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끼리 다툴 때


형제끼리 다툴 때

 

왕자의 난
른바 ‘왕자의 난’은 조선 초기 태조 이성계의 후계자를 놓고 두 차례의 왕자끼리의 싸움이었다. 최종적으로 이방원이 이겨서 태종이 되었지만, 훗날 이 사건은 형제끼리 싸우는 하나의 상징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지금도 재벌 총수 자리나 재산을 두고 형제끼리 다툴 때 이 왕자의 난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과거에는 남성 위주로 지위나 권력이 이동되었으므로 왕자니 형제라는 말을 사용했지만, 현대적 입장에서 볼 때 ‘형제’라는 말 속에는 ‘형제자매’가 축약된 말로 보아야 한다. 그래서 현대적 예로 사용할 때는 후자의 뜻으로 사용하겠다.

사실 이런 왕자의 난은 조선 초기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인류의 역사가 유구하니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왕권을 계승하거나 재산이나 이권을 놓고 형제끼리 다투는 사례는 이루다 말하기 어렵다. 앞에서 소개 했듯이 형이나 연장자를 공경하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집안이나 사회에서 이런 다툼을 사전에 예방하는 차원에서 강조되었을 것이다.
율곡 선생이 형제끼리 다투는 문제를 이 책에서 거론한 것은 두 조목이다. 먼저 하나를 소개하면 이렇다.

 

〔4〕형제가 사랑하지 않고 서로 성내며 다투는 것(兄弟不愛, 相與忿爭)
아이들은 사소한 일로 다툰다

이 글에서는 무엇을 가지고 다툰다는 말은 없다. 일반적인 경계이다. 사실 아이들이 서로 싸우는 경우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다. 성인들도 어렸을 때 싸워봤고, 부모가 된 뒤에는 어린 자녀들이 싸우는 것을 지켜봐서 잘 알 것이다.
어린 자식들이 서로 싸우는 원인은 대개 큰 문제라기보다 사소한 문제로 싸운다. 적어도 어른이 보기에는 그렇다. 가령 맛 음식을 서로 많이 먹으려고, 장난감을 서로 차지하려고, 옷이나 물건을 서로 차지하려고, 어떤 일을 할 때 양보하지 않고 서로 먼저 하려고, 드물게 자신의 비밀을 부모께 고자질 했다고,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의 물건을 손댔다고 싸우는 경우도 흔하다. 그밖에 싸우는 일은 더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 형제끼리의 다툼에 대해 선생이 말하는 두 번째 경계는 이러한 싸움에 대한 일종의 사례이다.

〔5〕음식을 두고 서로 다투며 상대에게 양보하지 않는 것(飮食相爭, 不相推讓)

옛날이나 지금이나 아이들이 다투는 이유 가운데 단연코 큰 것은 음식인 모양이다. 특히 맛있거나 귀한 것은 서로 많이 먹으려고 눈치 보며 다툰다. 언제나 먹는 밥이나 김치 같은 것을 가지고는 다투지 않는다. 물론 과거에 가난하게 살았을 때는 밥 가지고도 다투었을 것이다. 모르긴 해도 더 자세한 사례도 있지만, 이정도만 말해도 알아들을 것이라는 선생의 속뜻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어찌 보면 인간도 동물의 습성이 있어서 자신의 생존에 유리하게 행동한다. 그래서 먹는 것이나 입는 것 등을 먼저 차지하려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제끼리 다툼을 경계하여 사전에 예방하려는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우선 가정의 화목이 그것이다. 유가(儒家)들은 수신(修身)과 제가(齊家)를 통해 남을 다스리는 치인(治人)으로 나아가는 이른바 수기치인(修己治人)을 중요한 이념으로 삼았으므로, 수신과 제가의 차원에서 형제끼리의 화목을 강조했을 것이다. 다음으로 이러한 가정의 화목이 사회의 안녕과 평화를 마련하는 기초이므로 사회의 질서유지 차원에서 강조했을 것이다. 세 번째 이유는 가장 근원적이고 철학적인 인간의 수양 문제와 직결된다. 바로 자신의 욕망을 극복하는 문제이다. 각자가 욕망을 참지 못하고 충족하려는 태도에서 다툼이 발생한다. 그래서 일찍이 공자는 극기복례(克己復禮) 곧 자신의 사적인 욕망을 이기고 예법으로 돌아갈 것을 강조했다. 그런데 그러한 욕망을 극복하는 일은 어릴 때부터 하지 않으면 실천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형제끼리 다투는 것을 경계했는지도 모른다.
사실 이점은 현대 초등학교에서 도덕 교과가 있는 것을 봐도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어릴 때부터 도덕성 곧 도덕을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지 않으면, 커서 도덕적 인간이 되기가 쉽지 않다는 생각에서 비롯한다.

형제는 한 몸이다?

그런데 이러한 형제 사랑 또는 형제끼리 다투는 문제를 경계하는 것은 이론적인 면에서 얼마든지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이론적인 것은 혹시 성인에게나 설득력이 있을지 모르지만, 아이들에게는 이해될 수 없어서 설득력이 약하다. 그렇다면 선생은 이렇게 선언적으로만 말하고 구체적인 언급은 왜 말하지 않았을까? 이 간단한 책의 성격상 말하기 어렵지만, 자세한 내용은 『격몽요결』에서 찾아 낼 수 있다. 이 점에 대해서 선생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형제는 부모님이 남겨주신 몸을 함께 받았으니 나와 한 몸이다. 형제 보기를 ‘너는 너고 나는 나이다’라는 틈을 없애서, 음식과 의복이 있든지 없든지 늘 함께 해야 한다. 혹시 형이 굶주린데 동생이 배부르고 형이 추워서 떠는데 동생이 따뜻하게 지내면, 이것은 한 몸 가운데서 일부가 병들거나 일부가 건강한 것과 같으니, 몸과 마음이 한쪽만 편안할 수 있겠는가?

지금 사람들 가운데 형제가 서로 사랑하지 않는 것은 모두 부모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부모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어찌 자기 부모의 자식을 사랑하지 않겠는가? 형제에게 혹시 좋지 못한 행실이 있으면, 정성을 다해 충고하여 점차 이치로써 깨우쳐 감동하며 깨닫기를 바라야지, 갑자기 성난 얼굴과 마음에 거슬리는 말을 하여 형제끼리의 화목을 잃게 해서는 안 된다

(「거가장」).

 

형제끼리 다투어서 안 되는 이유 가운데 하나를 선생은 형제가 한 몸이라는 점을 들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똑같이 아버지와 어머니의 유전자를 각각 50%를 가지고 있으니 과학적으로 틀린 말은 아니다. 개체는 달라도 유전자의 분포로 볼 때 형제가 한 몸인 것은 분명하다.

문제는 이러한 합리적인 또는 과학적 사실이 도덕적 당위로 전환된다는 점이다. 한 몸이니까 사랑해야 한다는 논리이다. 그러나 이 논리가 옛날에는 먹혔을지 몰라도 지금은 얼마나 설득력이 있을지 모르겠다. 혹시 어렸을 때는 모르지만 성인이 되어 결혼하고 배우자가 생겼을 때 과연 형제들을 한 몸처럼 사랑할 수 있겠는가? 세간의 경험을 가지고 살펴 볼 때 거의 없다고 보는 것이 맞는 판단인지 모르겠다. 배우자는 각자의 친가에 대해서는 혹시 그런 정서가 남아 있을지 모르지만, 시가나 처가에 해당하는 배우자의 형제에 대해서 한 몸이라는 감정을 과연 느낄 수 있을까? 어쩌면 형제끼리의 다툼도 배우자가 있음으로 해서 상속이나 기타 가정사의 문제로 다투지 않을까? 물론 선생이라고 해서 이 점을 몰랐을 리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현실적으로 어렸을 때부터 형제사랑을 교육시키면 그나마 커서도 가정이 화목할 것이라 여겼던 것 같다. 지금의 도덕교육도 그러하다.

다음으로 선생이 형제가 사랑해야 한다는 근거로 부모의 사랑과 연결시켰다. 곧 형제가 사랑하지 않는 것은 부모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것을 역으로 말하면 부모를 사랑한다면 형제를 사랑해야 한다는 논리이다. 다시 말하면 효도를 잘 하는 사람은 형제도 사랑한다는 뜻이다. 문제는 현대인들이 과거처럼 부모에게 효도를 제대로 하는지 의문이다.

형제에게 잘못이 있을 때

흔히 아이들은 형제 가운데 누가 잘못하면 곧장 부모에게 고자질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당사자가 부모께 혼나면 마음속으로 상쾌한지 모르겠다.
선생은 앞의 『격몽요결』에서 형제에게 잘못이 있을 때 어떻게 해야 할지 하나의 사례를 말하고 있다. 요즘 아이들처럼 형이나 동생의 잘못에 대해 그들로부터 일종의 뇌물을 받고 침묵하거나 반대로 혼나도록 부모에게 고자질 하는 것이 아니라, 정성을 다해 충고하되 바른 이치로서 깨우쳐 감동하여 잘못을 깨닫게 해야 한다고 말한다. 덧붙여 성난 얼굴과 마음에 거슬리는 말을 해서 화목을 잃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이 부분은 아마도 약간 나이가 든 형제에게 해당될 것 같다. 어린 아이들에게는 이러한 사례가 발달단계상 적용하기 어렵게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격몽요결』이 초학자를 대상으로 하므로 아동을 대상으로 하는 것과 약간의 간격이 있다. 그렇더라도 부모 된 사람은 아이들이 성난 얼굴과 거슬리는 말을 해서 가정의 화목을 잃지 않도록 지도해야 한다.

아이들의 다툼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렇다면 아이들이 집안에서 다툴 때 부모는 그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옛날처럼 음식이나 의복 등을 가지고 다투는 것을 무조건 금해야 할까? 또는 선생의 말대로 부모를 사랑하지 않는 행동이라고 주지시켜야 할까?
옛 성현들의 말씀이니까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생각은 성경 말씀이니까 무조건 지켜야 한다는 것만큼 위험하고 비교육적이다. 설령 도덕 원리상 형제끼리 다투지 않고 사랑하는 것이 옳을지라도, 아동들의 성장과 발달 단계상 그 다툼을 이해해야 하는 문제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본다.

아이들이 음식이나 그 밖의 소유물을 가지고 다투는 일은 자아나 소유 개념 또는 그에 따른 욕망이 자라고 있음을 반증한다. 욕망은 일차적으로 자신의 생존과 관련이 있으며 지나치지만 않는다면 정당하다. 어떻게 보면 어릴 때 욕망이 강할수록 그 물꼬를 정당한 방향으로 틀어준다면 큰 인물이 될 가능성이 있다. 욕망이 작은 아이는 작은 일에 만족해서 현실에 대한 도전보다 ‘안전빵’으로 살 가능성이 많다. 그래서 그런 욕망 또는 야망을 긍정하는 의미에서 어떤 이는 ‘소년들이여, 야망을 가져라(Boys, Be ambitious!).’라고 말하기도 했다.

형제끼리의 양보? 그거 개나 줘라!

그래서 너무 도덕적인 강박관념에서 다툼 자체를 금시기 여길 필요는 없다. 인간사가 다 다툼의 연속이 아니던가? 부모와 자식 간에도 다투는 일이 있는데 하물며 형제끼리겠는가? 문제는 다툼을 피할 수 없다면 최소화해야 하고, 그 다툼을 어떻게 해결하는지가 더 중요하다. 다툼의 여지가 충분히 있는데 쉽게 양보해버리고 회피하는 것은 문제의 본질을 해결하는 데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아픈 병을 직시해야 치료가 되듯이 다툼 또한 그 원인이 어디서 오는지 드러내 놓고 해결해야 한다. 율곡 선생이 양보를 말한 것은 형제 사이의 요청되는 도덕적 원리이지, 현실 사회에서는 그런 양보의 미덕을 발휘하기가 쉽지 않다.

따라서 형제끼리도 양보를 권장해야 하지만 필자의 경험으로 봐서 그런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인다. 특히 요즘 아이들에게 더욱 해당된다. 과거에는 진학이나 재산 분배 등의 문제에 있어서, 형이나 동생, 특히 오빠나 남동생을 위해 자신의 공부를 포기하고 취업전선에 뛰어들었고, 장손이 재산을 더 많이 갖는 데 대해서도 군말이 없었다. 그런데 그런 양보가 훗날 자기에게 돌아온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이 요즘 기성세대들의 경험이다.

“형제끼리의 양보? 그거 개나 줘라!”

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다툼도 교육의 기회로 삼아야

율곡 선생의 말씀을 읽고 그 다툼의 해결이나 예방을 위해 서로 양보하라고 윽박질러도 아이들은 결코 양보하지 않을 것이다. 도덕적 원리를 강조한다고 해서 아이들이 도덕적이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 답은 선생의 말에 있다.

‘이치로서 깨우친다’

는 말이 그것이다. 욕심을 내는 것도 이치가 있고, 싸우는 것도 나름의 이유가 있다. 아이들의 그런 행위에 대해 일단 존중해주고, 그 이유를 차근차근 들어보아야 한다. 그런 다음 양자의 주장을 들어보고 서로 협상하게 하여, 얻을 것은 얻고 양보할 것은 양보하도록 스스로 결정하게 해야 한다.
이것이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능력을 키우는 방법이며, 도덕적 능력도 거기서 발휘하게 해야 한다. 도덕적 사태를 정확히 직시하지 않고 양보만 하는 것은 도덕적 행위가 아니라 단지 그 사태가 두려워 회피하는 것뿐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