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운성(韓運聖:1802~1863)


입헌 한운성(韓運聖:1802~1863)                      PDF Download

 

그의 자는 문오(文五), 호는 입헌(立軒)이며 청주인(淸州人)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재주가 남달라서 5세에 이미 글을 지을 줄 알았다. 집안이 몹시 가난하여 종이를 사올 수가 없자, 그의 어머니가 나뭇잎을 따다가 글씨를 쓰게 하였는데, 글씨를 써서 모운 나뭇잎을 태운 재가 무려 5두(斗)나 되었다고 하니, 얼마나 많은 나뭇잎에다 글씨를 썼는가는 충분히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리하여 그는 특히 예서(隸書)와 초서(草書)에 남다른 솜씨를 보이자, 주변에서 그의 글씨를 받아다 간직한 사람들이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다고 한다.

그가 12세 때에 매산(梅山) 홍직필(洪直弼)의 문인이 되었는데, 매산은 그의 행동거지가 장중하고 재주가 있어 보이는 것을 특이하게 여겨 그에게 큰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그는 초시(初試)에만 급제하였을 뿐, 더 이상 과업(科業)에 흥미를 갖지 못하자, 이를 체념하고 자신을 위한 학문에 전념하였다. 그 뒤 부모상을 마친 후에는 매산의 문하에서 더욱 학문에 매진하였으며, 바깥출입을 하지 않고 공부를 하는 동안 그의 명성은 자연스럽게 주변으로부터 널리 알려졌다. 대산(臺山) 김매순(金邁淳)이 그를 영남(嶺南)의 제일가는 인물로 평가한 사실만으로도 이를 충분히 입증할 수 있겠다.

매산(梅山)이 그에게 ‘입헌(立軒)’이라는 두 글자를 당호로 써주면서 ‘경의지덕불고(敬義之德不孤)’라는 말로 그를 권면한 때문만은 아니었겠지만 아무튼 그는 한평생 동안 매산을 스승으로 받들어 모셨다. 또 그는 매산이 별세한 후에 임헌회(任憲晦:1811~1876), 조병덕(趙秉悳:1800~1870) 등과 함께 《매산집(梅山集)》을 교정하는 일에 깊이 관여함으로써 스승과의 깊은 교분이 있었음을 보여주었으며, 이를 통해 또 문인제자들 사이에서도 선도적인 위치에 있었음을 보여주었다. 이것이 또한 그가 매산의 문하에서 제일인자로 지목받은 이유이기도 하다. 아울러 그는 세거지인 경주(慶州)에서 주로 생활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공부하는 목적이 모든 사물의 이치(理致)를 밝히는 것을 으뜸가는 의리로 여기는 데에 있다고 보았으며, 평상시에는 몸소 실천하는 것을 위주로 행동하였다. 그는 유학(儒學)의 경전(經傳)과 제자백가(諸子百家)를 두루 섭렵하였으나 특히 《중용(中庸)》과 《대학(大學)》에 주력하였다. 하루도 거르는 일이 없이 매일 같이 암송(暗誦)하기를 늙어서까지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는 또 예학(禮學)에 대해서도 조예가 깊었다. 그의 예설(禮說)에 대한 견해는 원류(源流)를 깊이 연구하고 상변(常變)을 두루 참작하여 변론하고 절충한 것이었으므로 시의(時宜)에 잘 부합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가 남긴 글들은 대부분 그의 아들인 한석찬(韓錫瓚)과 한석관(韓錫瓘)이 잘 정리하여 1880년경에 16권 8책으로 간행하였다. 이 문집에는 그의 동문인 임헌회가 1865년에 지은 묘갈명(墓碣銘)과 조병덕이 1869년에 지은 행장(行狀)이 수록되어 있고, 말미에는 그의 동문 후배인 이응진(李應辰)이 1880년에 지은 발문(跋文)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 문집에 수록되어 있는 내용을 잠시 살펴보면, 1권부터 3권까지는 350제(題)에 달하는 분량의 시작품으로, 시체(詩體)의 구분 없이 저작 연도순으로 수록되어 있으며, 스승인 매산을 찾아 경주에서 한양을 오가는 도중에 지은 시와 스승의 곁을 떠날 때 명을 받고 지어 올린 시, 스승의 시에 차운한 시, 그리고 주자(朱子)와 우암(尤庵)의 시에 차운한 시, 권익(權翌)과 홍일순(洪一淳) 등등 당시에 교유했던 여러 사람들에게 지어준 시가 주를 이루고 있다. 그 중에는 다음과 같은 시작품도 있어 흥미롭다. 《입헌문집(立軒文集)》 권1에 수록되어 있는 <사육신의 묘소에 배알하다[拜六臣墓]>라는 제목으로 되어 있는 작품이다.

 

노량 나루 산기슭에 개미둑 같은 무덤에
蟻封殘麓鷺江湄

여섯 충신 혼백 모두 여기에다 모셨구려
六箇忠魂盡托斯

서산아 높다 크다를 겨루려들지 말지어다
西山莫與爭高大

장사하던 그 당시엔 백이숙제였을 뿐이니
埋得當年一伯夷

 

이 작품은 그가 경주에서 상경한 어느날 노량진 근처의 사육신 묘소를 찾아가서 참배하고 그 감회를 적은 것이다. 여섯 충신의 혼백이란 단종복위를 계획했다가 형장의 이슬이 되어 사라진 성삼문(成三問)과 박팽년(朴彭年)을 포함한 여섯 분의 혼백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말하는 서산(西山)은 바로 백이숙제(伯夷叔弟)가 고사리를 캐서 먹으며 연명하다가 생을 마감한 저 수양산(首陽山)을 지칭하는 말이다.

작자는 결국 백이숙제가 일개 평범한 사람으로 자연사하여 묻힌 수양산을 인격화하여 절의 높은 백이숙제가 묻힌 산이라고 우쭐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들의 절의라는 것은 훗날 추가로 설정된 것이었지 처음 묻힐 당년에는 보잘것없는 일개 평민이었을 뿐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렇지만 노량진 산기슭에 개미둑 같은 무덤이 게다가 여섯이나 되는 이 무덤들은 애당초 불의에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항거하다가 형을 받고 죽어간 충신들의 혼백을 묻은 무덤이라는 것을 대비적으로 묘사하여 그 감회를 읊은 것이다.

여기에는 사육신의 절의에 대하여 세상 사람들이 백이숙제와 비교하여 이러쿵저러쿵 말들이 많은데 대하여 일갈(一喝)하여 제시한 의미도 담겨져 있다고 볼 수 있겠다. 한편으로는 또 몸 바쳐 이룩한 충절에 대하여 그들의 넋을 기리는 마당에 크고 작고를 따져 무엇 하겠는가라는 그의 견해를 읽을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또 다른 한수의 시작품을 보기로 한다. 이 시는 《입헌문집(立軒文集)》 권2에 수록되어 있는 <생일날 감회를 적다[生朝書感]>라는 연작 4수 중의 첫째 수이다.

 

임술년 봄에 부모님이 이 몸을 낳으셨건만
父母劬勞壬戌春

이날 맞은 천애고아로 머리털만 세었구려
孤兒此日白頭新

풍수에 어린 그지없는 애통함을 알겠는 건
極知風樹無窮痛

고금의 사람 중에 이 몸이 가장 심하구려
今古人間最我身

 

머리가 하얗게 센 백발의 노인이 되어서도 생일이 돌아오면 부모를 그리는 마음은 고금의 모든 사람이 같은 모양이다. 더구나 그는 늙은 나이의 자신을 천애고아(天涯孤兒)로 지칭하면서 풍수지탄(風樹之歎)에서 오는 다함이 없는 애통함이 고금의 사람들 중에서 자신이 가장 심하다고 묘사하였다. 이 작품 말고도 어버이를 그리는 시작품이 그의 문집에 상당수 수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그의 효심이 남달리 지극했음을 짐작할 수 있겠다.

그리고 4권부터 13권까지는 주로 서간문(書簡文)을 수록하고 있는데, 스승인 매산에게 올린 편지 등등 무려 120여 인물에게 370여 통의 편지가 때로는 질문을 때로는 응답을 때로는 자신의 소회를 적은 내용을 담고 있어 흥미롭다. 이 편지들이 담고 있는 내용을 대략 정리해보기로 한다.

그는 스승인 매산에게 부모의 상을 당한 데다 몸이 아픈 탓에 스승 곁에서 직접 모시면서 배우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안타까워하는 내용을 담아 편지를 쓰기도 하였고, 《소학(小學)》과 《격몽요결(擊蒙要訣)》을 먼저 읽은 뒤 사서(四書)를 보라고 일러준 가르침을 되새기는 내용과, 모친의 상을 당한 13세 아들의 거상의절(居喪儀節)에 대한 자문을 담은 내용도 있다. 또 국상(國喪) 기간 중에 사가(私家)의 관혼상제(冠婚喪祭) 때 입는 복장에 대해 자문하기도 하고, 생육신(生六臣)의 문집을 인출해 달라는 스승의 부탁에 대하여 인쇄소 사정이 여의치 않아 차후에 이행하겠다는 내용의 편지를 쓰기도 하였다.

무엇보다 충신(忠信)에 대한 가르침을 굳게 지키겠다는 내용과 심기질설(心氣質說)에 대한 문목(問目)에서는 그의 결연한 의지와 학구열을 새삼 엿볼 수가 있기도 하다. 그리고 삼가관복(三加冠服)에 대한 질문을 담은 편지도 보이며, 《중용(中庸)》의 귀신장(鬼神章)에 대하여 질의한 내용도 있다. 잘못된 견해를 갖고 있는 포천(抱川)의 김치장(金穉章)을 위해 일깨우는 글을 내려주기를 청한 내용과, 졸작인 〈회근송(回巹頌)〉을 올리니 읽어달라는 내용 등에서는 스승과 제자이기 때문에 가능한 그런 사제지간의 정의(情義)를 느끼게 한다.

김매순(金邁淳)에게는 그의 명성을 듣고 배알하려 했으나 일정이 여의치 않아 그리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는 내용을 담아 보낸 편지가 있고, 홍일순에게는 스승에게 멀리 경주에서 편지를 보내 함부로 가르침을 구하고 의문점을 질의했던 것이 돌이켜 보면 성의가 없고 경망스런 행동이었다고 자책하는 내용을 담아 편지를 보낸 것을 보면 이 둘은 막역한 친분관계였음을 보여준다. 또한 스승의 가르침과 홍일순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학문의 진보가 없다고 안타까워하는 내용과 과거 공부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나이만 먹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부끄러워하는 내용과 홍수로 인하여 농사에 피해를 입지 않았는가 걱정하는 내용에서도 역시 그러한 정서를 느낄 수 있다.

특히 헌종(憲宗)과 철종(哲宗)이 종통(宗統)을 이은 측면에서 부자(父子)의 도(道)가 있다 하더라도 속칭(屬稱)을 따라 헌종 부부를 황질(皇姪)과 황질비(皇姪妃)로 불러야 한다는 내용 등에서는 그의 예설에 대한 자신의 확고한 견해를 읽을 수가 있다.

이종상(李鍾祥)에게는 만년(晩年)의 처신이 더없이 중요하기 때문에 일찍 관직에서 물러나기를 권유하기도 하고, 고을을 잘 다스린다는 소문이 들려 감축드린다는 등의 내용을 담아 보낸 편지가 있다. 그리고 조병덕에게는 편지를 보내 경서(經書)와 성리학(性理學)에 대하여 의문점을 질의하기도 하고, 《매산집(梅山集)》의 정본이 나오기도 전에 경향 각지에서 시비가 일어나고 있으나 그런 말에 휘둘리지 말고 교정을 정밀히 해야 한다고 주장한 내용도 있다.

또 스승의 묘문(墓文)을 다 지었는지 묻고, 다 되었으면 그 글을 보내달라는 내용과 《매산집》을 교정을 마치면 곧바로 인출하자는 소휘면(蘇輝冕)의 의견에 대해 그렇게 하다보면 정밀성이 떨어질 우려가 있으므로 우선 교정에 진력하는 것이 좋겠다는 등등의 내용을 담은 편지들이 있다. 이와 같은 편지를 통하여 그가 《매산집》의 간행에도 깊이 관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주도적인 위치에 있었음을 역시 확인할 수 있겠다.

안영집(安永集)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미발시(未發時)에는 태극(太極)이 주가 되고 이발시(已發時)에는 음양(陰陽)이 주가 된다고 하는 견해에 대하여 반론을 제기하기도 하고, <태극설주해(太極說註解)> 의문에 대하여 답한 내용도 보인다. 특히 임헌회에게 보낸 편지에서 스승의 문집인 《매산집》을 얼마나 교정했는지 묻고, 오덕여(吳德輿)가 그 고을 수령으로 부임한 것은 하나의 기회이기도 하니,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속히 간행할 것을 권유하는 내용과 그가 교열을 맡은 스승의 시집(詩集) 2책을 산삭하여 정사(淨寫)했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 편지를 통하여 그가 스승의 문집 간행에 역시 깊이 관여하였다는 사실과 많은 고심을 하였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소휘면에게 보낸 편지에서 《매산집》의 정본이 아직 나오지 않은 상황인데 서둘러 간행하지 말자고 설득하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에 《매산집》 간행을 둘러싼 갈등 양상이 적지 않았음을 역시 가늠해 볼 수 있겠다. 그리고 또 그의 문집에 보이는 〈연명여제도동문인서(聯名與諸道同門人書)〉라는 제목의 글은 각지에 있는 동문들에게 보내어 스승의 문집을 인출하는 데 있어서 유능한 몇 명을 선발하여 일을 주관하게 하고 나머지 동문들은 비용을 협조하게 하는 방법을 제기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는 그가 문집 간행에 드는 비용문제까지도 전반적으로 관여하였다는 사실을 뒷받침 해 주는 내용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의 문집 권14에는 서(序) 6편, 기(記) 16편, 발문(跋文) 6편과 1편의 전(傳)이 수록되어 있다. 그중에 〈매산선생칠십수서(〈梅山先生七十壽序)〉는 공자(孔子), 정자(程子), 주자(朱子)와 우암(尤庵)의 70세 시절 일화를 들어 고희연(古稀宴)을 맞은 스승인 매산이 그 도통의 계승자로 적임자임을 찬양하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숙재조장주갑수서(肅齋趙丈周甲壽序)〉는 동문 선배인 조병덕의 회갑연을 축하하는 내용을 담은 서문이다. 그리고 전찬명(田贊明)이 고향으로 돌아갈 때 지어준 서문도 있고, 홍경래의 난 때 동래(東萊)에서 창의(倡義)했던 운계(雲溪) 박처사(朴處士)의 실기(實記)에 대한 서문도 있다. 또 글공부하다가 세밑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가는 제자와 호남으로 돌아가는 동문과 작별할 때 지어준 송서(送序) 등등이 있다.

그는 또 손영모(孫永謨)가 경주부(慶州府)에 방치되어 내려오던 시남시사(市南詩社) 건물에서 동몽(童蒙)을 가르치기 위해 기금을 마련하고 강학을 준비한 전말을 담아 〈몽양재기(蒙養齋記)〉를 지어 주었고, 또 그에게 지어준 〈지와기(止窩記)〉는 그가 40세에 불과한 나이에 경주 공목관(孔目官)의 관리 생활을 정리하고 고향으로 돌아간 것을 칭찬한 내용을 담고 있다.

또 스승인 매산의 강학 장소인 열락재(悅樂齋)와 홍일순의 거처인 만춘와(萬春窩)와 동문 임헌회가 어버이를 그리워하여 지은 첨망헌(瞻望軒)과 우우현(禹又玄)의 낙지암(樂志菴) 등에도 기문(記文)을 지어 그 뜻을 기렸으며, 특히 조병덕의 장자 조명희의 부탁을 받고 소옹(邵雍)의 삼태평(三太平)에 관한 뜻을 취하여 지어준 〈삼평헌기(三平軒記)〉는 매우 흥미 있는 글이다. 또한 〈김효자정려기(〈金孝子旌閭記)〉는 김성집(金聲集)을 기리는 내용이며, 〈연거당기(蓮渠堂記)〉는 달성(達城) 서이재(徐彛載)에게 지어준 글이다. 문인 박문언(朴文彦)의 강학 장소인 윤남서숙(輪南書塾)에도 기문을 지어주었다.

그리고 이시우의 〈석분종련기(石盆種蓮記)〉 뒤에 쓴 발문과 임헌회가 스승에게 받아 간직해 두었던 백간(白簡)에다 문인들이 각자 글씨를 써서 첩을 만든 일을 기록한 〈서임명로칠간첩후(書任明老七簡帖後)〉라는 발문과, 집안에 내려오던 우전(禹篆) 8폭을 임헌회에게 보내며 써준 〈경서우전후증임명로(敬書禹篆後贈任明老)〉와, 우암(尤庵)의 친필 <사물잠(四勿箴)> 모본첩(摹本帖) 뒤에 쓴 발문 등이 있다. 동래에서 장사로 크게 돈을 번 뒤 어려운 사람을 돕는 일에 헌신한 입지전적(立志傳的)인 인물인 김성우(金聲遇)에 대하여 쓴 전(傳)도 역시 그의 문집에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그는 스승인 매산 홍직필과 장인 오광순(吳光恂)과 백부인 한덕언과 여타 지인을 위한 제문을 19편이나 남겼으며, 임응만(任應萬)에 대한 애사(哀辭) 1편과 난곡서원(蘭谷書院)에 우암(尤庵)의 개모(改摹)한 영정을 봉안하고 올린 축문과 김창협(金昌協)을 추배(追配)할 때의 봉안문(奉安文) 및 성곡산신제(聖谷山神祭) 때 축문(祝文)도 수록되어 있으며, 묘갈문(墓碣文)과 묘표(墓表)와 시장(諡狀) 등도 있다.

그의 문집 마지막 권인 권16에는 2편의 상소(上疏)와 11편의 잡저(雜著)와 부록(附錄)이 수록되어 있다. 상소는 임진왜란 때 집경전(集慶殿) 참봉(參奉)으로 태조의 영정을 지켜내고 아울러 창의(倡義)하여 공을 세운 손엽(孫曄)에 대한 증직(贈職)을 청한 소(疏)와 인산서원(仁山書院)의 사액(賜額)을 청하는 내용을 담은 상소이다.

그리고 잡저에 수록되어 있는 〈예설변(禮說辨)〉은 헌종(憲宗)의 숙부뻘인 철종(哲宗)이 즉위하여 종묘에 제사를 모시게 되었을 때에 호칭문제를 두고 논란이 일자, 이에 대해 변론한 것이다. 당시 성균관 좨주(成均館祭酒)로 있던 홍직필이 종통(宗統)을 이은 측면에서 헌종과 철종이 아무리 부자(父子)의 도(道)가 있다 하더라도 당연히 속칭(屬稱)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순조(純祖)를 황고(皇考)라 하고 익종(翼宗)을 황형(皇兄)이라고 부르는 데에는 의견이 일치하였으나 헌종 부부를 황질(皇姪)과 황질비(皇姪妃)로 불러도 되는가에 대한 논란은 계속되었다. 이에 대해 한운성은 스승의 의견을 옹호하는 주장을 폄으로써 자신의 견해를 분명히 하였다.

그리고 《논어(論語)》에 대하여 의문시되는 부분 7조항을 변석(辨析)한 〈논어원사(論語原思)〉가 수록되어 있다. 또 소식(蘇軾)의 <이백비음기(李白碑陰記)>에서 이백(李白)의 기상을 칭찬한 부분에 대해 도의(道義)와 접목되지 않은 사람의 기상은 대단할 것이 없다고 반론하는 잡록(雜錄)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 글은 특히 도학(道學)을 지향하고 있는 한운성의 면모가 잘 드러나 있는 글이라 할 수 있다. 〈임자곡침기(壬子哭寢記)〉는 스승 홍직필의 상장(喪葬)의 제반에 대해 기록한 글이며, 〈통태학문(通太學文)〉은 우암 송시열을 향사한 경주 인산서원(仁山書院)의 사액을 위해 성균관 제생들의 협조를 구하는 글이다.

조병덕이 1869년에 지은 행장과 임헌회가 1865년에 지은 묘갈명이 부록으로 실려 있고, 말미에는 이응진이 1880년에 지은 발문이 수록되어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밖으로는 크게 알려져 있지는 않으나 실제로 그의 문집의 양으로만 보아도 적지 않은 분량을 지니고 있는 것은 그가 평소에 학문적인 측면에서 상당한 조예가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겠다.

 

<참고문헌>
《입헌집(立軒集)》, 한운성(韓運聖).
《숙재집(肅齋集)》, 조병덕(趙秉悳).
《고산집(鼓山集)》, 임헌회(任憲晦).
《임재집(臨齋集)》, 서찬규(徐贊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