(侍講院說書),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 등을 거쳐, 예조정랑, 병조좌랑, 홍문관 부수찬등 요직에 임명되었다.

1655년(28세,효종6년) 통신사의 종사관으로 뽑혀 일본에 파견되었다.  사절단은 총488명으로 구성되었는데,  4월 20일 궁궐을 떠나 양재역(良才驛) 방향으로 길을 잡아 부산으로 내려갔다.  6월 9일 대마도에 이르렀다.  대마도에 이르러 도요토미히데요시(豊臣秀吉)의 위패를 모신 법당에 절하기를 거절하여 음식 공급이 일시 중지되었으며, 이후 여러 협박을 받았으나 굴복하지 않았다.
9월 26일 그가 지은 ⌈부상일록(扶桑日錄) ⌋의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이 일본 후지산을 지나는 장면이 보인다.

“오늘 여정이 길기 때문에 날이 밝기 전에 길을 떠나 새벽에 청견사(靑見寺)를 지났다.  절은 길가에 있는데 산을 등지고 바다를 향해, (우리나라와 달리마을의) 인가 사이에 섞여 있었다.  지붕이 옹기종기, 나무끝에 보이는데 행차가 바빠서 들르지 못하였다.  빙둘러서 한 언덕을 지나니 큰바다가 앞에 끝없이 펼쳐져 있다.  해가 이제 막 떠오르는데붉은 구름이 둘러쌌으며,  눈같은 물결이 깨끗하다.  바람에 나부끼는 돛은 뚜렷하게 비치고,  한가닥 폭포가 산기슭에서 흘러내린다.  우러러보니 후지산(富士山)이 말(馬) 머리에 도달해있다.  한 줄기 흰구름이 산허리 밑을 감추었고 정상에는 흰눈이 쌓여있다.  위 아래의 경치가 모두 살아있는 그림과 같고 밝은 거울과 같아 정신이 상쾌하였다. 산 아래를 빙 둘러지나서 후지가와(富士川)의 부교(浮橋)를 건넜다. 점심 때가 되어 요시하라(吉原)의 여관에쉬었다.”

10월 2일 드디어 통신사 일행은 일본의 수도 에도(江戶)에 도착하였다.  그날의 광경을 남용익은 이렇게 묘사하였다.

“에도(江戶)로 들어가는 길에 들어섰다.  가나가와(神奈川)에서 동쪽으로 70리거리다.   늦게 비가 올 징조가 있었으므로 행차가 정지하고전령이 왔다 갔다 말을 전하다가 한참 뒤에야 출발하였다.  바다를 옆에 끼고 수십 리를 나아갔다.  로쿠고바시(六鄕橋)를 건너는데 구경하는 사람들이 끊이지 아니하였다.  낮에 시나가와(品川)에 도착하였다. 관사를 새로 지어 아주 굉장하고 사치스러웠다.  그곳을 담당하는 관리들이 와서 기다리다가 이중으로 만든 찬합을 바쳤는데, 우리를 보호하면서 수행하는 왜인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점심을 먹은 뒤에 관대를 다시 갖추고 전진하였다.
여기서부터 에도에 이르기까지 한쪽으로는 바다를 옆에 끼고 다른 한쪽으로는 인가가 촘촘하게 물고기 비늘처럼 연결되어 있다. 구경하는 자가 빽빽하여 담을 쌓은것과 같고,  배를 타고 바다에 떠서 구경하는 사람도 또한 한쪽에 둘러있었다. 오후 2시경에 에도에 도착하였다.  관문 스물여덟 곳과 네개의 큰 다리를 지났다.
겹겹으로 늘어선 점포와 수많은 인파,  번창한 모습은 이루다 기록할수 없다.  고위관료의 권속들은 아황색의 발을 드리우고 비단 장막으로 둘렀다.  또 붉은담요를 바닥에 펴고 여종들이 밖에 둘러섰으며, 수많은 사무라이들이 곳곳에서 관광하는데, 칼을 받들어 모시고 서있는 자들이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혹자는 말하기를, ‘관백(도쿠가와쇼군)도 몰래와서 구경하였다.’ 고 한다.  숙소에 이르기 전 몇리쯤부터 목판으로 벽을 만들어 세웠는데, 질서 정연하고 아주 높으며 웅장한 것이 좌우 4~5리에 뻗쳐 있었다.  왜 그렇게 하였는지 물으니, ‘지난 24일에 화재가 나서 수 천여 가구가 불탔으므로 미처 수리하지 못한 곳에 이것으로 막아서 잿더미가 된것을 보이지 않게 하려는 것이라. ’하였다.   전날 우리 통신사 일행에게 곳곳에서 행차를 잠시 머물러 달라고 청한 것도 필시 이 때문이었던것 같다.  그들의 풍속이 과장되고 허탄하여 실속이 없음이 이와 같은것이다.”

일본통신사가 일본의 수도 에도에 들어가는 광경.
(1748년, 羽川藤永작품)

1656년(29세,효종7년) 2월 20일에 일본에서 귀국한 뒤, 호당(湖堂)  뽑혔다.  호당이란 인재양성제도의 하나로,  글재주가 있고,  장래가 유망한 젊은 관리 중에서 선발되었다.  장기 휴가를 받아 독서에 전념하도록 하는 제도였다.  이 해에문신 중시에 장원을 하였으며,  당상관으로 진급하였다.  또 형조, 예조참의 와승지에 임명되었다가 양주목사로 나갔다. 이해에 일본 통신사행을 기록한『부상록(扶桑錄)』을 썼다.

1666년(39세,현종7년) 진주사(進奏使) 부사의 신분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현종 연간에 대사간, 대사성을 거쳐 참판을 지냈으며,  경상감사, 경기 감사등 외직을 역임하고 형조판서에 올랐다.

1680년(53세,숙종6년), 이후좌참찬(左參贊),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을역임하였다.  이후대제학, 이조판서등 요직을 두루거쳤다.

1689년(62세,숙종15년), 소의장씨(昭儀張氏)가 왕자를 낳았다. 숙종이 새왕자를 원자로 삼으려하였는데,  그는 극력 반대하다가 함경도 명천(明川)으로 유배되었다.

1692년(65세,숙종18년), 2월에 유배지 명천에서 사망하였다. 1725년 ‘문헌(文憲)’ 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저서로 신라 시대부터 조선 인조 때까지 유명한 인물497인의 시를 모아 엮은 『기아(箕雅)』 가있다. 그리고 일본 통신사로 갔을 때의 일을 적은 『부상록(扶桑錄)』, 시문집으로 18권 9책의 목판본으로 발간된 『호곡집(壺谷集)』, 우리나라와 중국의 유명 시들을 골라 편집하고 평론을 곁들인 『호곡시화(壺谷詩話)』등이 있다.
남용익의 큰 아들은 충청도 관찰사를 지낸 남정중(南正重)과 1711년 (숙종37)에 통신사로 일본을 다녀온 둘째 아들 남성중(南聖重)이 있다.  손자는 동지돈령부사(同知敦寧府使) 남한기(南漢紀)이고, 증손자는대제학 남유용(南有容), 고손자는 영의정을 지낸 남공철(南公轍)이다.

<참고자료>
⌈부상록․부상일기⌋
윤용혁, 남용익,<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저자미상, 남용익,<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