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행(金元行, 1702-1772)-2


김원행(金元行, 1702-1772)-2                            PDF Download

 

김원행은 자가 백춘(伯春)이고 본관은 안동(安東), 호는 미호(渼湖)다. 아버지는 승지 김제겸(金濟謙)이다. 당숙인 김숭겸(金崇謙)에게 입양되어 종조부 김창협(金昌協)의 손자가 되었다. 김창협의 수제자인 이재(李縡)의 문인이고 조선 후기 집권 계층인 노론 가문의 후손으로 학통을 잇는 존재로서 조야(朝野)에 큰 영향력을 미치는 학자였다. 당시 유수한 산림(山林)의 한 사람으로 명망이 높았다.

당시는 율곡학파 학맥을 계승한 송시열(宋時烈)의 주제자인 권상하(權尙夏) 문하에서 발생한 호락논쟁이 뜨거웠다. 권상하의 제자인 이간(李柬)은 김창협의 학설을 이어 이재와 함께 낙론의 중심이 되고, 권상하의 제자 한원진(韓元震)은 권상하의 학설을 이어 호론의 중심이 되었다. 김창협의 손자이자 이재의 문인인 김원행은 자연히 낙론을 지지하는 대표적인 학자로 활동하였다.

 

김원행의 인물성론(人物性論)을 비롯하여 심설과 명덕설 등은 그의 문인 박윤원(朴胤源, 1734-1799)을 거쳐 19세기 초반 낙론을 주도한 오희상(吳熙常, 1763-1833), 홍직필(洪直弼, 1776-1852)에게 이어졌고, 20세기 초반 낙론의 중심인물로 활약한 전우(田愚, 1841-1922)에게 계승되었다. 또한 몇 사람의 실학자도 일부 배출되었는데, 홍대용(洪大容, 1731-1783)이 대표적이다.

홍대용은 어려서 김원행이 주석하고 있던 석실서원(石室書院)을 찾아가 가르침을 받았다. 석실서원은 안동 김씨 세거지에 있던 서원으로 김상헌(金尙憲)의 학덕과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홍대용이 석실서원에서 수학한 기간은 12세부터 35세까지 23년간이다. 이 기간 동안 엄격한 학풍을 내면화하면서 성리학자로서의 기반을 닦았다. 아울러 이 무렵 박지원, 박제가 등 북학파를 형성했던 인물들과 교유했다. 부친이 나주목사를 하던 시기에는 나주의 실학자인 나경적과 함께 천문관측기구인 혼천의(渾天儀)를 제작하기도 했다.

여러 번 과거에 실패한 뒤 1774년(영조 50)에 음보(蔭補)로 세손익위사시직(世孫翊衛司侍直)이 되었고, 1775년 선공감감역(繕工監監役), 1776년 사헌부감찰, 1777년 태인현감, 1780년 영천군수를 지냈다. 홍대용의 학문적 업적은 1765년 초 북경(北京) 방문을 계기로 서양 과학의 영향을 깊이 받은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담헌서(湛軒書)』는 약간의 시·서를 제외하면 거의가 북경에서 돌아온 뒤 10여 년 사이에 쓴 것이다.

 

김원행은 1719년(숙종 45) 진사가 되었으나, 1722년(경종 2) 신임옥사 때 조부 김창집이 노론 4대신으로 사사되고, 생부 김제겸과 친형인 김성행(金省行), 김탄행(金坦行) 등이 유배되어 죽음을 당하자 벼슬할 뜻을 버리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1725년(영조 1) 조부·생부·형 등이 신원된 후에도 시골에 묻혀 살며 학문 연구에만 몰두하였다. 그 후 여러 중책으로 불렀으나 모두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1740년 내시교관(內侍敎官)을 제수 받고 1750년 위솔(衛率) ·종부시주부(宗簿寺主簿), 1751년 익찬(翊贊) ·지평(持平), 1754년 서연관(書筵官)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였다. 1759년 왕세손(王世孫: 正祖)이 책봉되자 세손의 교육을 위하여 영조가 그를 불러들였으나 상소를 올려 사퇴하고 응하지 않았다. 1761년 공조참의(工曹參議) ·성균관좨주(成均館祭酒) ·세손유선(諭善)에 임명되었으나 역시 사양하였다. 문집에 ⌈미호집(渼湖集)⌋이 있고 독서차록(讀書箚錄)과 미상경의(渼上經義) 등은 김원행의 경학 사상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미호집⌋은 20권 10책으로 된 활자본이다. 서문과 발문이 없어 간행 연대는 알 수 없지만, 『영조실록』 48년 임진(壬辰) 12월조에 ‘미호집약간권장우가(渼湖集若干卷藏于家)’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1772년(영조 48) 저자 생존 시에 이미 『미호집』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서(書)에는 김시관(金時觀)과 성리설(性理說)에 관해 논란한 것, 유척기(兪拓基)와 예설에 대해 논한 것, 송명흠(宋明欽)·임성주(任聖周)·김종후(金鍾厚)·이완(李浣)·홍대용(洪大容) 등 당시의 많은 학자·문인들과 주고받은 서한들이 있다. 이 서한들에는 경의(經義)·심성(心性)·이기(理氣)·예설·사론(史論) 등에 관한 내용이 많아, 훈고학(訓詁學) 및 성리학에 관한 저자의 학문적인 영역이 광범위했음을 알 수 있다.

 

잡저 가운데 「잡기(雜記)」·「도곡수기(陶谷隨記)」 등은 독서를 하다가 학문에 관해 생각나는 대로 그때그때 기록한 것이다. 「명덕설의문(明德說疑問)」·「중용귀신설(中庸鬼神說)」·「심성기질설시이민철(心性氣質說示李敏哲)」 등은 유가의 경전이나 성리설에 관해 논변한 내용들이다.

독서차록(讀書箚錄)』은 김원행이 『중용』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정리한 책으로, 「중용장구서(中庸章句序)」 및 전(傳) 1장부터 33장까지 장별로 각 구절의 논리적 맥락을 분석하고 이를 풀이하였다. 김원행의 경학과 관련된 저술은 대부분 『중용』관련 저술에 집중되어 있다.

독서차록』과 함께 『중용문답(中庸問答)』·『중용강설(中庸講說)』이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미호강의(渼湖講義)』·『미상경의(渼上經義)』에서도 『중용』의 비중이 역시 크다.

 

미상경의(渼上經義)는 김원행이 동료 학자나 문인과 도학(道學)의 중요 경전과 문헌에 대해 논의한 서신을 경전별로 분류한 저서이다. 이 책의 구성은 우선 『소학』에서 시작하여 사서(四書)·삼경(三經)을 거쳐 「태극도(太極圖)」·『근사록(近思錄)』·『심경(心經)』에서 끝난다. 노론 낙론계의 주요인물인 김원행의 경학사상이 경전별로 분류되어 있어서 18세기 낙론계의 사상적 쟁점과 문제의식을 알 수 있게 하는 자료이다.

 

<참고문헌>

국역조선왕조실록
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