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정중(閔鼎重, 1628-1692)


민정중(閔鼎重, 1628-1692)                                 PDF Download

 

정중(閔鼎重, 1628-1692)은 조선시대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로,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에게 학문을 배웠다. 숙종의 부인 인현왕후의 부친 민유중의 친형이며,  동래부사, 병조참의, 공조판서, 한성부윤 등을 역임하였다.  내직에 있을 때는 맡은 바 직책에 충실하였고,외직에 있거나 유배를 당했을 때는 가 는곳마다 유풍(儒風)을 크게 일으켜 사람들로부터 신망을 얻었다.

민정중의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연곡서원(문화재청 사진)
민정중의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연곡서원(문화재청 사진)

1628년(1세, 인조6년)에 태어났다.  본관은 여흥(驪興, 경기도 여주)이며,  자는 대수(大受), 호는 노봉(老峯)이다.  증조할아버지는 민여건(閔汝健),  할아버지는 경주 부윤을 지낸 민기(閔機),  아버지는 강원도관찰사를 지낸 민광훈(閔光勳)이며,  어머니는 이조판서 이광정(李光庭)의 딸이다. 형제로 여양 부원군(驪陽府院君)  문정공(文貞公) 민유중(閔維重)과 민시중(閔蓍重)이 있다.

1649년(22세, 인조27년, 효종즉위년)에 정시(庭試)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으며,  성균관 전적(典籍)으로 임명되어 벼슬에 나갔다.  그 뒤 예조좌랑, 세자시강원사서(世子侍講院司書)에 임명되었다.  직언(直言)을 잘하였는데,  임금이 그의 말을 훌륭하게 여기고 귀담아 들었다. 후에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을 거쳐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에 제수되고 교리(校理)로 임명되었다.

1652년(25세,효종3년) 임금이 대신들에게 어사(御使, 암행어사)에 합당한 자를 천거하도록 하자 홍처대 등과 함께 뽑혔다. 이후 전라도 어사로 파견되어 병영, 수영의 운영에 관한 보고를 올렸다.  그 내용은병조에 의해서 임금에게 보고되었는데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전라도 어사 민정중(閔鼎重)이 보내온 보고 가운데에서 ’각도의 병영과 수영(水營)에 있는 우후(虞候, 무관직으로 각 도에 배치된 병마절도사 및 수군절도사 다음가는 관리)의 호를 평사(評事)로 고치고 시종신(侍從臣, 임금을 보필하는 문관)을파견하도록’ 청하였는데 그 뜻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만약 이대로 실시하여 그들에게 순찰하여 조사하는 책임을 맡기는 한편 압력을 가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고, 또 주장(主將)과 군대 운영에 관한 일을 상의하며 군무(軍務)에 숙달토록 한다면, 현재의 일이나 뒷날의 쓰임에 어찌 보탬이 되는 점이 없겠습니까? 다만 (중략)
‘첨사(僉使)나 만호(萬戶)를 문신으로 뽑아 보내야 한다.’는 것도 역대 조정에서그런 일이 있긴 합니다만, 그것은 일시적인 특명에서 나온 것이므로 후세에 정상적으로 행할 법은 못 됩니다. 백성을 어루만지고 결단 나버린 고을을 소생시키는 것이야 문관에게 책임지울 수 있을지 몰라도, 위급하게 되었을 때 힘을 얻는 면에서는 필시 무사(武士)보다 못할 것인데, 문신으로 무신을 바꾸는 일이 과연 사리에합당한지는 모르겠습니다.

이해 9월에 호서 지방의 대동법 시행에 관해서 탐문하도록 명을 받고조사하였다.  또 다음해 3월에 암행어사로 임명되어 정치에 소홀한 여섯 고을의 수령을 파직시켰다.
민정중은 매사에 충직하게 맡은 바 일을 잘 수행했는데, 특히 국방의일에 관심이 많았다.  사람들은 그가 ‘뜻을 세워 학문에 힘쓰고,  어진인재를 등용하며,  곤궁한 백성을 돌보고,  변방의 방비를 잘하는 것을 회복하는 일을 중요한 조목으로 삼았다. ’(이재李縡의 비명碑銘)고 하였다. 예를 들면 이해 3월 경연의 자리에서 현종 임금과 함께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효종실록⌋ 8권, 효종3년 5월 15일)

민정중 :우리나라 군정(軍政)이 문란한 것은 실로 장수를 엄선하지 않는 데에 원인이 있습니다. 장수가 적합한 사람이 아니다 보니, 군율(軍律)이 엄격하지 못하고척후가 치밀하지 못합니다. 그래 가지고서야 어떻게 적의 실정을 탐지하여 기습병(奇襲兵)을 출동시킬 수 있겠습니까?

임금 : 우리나라 장수들은 적들과 진지를 마주하고 있으면서 몸을 바쳐 용감하게싸울 뜻은 없고 자기 한 몸 보호하는 것 밖에는 아무 것도 걱정하지 않는다. 보좌관 용감한 군사들은 뽑아서 좌우에 두고 임시 군관을 뽑아 척후의 임무를 맡겨 적의 실정을 살펴오도록 요구하니 참으로 우습다. 내가 일찍이 오랑캐들의 군대를 다스리는 기술을 보니, 군무(軍務)를 연마하고 병법을 익혀 행진(行陣)은 엄숙하고무기는 예리하였다. 그리고 그중에 가장 친하고 믿을 만한 자로 하여금 적의 실정을 정탐하게 하고 동태를 살피게 하였다. 그들이 전쟁에서 승리하여 공을 세울 수있었던 것은 모두 이러한 작전 때문이었다. 우리나라는 과연 이렇게 할 수 있겠는가?
옛 사람이 이르기를 ‘밭갈이는 남자종에게 묻고 길쌈일은 여자종에게 물어야 한다.’고 하였는데, 노비에 관한 말이 비록 문관과 무관의 일에 대한 비유로 취할수 있는 것은 아니나 문(文)이라 이름 하였으면 글을 읽고 학문을 강론할 뿐이며,무(武)라 이름 하였으면 병법(兵法)을 익히면 될 뿐이다. 무인을 등용하는 도는 차라리 거칠고 사나운 것이 지나칠지언정 나약하고 옹졸해서는 안 되는데, 오늘날 군사를 담당하는 관청이 슬기로운 힘을 지닌 자를 뽑지 않고 단지 글자나 아는 영리한 자를 뽑다보니 모두가 서생들뿐이다. 그런데 급한 상황에 적을 상대할 때에 서생을 쓸 수 있겠는가? 이는 우리나라 풍습 중 하나의 커다란 병폐다.

민정중 : 인재를 얻는 도리는 오직 정성을 다해 찾는 데 있습니다. 세상에 비록 문무를 겸비한 제갈량 같은 인재가 있다 하더라도 찾지 않으면 오지 않을 것이니, 훌륭한 인재가 없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임금 : 어찌 나라가 작다고 인재가 없겠는가? 우리나라는 둘레가 수천리나 되는 땅인데 어찌 인재가 없다고 단정할 수 있겠는가? 내가 관무재(특별히 왕의 명령으로시행하는 무과)를 다시 설치하고 싶다만 보고 듣기에 번거로울까 염려된다.

민정중 : 관무재는 역대 조정에서 이미 그와 같은 규례가 있었습니다. 후세에 새로창설한 일이 아니므로 실행하기에 번거롭지는 않을 것입니다. 지금 마땅히 수시로시행하여 기예(技藝) 가진 자를 뽑고 군사(軍事)를 연습시켜 사기를 돋우도록 하소서.

임금 : 그렇다. 옛날 월나라의 구천(勾踐)이 오(吳)나라를 치려고 할 때에 성난 개구리를 보고 절을 하였다 하니, 아마 이는 그 개구리의 기상을 높이 샀기 때문일것이다. 옛 사람이 큰일을 경영하는 자는 최선을 다하지 않은 경우가 없었다.
내가 보기에 육조의 판서들이 부임했을 초기에는 일 처리한 것이 조금 볼만했는데 여러 번 임명되자 점점 처음과 같지 않아 직무에 근면하고 최선을 다하는 실상이 없다. 요즘에 병조 판서 박서가 앞일을 잘 생각하여 추진하는 일이 많으니 진실로 매우 가상하다. 그러나 박서로 하여금 이 직책을 두세 번씩 맡게 하면 필시 오늘날처럼 직무에 최선을 다하지 못할 것이다.

1659년(32세,현종즉위년) 상소를 올려 인조 때 역적으로 몰려 죽음을 당한소현 세자(昭顯世子)의 빈(嬪) 강씨(姜氏)의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이재(李縡)가 지은 민정중의 비명(碑銘)에 이렇게 적혀 있다.

“처음에 강씨가 선왕 때에 죄를 받아 폐출되어 죽고 그 자녀는 어린데 모두 섬으로 귀양 갔기 때문에 나랏사람이 모두 슬퍼하였다.  그러나감히 말하지 못하였는데 공이 홀로 맨 먼저 논하니,  임금이 그 충직한 것을 알고 죄를 주지 않았으며,  모든 신하들이 다 놀랐다.  공이 임금에게 인정받은 것은 대개 여기에서 비롯 하였다고한다.”

이후 민정중은 병조참의에 제수되었으나 부친이 별세하여 사직하고 상복을입었다.

1662년(35세, 현종3년) 사간원 대사간으로 임명되었다.  그 뒤 승정원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 성균관대사성, 이조참판, 함경도관찰사,홍문관부제학, 사헌부대사헌 등을 거쳤다. 성균관대사성으로 재직할 때는 건물을 증축하고 학자들의 양성에 공을 세웠다.  함경도 관찰사로 근무할 때는 ‘변방의 요해지를 살펴 다니고 성곽의 무기를 수선하고 부세와 요역을 고르게 하였으며,  그곳 자제가 분발하여 학문에 힘쓰게하여’( 碑銘)  그 곳의 유풍(儒風)이 크게 일어났다.

1670년(43세, 현종11년) 이즈음 청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귀국한 뒤에는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가 되고 여러번 형조(刑曹)ㆍ예조(禮曹)ㆍ병조(兵曹)의판서와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과 의정부의참찬(參贊)이 되었는데,  일에 따라 맡은 바 책임을 다하였다.  다만 조정의 논의가 서로 많이 대립되고 어수선하여 조정에 머물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1675년(48세, 숙종1년) 허적(許積), 윤휴(尹鑴) 등 남인이 집권하였다.  이조판서의 자리에 있었으나 서인으로 배척을 받아 관직을 박탈당했다.  송시열이 귀양을 가게 되었는데, 민정중도 같은 죄를 받기를청 하였다.  이에 전라도 장흥(長興)으로 유배되었는데 현지에서 젊은이들에게 글을 가르쳐 현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1698년(숙종24년)에 강학 하던자리에 세워진 연곡서원은 그러한 민정중의 덕행과 학문을 기리기 위해서 세워진 것이다.  전남 장흥군 장흥읍 연곡길31에 소재하는 연곡서원은 전라남도 기념물 제18호로 지정되어있다.
1676년(49세,숙종2년) 윤휴의 일파중허견(許堅)과 이정(李楨) 등이모반하여 처형되었다.  민정중은 장흥에서 귀양살이 하던 중에 복권되어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이후 대광보국 숭록 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 우의정(議政府右議政)에 임명되었다.  당시 문충공(文忠公) 김수항(金壽恒)이 영의정이었는데,  마음을 합쳐 정사를 돌보고 좌의정으로 승진하였다.  이후 4년정도,  정승으로 일하면서 어린 임금을 보좌하고,  정치의 체면을 세웠다.  사사로운 행위를 막고 아래에 머물러있는 어진 사람을 발탁하고 천재(天災)를 조심하며 백성의 고통을 살피는 데에 힘썼다.

1680년(53세, 숙종6년)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남인 일파가 대거 실권하고 송시열 등과 함께 귀양에서 풀려났다.  민정중은 우의정, 좌의정에 임명되었다.  그 이듬해부터 경기도 용인에 있는 충렬서원의 원장을 지냈다.

1684년(57세, 숙종10년)호포(戶布) 등 여러가지 일을 적극적으로 실행하려 하였으나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이 반대하였다.

1685년(58세, 숙종11년) 중추부지사(中樞府知事)·판사(判事) 등에 임명되어 국왕을 보필하였다.

1689년(62세,숙종15년)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남인이 다시  집권하였다.  소의(昭儀) 장씨(훗날의장희빈)가 낳은 아들을 왕세자로 삼으려고하자,  송시열등 서인이 이를 적극 반대하였다.  이에 숙종은 송시열을 제주도에 유배시키고 그곳에서 사약을 받게 하였다.  아울러송시열을 따르는 사람들의 관직을 박탈했다.  당시 풍을 앓고 있던 민정중 역시 이일로 평안북도 벽동군(碧潼郡)으로 유배되었다.  조카  딸인현왕후(仁顯王后)는 폐위되어 궁궐에서 쫓겨났다.

1692년(65세, 숙종18년)에 유배지에서 사망하였다.  저서로『노봉집(老峯集)』, 『노봉연중설화(老峯筵中說話)』·『임진유문(壬辰遺聞)』등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양주의 석실서원(石室書院), 충주의 누암서원(樓巖書院), 장흥의 연곡서원(淵谷書院), 함흥의 운전서원(雲田書院), 벽동의 구봉서원(九峯書院), 정평의망덕서원(望德書院) 등 다수의 서원에 배향되었다.  1694년의 숙종이 마음을 바꿔,  민현왕후가 복위하였으며 그동안 권력을 잡고 있던 남인들은 다시 모두 실권하였다.  (갑술환국) 민정중도 관작을 회복되어, 나라에서 정중히장례를 치러주었다.  처음에 양주(楊州)에 장사지냈다가 나중에 여주 (驪州, 여주군 여주읍 하거리)로 이장하였다.

<참고자료>
⌈효종실록⌋
⌈민정중⌋, ⌈국역국조인물고⌋,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99
⌈민정중⌋,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민정중⌋,<문화원형 용어사전 –  암행어사>,  한국콘텐츠진흥원
한영국, ⌈민정중⌋,<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