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병덕(趙秉悳)


조병덕(趙秉悳)                                                             PDF Download

 

181800(정조 24)∼1870(고종 7). 조선 후기의 학자·문신. 본관은 양주(楊州). 자는 유문(孺文), 호는 숙재(肅齋). 동지중추부사 최순(最淳)의 아들이다. 일찍이 홍직필(洪直弼)과 오희상(吳熙常)의 문하를 출입하며 학문을 닦았다. 1852년(철종 3) 음보(蔭補)로 지평이 되고, 1859년 경연관이 되었다. 이어 이조참의를 거쳐 호조참판에 이르렀다. 동문의 임헌회(任憲晦) 등과 병칭되던 한말의 거유였으며, 성리학자로도 이름이 높았다.

이재(李縡)·김원행(金元行)으로 이어지는 학맥을 홍직필에게서 이어받아 문하의 김병창(金炳昌) 등에게 전수한 중심인물이었다. 저서로 「숙재집(肅齋集)」이 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숙재집」은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조병덕의 시문집이다. 26권 13책으로 고활자본이다. 서문·발문이 없어 간기(刊記)는 자세하지 않다. 현재 국립중앙도서관·규장각 도서·장서각 도서 등에 소장되어 있다.

권1·2에 시 184수, 소 10편, 서계(書啓) 6편, 의(議) 2편, 권3∼18에 서(書) 596편, 권19·20에 잡저 13편, 서(序) 10편, 기 8편, 발 12편, 권21∼23에 고축문(告祝文) 11편, 제문 22편, 신도비명 1편, 비(碑) 3편, 묘갈명 6편, 묘표 1편, 광지(壙誌) 1편, 권24∼26에 묘지명 6편, 시장(諡狀) 2편, 전(傳) 1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소는 모두 재야 학자로서 국왕의 부름을 사양하는 글로, 당시 국왕이 선비를 중하게 여긴 일과 선비가 겸양의 덕을 나타내고자 함을 알 수 있는 글이다. 「경연계강책자품정의(經筵繼講冊子稟定議)」는 경연에서 강론할 책을 품정(稟定: 왕에게 여쭈어 의논하여 결정함)하는 의론으로, 율곡 이이의 「성학집요」가 제왕이 행해야 하는 학문을 구비하고 있으므로 경연에서 강의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청한 글이다.

서(書)는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반수가 넘는 분량을 차지하고 있으며, 저자의 경륜과 학문의 총정리라 할 수 있다. 「상매산선생(上梅山先生)」은 매산 홍직필과 29차에 걸쳐 「태극도설(太極圖說)」의 동(動)과 정(靜)의 구분과 양자의 관계에서 자세하게 설명되지 않은 부분에 대해 논변하고 있다. 또한 「맹자」의 ‘호연장(浩然章)’에서 호연한 기운이 줄어드는 데 대한 원인과 경위, 「시경」의 「주남편」에 투영된 인정(仁政)의 효과와 백성들이 스스로 주나라의 덕화를 따르게 된 의미에 대해 자세히 묻고, 처첩의 관계, 적서의 분류 등 광범위하게 의견을 교환하고 있다.

답이경학면재(答李景學勉在)」는 이면재(李勉在)와 7차에 걸쳐 서한을 주고받으면서 성리학에 대한 질문에 답한 것으로, 이이·송시열·김창협의 설과 고전을 인용해 이기이원론의 원리를 설명하고, 자기의 뜻은 김창협의 이론을 지지하며 여타의 설은 따르지 않는다고 변명하였다. 이것은 당시 성리학으로 빚어진 호론(湖論)과 낙론(洛論)의 시비와 성리 논쟁을 연구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는 자료가 된다.

잡저 가운데 「변임명로생지위성설(辨任明老生之謂性說)」은 임헌회(任憲晦)가 ‘생(生)이 곧 성(性)’이라는 말을 추가 보충한 것으로, 생이란 성의 본연을 말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에는 두 가지 설이 있는데, 하나는 정호의 설이요 또 하나는 김창협의 설로, 비록 둘이 다른 것 같지만 실은 일맥상통하여 끝에 가서는 부합된다고 설명하며 임명로의 성리설을 두둔한 글이다.

 

[참고문헌]: 「전고문헌(典考文獻)」, 「철종실록(哲宗實錄)」, 「조선유교연원(朝鮮儒敎淵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