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문흠(宋文欽, 1710-1752)


문흠(宋文欽, 1710-1752)                                 PDF Download

 

국 18현의 한 명인 동춘당 송준길(宋浚吉)의 4세손으로, 형 송명흠(宋明欽)과 더불어 당시 송씨 문중의 쌍벽으로 불리웠다.   자는사행(士行), 호는한정당 (閒靜堂)이다.  형과 마찬가지로 이재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는데, 이재는김창협의 학통을 이은 수제자로서 노론 내 낙론학맥을 계승 발전시켰으며, 영조치  세연간노론벽파의중심인물로활동한문신이다.

조부는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를 역임한 송병원(宋炳遠)이고, 부친은 송요좌(宋堯佐)이다.   생조는원래 상주목사(尙州牧使)를 지낸 송병익(宋炳翼)인데,  금산 군수(錦山郡守)를 지낸 묵옹 송병원(宋炳遠)에게 출계하였다. 모친은 파평 윤씨(坡平尹氏)로 호조정랑(戶曹正郞)을 지낸 윤부(尹扶)의 딸이다.   2남2녀중 둘째로 태어났다.

1733년(영조9) 계축식년사마시(癸丑式年司馬試)에 진사2등으로합격하였으나,  관직보다 학문에 더 뜻을 두어, 형 송명흠과 함께 회덕(懷德)의 비래암(飛來庵)에 뜻 있은 선비들을 모아<대학(大學)>을 강론하기도 하였다.  특별히예학(禮學)에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
후에 장릉참봉(長陵參奉)에 보임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그뒤 익위사시직(翊 衛司侍直)에 임명되었을 때 조태구(趙泰耉)의 아들 조현빈(趙顯彬)이 마침 세마(洗馬)가 되었으므로 더불어 동료가 될 수 없다고 하여 자리를 버리고 떠났다.

왜냐하면 조태구는 소론의 영수로서 경종치세 때 일어난 신임옥사에서 노론 4대신 주살을 주도하였기 때문이다.  얼마 후에 다시 익위사부수(翊衛司副率)이 되었으나조현빈이 그 자리에 계속 있자 역시 관직을 버리고 떠난다.

1743년(영조19) 목곡(牧谷) 이기진(李箕鎭)이 전랑(銓郞)이 되어 맨 먼저 그를 동몽교관(童蒙敎官)에 발탁하여 일 년여 동안 재직하게 하였으나, 가르칠 어린아이들이 없어 곧 벼슬을 사양하였다.  1747년(영조23) 종부시주부(宗簿侍注簿)에 올랐다가형조좌랑(刑曹佐郞)이 되었으며,  다시 문의현령(文義縣令)이 되었다.

1552년(영조28) 12월 15일, 향년43세의나이로갑자기사망하였다.
송문흠은 예서를 잘 써는데, 특히 이인상(李麟祥)과 의예술적 교분이도타웠다.  이인상은 3대에 걸쳐 대제학을 낳은 명문 출신으로 1735년(영조11) 진사에 급제하였지만 증조부 이민계(李敏啓)가 서자였기때문에 본과에 이르지는못하였다.  그는 서출이었지만 명문 출신답게 시문과 학식이 뛰어나 당시 문사들의 존경을 받았고 후대의 문인과 서화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당시에 그의 전서체에 대하여기(奇)하다고 하고 혹은 허(虛)하다고도 하였는데, 김정희(金正
喜)는 그문자향을 높이 평가하면서

“전각은 200년 이래로 따를 자가없다.”고 상찬하였다.

이런점에서 형인 송명흠이 유학하는 선비에 가깝다면 송문흠은 그예술적 역량이 출중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이는그가 남긴 ‘한정당기’에서도 일단을 엿볼 수  있다.  <한정당집>은 양이 많지 않은데,  조카인송시연의 발문에 의하자면 상당량의 글이 유실되었을 것이다.
그가 당호를 한정당이라고 지은 것은 도연명에게서 따온 것이다.  그는‘한정당기’에서도 연명의 일생을 “민면사세우애한정(?勉辭世 偶愛閒靜)” 8자로 요약하였는바,  그뜻은‘세상에 매이지 않고자 몸부림치고, 한정한 삶을 사랑하네’라는 데에서 따온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부귀공명을 얻기위해 서로 다투고 서로 자랑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지만 나는 이를 좇지 않고도 연명이 그랬듯이 세상에 나아가 나를 드러내고 명예와 부귀를 얻고 세상에 큰 이름을 드리우는데 온 정신을 두기보다는 유유자적하며 천성을 다하는 인생을 살겠다.  그리하여 한정당 이라고 자호한 것이다.

송문흠을 후대에 서예가이자 문장가라고도 평하는 데는 아마 이와 같은그의 성정이 작용했을 것이다.
문집으로는 8권 4책의 『한정당집(閒靜堂集)』이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