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의(李載毅)1772∼1839


이재의(李載毅)                                                             PDF Download

 

1772(영조 48)∼1839(헌종 5). 조선 후기의 학자.

관은 전주(全州). 자는 여홍(汝弘), 호는 문산(文山)이다. 1772년(영조 48)에 서울 공동(公洞)의 외가에서 출가하였으며, 진사 이응오(李應五)의 아들이다. 모친은 안동김씨 승지 김약행(金若行)의 딸이다. 송계간(宋啓幹)의 문인이다.   추양 송계간은 송준길(宋浚吉)의 후손이다.

이재의는 외가의 집에서 태어났기에 자연스럽게 외조부 김약행에게 수업하여 문예가 일찍이 성취될 수 있었다. 그가 약관이 되지 않은 나이인 17세에 이미 사마시 생원, 진사 초시에 모두 합격한 것은 아마도 초년에 외가의 훈도가 큰 힘으로 작용한 듯하다.   이주국은 증손인 이재의를 무척이나 사랑하여 늘 곁에서 떠나지 못하게 하였다.   이주국은 유정모(柳鼎模)와 남유두(南有斗)와 같은 당시에 모두 문학으로 이름이 난 선비들을 서당의 선생님으로 모시고 이재의 형제를 가르쳤다.
이재의가 이들로부터 전수받아 익힌 것이 적지 않았다. 유정모에게서 ⌈소학⌋과 같은 수신서를 비롯하여 유교경전을 배우고, 남유두에게서는 시문학을 익혔던 것 같다.   성장하여 이재의는 경학방면의 선학을 찾았는데, 박윤원(朴胤源)에게 예를 묻고 송환기(宋煥箕)에게 제자의 예를 올리고 그 문하에 출입하였다.
이에 박윤원과 송환기는 이재의가 장차 크게 성공할 것으로 기대했다고 한다.  이처럼 이재의는 초년에 외조부에게 수학하고 본가로 돌아온 뒤엔 집안의 글방에서 유정모와 남유두를 통해 문학, 즉 기본 경전 학습과 작문중심의 과거공부에 치중했으며, 성인이 되어서는 경학이나 성리학 방면의 담론을 위해 스스로 박윤원과 송환기의 문하를 찾았던 것이다.

이재의는 박윤원과 송환기 이외에도 당시에 명망이 있던 선학들과 틈나는 대로 교유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호남을 대표하는 재야 학자인 정재면(鄭在勉)이다. 정재면에게 ⌈주역⌋의 원형이정(元亨利貞)에 대해 물었고, ⌈논어⌋의 효제(孝悌)와 충신의 관계에 대해 물은 것이 ⌈홍재전서(弘齋全書)⌋에 보인다.

정약용(丁若鏞)과의 교유는 유배지에서 운명적인 만남이 있은 이후로 1814~1839년까지 무려 25년 동안 지속되었다. 여기에서 정약용의 시 한 수를 통해 이재의에 대한 생각의 일단을 헤아려본다.

정약용이 윤사월 십이일에 이재의와 함께 문암장에 가 노닐면서 배 안에서 지은 작품이다.

박식하고 고상 담박한 문산자는 博雅文山子

비밀한 기약이 청산에 있는지라 幽期在碧山

띳집 짓고서 몸소 농사지어 먹고 結茅思食力

노 저으며 때로 한가함을 즐기네 蕩槳樂偸閒

예악은 마음에 두지 않거나와 禮樂休牽戀

산수는 얼굴을 향하기에 합당해라 煙霞合駐顔

이 길이 원래 자유자적함이니 此行元自適

백구 같은 흰 물굽이에서 묵으리 且宿白鷗灣

 

또한 이재의와 교유한 대표적 인물로 홍직필(洪直弼, 1776~1852)을 들 수 있다.   홍직필은 서울과 경기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77세의 장수를 누림으로써 이이-김장생-송시열-이단하-김창흡-김원행-박윤원-홍직필-임원회-전우 등으로 이어지는 서인계 중 기호학파의 거장이다.  이재의는 본래 친구간의 도리를 중히 여겨 홍직필과 50년 동안 정분이 막연하였다.
홍직필이 만년에 어려운 처지에 놓여 궁한 호숫가에 살고 있었는데, 이재의가 매양 흥이 나면 그의 손을 이끌고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손에는 술잔을 잡고 서로 마주 앉아 즐거운 시간을 보냈으니 누가 주인이고 누가 손님인지 알지 못할 정도였다.  이재의가 죽자 홍직필은 함께 노닐던 강과 호수도 여한이 있을 것이라고 하며 슬퍼하였다. 또한 홍직필은 제문을 지어 이재의를 애도하였는데,

“나는 거문고를 끊으려 하네. 높은 산 흐르는 물을 노래한들 영원히 감상할 이가 사라졌으니 세상이 외롭고 우주가 쓸쓸하도다. 어느 곳에서 얻을까. 그대와 같이 곧고 변함없는 이를. 그대와 같이 온화하고 후덕한 이를 어느 곳에서 다시 가까이할까”

라고 탄식하였다.

지기인 홍직필의 기록에 따르면, 이재의는 성품이 너그럽고 온화했으며 도량과 재주가 크고 두터웠다.  또한 속마음이 평탄하여 경계를 두지 않았으며, 간혹 속임을 당할지라도 상대를 예전처럼 대우했다. 또한 남의 허물을 말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으며, 때문에 어진 사람이든 어리석은 사람이든 귀한 사람이든 천한 사람이든 모두 그의 덕에 감복했다.
검소한 것을 덕으로 여겼으니 거친 음식이나 검소한 의복을 싫어하지 않고 늙어 죽을 때까지 고치지 않았다. 큰 집의 종손으로서 자질과 품격, 도량을 갖추었다고 할 것이다. 이를 기초로 이재의는 문중의 일을 순리에 맞게 처리하고자 힘썼다.  산 이를 잘 길러내고 죽은 이를 잘 보내며 묘역을 잘 꾸미고 집안을 안정시키는 일에 정성과 노력을 다하였다.
여러 아우들을 한 몸처럼 보살피고 그의 자식들을 내 몸에서 나온 것처럼 돌보았다. 두 아우가 임소에서 죽자 여러 조카들을 어루만지고 보살펴주어 어떻게든 일어서게 해주었다.  누님을 어머니처럼 섬겨서 항상 안부를 묻기를 멈추지 않았다. 날로 종족이나 인척을 미루어 생각하되 가깝다고 친하게 대하거나 멀다가 소원하게 대하지 않았다.   베풀어주기를 좋아하여 궁핍한 이를 도와주되 항상 온 힘을 다한 뒤에 그만두었다고 한다.

시 짓기를 좋아하여 명승지에 이르면 반드시 시를 읊었는데, 그의 대표적인 시 한편을 소개한다.

 

외로운 소나무가 절개를 안 고치니 孤松不改節

은둔자가 이리저리 노니는 곳 되었지. 隱者盤桓處

그 곁에는 작은 壇이 하나 있으니 傍有小壇築

이 맘을 누구에게 말할 수 있으랴. 此心誰與語

 

대표적인 저서로는 ⌈문산집⌋이 있다. ⌈문산집(文山集)⌋은 조선 후기의 학자 이재의의 시문집이다.  11권 4책으로 활자본이다. 1870년(고종 7) 그의 막내 아들인 이건식(李建栻)이 영천군수(永川郡守)로 있을 때에 편집하여 간행하였다. 권두에 김상현(金尙鉉)의 서문과 시문총목(詩文總目)이 있다. 현재 규장각 도서에 소장되어 있다.

권1∼8에에는 시 825수가 있고, 권9에는 서(書) 23편이 있으며, 권10에는 제문 15편, 서(序) 4편, 기(記) 5편, 부 3편, 제(題) 3편, 발(跋) 3편, 설(說) 제2편, 잡저 4편이 있고, 권11에는 부록으로 다산문답(茶山問答) 등이 수록되어 있다. 시 800여 수에는 그가 경치를 즐겨 당나라 백거이(白居易)의 의지와 취향을 숭상한 뜻이 드러나 있다. 그러므로 기행시가 많으며, 이 중 단군을 찬양한 「단군대(檀君臺)」나 금강산의 경치를 읊은 「동유록(東遊錄)」 등이 돋보인다. 이것들은 18세기의 한시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

서(書) 「답홍백응서(答洪伯應書)」는 사람에게 부여된 이기(理氣)에 대하여 논변한 글이고, 「장석문목(丈席問目)」은 「중용」과 「대학」에 대한 문목이다. 잡저 중 「역계만록(易繫漫錄)」은 주역」 연구에 대한 기록으로, 특히 시책(蓍策)에 관한 설명은 점술(占術) 및 설시(設蓍)의 이해에 도움이 된다.
부록의 「다산문답」은 정약용의 사칠성정(四七性情)에 대한 논설을 정주(程朱)의 학설을 끌어다가 비교하여 논변한 것이다.  여기에서 사칠(四七)은 사단과 칠정을 의미하는데,  사단은 측은(惻隱)․수오(羞惡)․사양(辭讓)․시비(是非)의 네 가지 도덕적 정감을 말하고, 칠정은 기쁨․분노․슬픔․즐거움․사랑․미움․욕구 등의 인간의 일반적인 정감을 말한다.

이밖에도 화양동을 읊은 「화양동부(華陽洞賦)」, 고양이를 잡는 일과 비유하여 쓴 「착묘설(捉猫說)」 등이 있다.

 

[참고문헌]

「문산집(文山集)」,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문산 이재의의 삶과 교유」(한국인물사연구13, 이종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