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석(鄭瓘錫)


정관석(鄭瓘錫)                                                            PDF Download

1901년∼1982년. 근현대의 유학자.

19세기 후반 한말에 들어서면서 조선 사회는 한층 더 격심한 사회적 혼란과 사상적 동요를 겪는다. 19세기 후반 유학을 이끌었던 핵심적 인물과 학파로는 화서학파, 노사학파, 한주학파를 들 수 있다. 화서학파는 (화서)이항로 문하의 학파를 말하고, 노사학파는 (노사)기정진 문하의 학파를 말하며, 한주학파는 (한주)이진상 문하의 학파를 말한다.

당시 이들 세 주류학파가 시대와 철학 사상계의 중심을 이루는 가운데, 또 다르게 이들 주류 학파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견지한 학파로는 (간재)전우 문하의 간재학파를 들 수 있다. 당시 (면우)곽종석이 한주학파의 대표로서 영남을 거점으로 하여 많은 제자와 함께 성리학의 학문적 발전과 실천에 힘쓰고 있었다면, 전우는 호남을 기반으로 하여 기호학파 낙론(洛論)계열의 정맥인 (율곡)이이-(사계)김장생-(우암)송시열-(농암)김창협-(미호)김원행-(근재)박윤원-(매산)홍직필-(고산)임헌회의 학통을 계승하고 있었다.

특히 전우는 임헌회 문하의 대표적 인물로, 이이와 송시열의 학설을 계승하고 발전시키는데 전력을 다하였다. 따라서 당시 이이의 학설과 다르거나 이에 비판을 가한 한주학파, 노사학파, 화서학파 등을 공격하며 이들과 논쟁을 펼치는데 앞장섰다. 이에 그는 ‘성사심제(性師心弟)’ 또는 ‘성존심비(性尊心卑)’이 이론을 정립하여 당시에 주리(主理)를 표방하며 성보다 심의 주재성을 강조하던 한주학파, 노사학파, 화서학파를 비판하였다. 이러한 그의 논변은 「노화동이변(蘆華同異辨)」이나 「노한동이변(蘆寒同異辨)」에 잘 나타나 있다.

전우의 대표적인 제자로는 (농암)오진영, (창수)정형규, (경석)임헌찬 등이 있다. 오진영은 경기와 충북의 접경지역인 진천과 음성을 주 근거지로 하여 전우의 학문을 계승한다. 정형규는 영남의 합천을 거점으로 하여 전우의 도학을 계승하여 망국의 시대 속에서 강인한 척사(斥邪)의식과 함께 실천성을 강조한다. 임헌찬은 충청도 연기 지역을 기반으로 하여 (농암)김창협과 (노주)오희상의 학문과 이론을 실천하는데 노력한다. 이처럼 전우 문하에는 많은 제자들이 있어 그의 학문적 전통을 계승하고 실천하고 있었다.

이 글에서는 이들 제자 가운데 (겸재)정관석을 소개하고자 한다. 정관석은 당시 영남 창원을 주 근거지로 하여 전우의 학문과 사상의 계승과 실천을 위해 진력하였다. 그는 특히 전우의 학문과 사상을 계승하며 이를 실천에 옮기고 있던 정형규와도 교유하며 음양태극설(陰陽太極說)을 비롯한 학문적 논변을 가졌으며, 또한 같은 전우의 문하인으로서 학문적 명성을 추앙받고 있던 (석농)오진영과도 교유하며 예설과 심성론을 비롯한 유학의 체계에 대해 서신왕래를 통해 열정적인 토론을 펼치기도 하였다.

정관석은 1901년 6월 5일에 태어나서 1982년 10월 25일 8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자는 윤용(允庸)이고 호는 겸재(謙齋)이다. 본관은 진양으로서 고려 건국공신으로 문하시중 평장사를 지낸 정예(鄭藝)를 시조로 한다. 그 후 고려 말에 등과하여 세종 때에 성균관 대제학과 의정부 찬성사에 이르렀고 문장으로도 이름이 높았던 정이오(鄭以吾)가 8형제를 두게 되어 여덟 개의 파로 나누어진다. 이것이 오늘날 전하고 있는 진양(현재의 진주) 8정(鄭)이다. 그 중 장남인 정분(鄭苯)이 바로 충장공파의 시조가 되는데, 정관석은 바로 이 충장공파의 직계 후손이다.

정관석의 행장에 따르면, 그는 태어날 때부터 풍모가 단정하였다. 또한 지극히 효성스러웠고, 매사를 처리함에 매우 신중한 품성을 가졌다. 학교에 가서도 모든 일을 민첩하게 잘 처리하고 예의범절 또한 잘 갖추어진 모범 학생이었다. 때문에 평소 주위 사람들이 모두 그를 큰 재목이 될 것이라고 칭찬하였다. 그의 체격은 보통 사람들보다 크지 않았지만, 타고난 청수한 얼굴과 용모 때문에 멀리서 바라보면 엄숙하고 위엄한 자태가 있었으며, 가까이서 보면 온화함이 마치 봄날의 따뜻함과 같이 느껴지는 군자다운 기상을 갖추고 있었다.

어려서 이미 유가의 경서(經書)와 제자(諸子)에 어느 정도 통하였고, 약관의 나이에 이르러서는 당시 전라도 부안과 군산 근처의 계화도에서 후학의 학문 교육에 전념하던 전우를 배알하고 가르침을 받게 된다. 정관석은 거기에서 전우로부터 이이와 송시열의 학문의 요지를 듣게 되고, 이에 우리 유학의 도통이 이이와 송시열을 거쳐 전우에게 전하고 있음을 깊게 인식하고, 선생을 더욱 돈독하게 믿고 따르게 된다. 거기에서 선생을 가까이 모시면서 학문탐구와 도를 구하는데 진력한다. 그런 가운데 정관석은 항상 선생의 엄숙한 가르침을 감사하게 여기고, 선생의 가르침을 못다 실천함을 자신의 불민한 탓으로 돌리는 등 겸손한 태도를 가지고 날마다 선생의 가르침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의 묘갈명에서는

“전우선생의 문하에는 진실로 선진학문을 공부하고 덕이 높은 학자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늦게 그의 문하에 나아갔지만 선생을 독실히 믿고 그 학문과 정신을 지키면서 시작부터 끝까지 변치 않고 그 학문의 단서를 추락하지 않은 학자와 제자는 그렇게 많지 않다. 하지만 정관석이 어찌 그 사람이 아니겠는가.”

정관석이 전우의 많은 문하생들 중에서도 가장 스승의 학문을 신뢰하고 따랐을 뿐만 아니라, 전우의 학문과 사상을 계승하여 현실적 실천에 가장 진력한 학자로 손꼽고 있다는 말이다.

때문에 그에 대한 평가를 「행장」에는 그를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무릇 스스로 실천하고 일을 처리함이 모두 명백하고 순정하여 세상의 유학자들이 능히 미칠 바가 아니었다. 비록 바른 도리가 능멸당하는 것을 당하고서는 산야로 물러나와 문을 닫고 자신을 다스리면서 매일 문하의 뛰어난 제자들과 함께 늦게까지 학문에 진력하였고, 성학을 밝혀 한 사람이라도 방정한 선비로 하여금 유학의 정맥을 알게 하여 이단과 사설에 미혹되지 않게 하였으니, 그가 우리 유학에 끼친 공적이 어찌 적다고 할 수 있겠는가.”

정관석은 세상의 어느 누구보다도 근대 유학의 도통을 계승하고 발전시키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친 유학자라는 말이다.

정관석의 성리학 이론은 ‘성은 리이고 심은 기이다’는 데서 출발한다. 심이 기이기 때문에 심은 경(敬)으로써 단속하여야 심과 리가 하나될 수 있다. 당시 영남의 ‘심즉리’를 주장하는 이진상은

“심은 일신의 주재자인데, 심을 기라고 하면 천리가 형기의 명령을 따르게 된다”

라고 하여, 심은 기가 아니라 리로서 일신의 주재자라고 주장한다. 그 이유로써 성리학의 주요 명제인 ‘심통성정(心統性情)’을 거론한다. 예컨대 ‘심통성정’에서 심을 기로 규정하면 기(심)가 리(성)를 주재하는 것이 되므로 옳지 않다. 따라서 심은 기가 아니라 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에 정관석은 『맹자』의 ‘잃어버린 마음을 찾는다’는 구방심(求放心)’의 명제를 제시하면서 이때의 심은 곧장 리로 볼 수 없다고 비판한다. 맹자의 ‘방심’은 리에 해당하는 선한 심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즉 심에는 순선한 리의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악의 의미로서의 ‘방심’도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심은 곧장 리가 될 수 없고 기로 해석되어야 한다. 『맹자』의 ‘구방심’과 관련하여 정관석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대개 심은 신명하여 헤아릴 수 없고 허령하여 사방으로 통하여 일신을 주재하는 것이다. 예로부터 성인들이 입신(入神)의 경지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은 이 심을 구한 것에 연유하고, 반면 어리석은 자들이 자신의 기질을 변화시키지 못한 것은 이 심을 놓아버렸기 때문이다. 성인의 경지에 이르기 위한 학문적 요점은 이 심을 구하는 것인데, 이를 위해서는 경(敬)으로 심을 요약하고 단속하는 공부가 필요하다. 그러한 공부는 또한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계속되어야 한다. 잠깐 넘어지는 사이라도 조심하고 두려워하여 조금의 미세함이 있을 때 이를 미리 막아 심을 놓아버리지 않아야 한다. 이러한 ‘경으로 심을 요약하는 공부(敬以約之)’를 지속하면 인욕을 막고 천리를 보존할 수 있다.”

 

정관석은 ‘경으로 심을 요약하는 공부’가 오래도록 계속된다면 ‘심과 리가 하나가 되는(心與理爲一)’ 경지에 이를 수 있다. 심이 곧 리가 되는 것이 아니라 경을 통한 오랜 공부과정을 거쳐야 리와 하나되는 경지에 이를 수 있다. 왜냐하면 심은 리가 아니라 기의 개념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것이 바로 맹자의 ‘학문의 도는 다른 것이 아니라 그 방심(放心)을 구하는데 있을 뿐이다’는 공부 방법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학문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맹자의 ‘방심’과 같은 잃어버리기 쉬운 또는 악으로 흐르기 쉬운 마음을 구하는데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심은 곧장 리가 될 수 없고 반드시 기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정관석이 주장하는 ‘심과 리가 하나가 된다’는 것은 이진상이 ‘심이 곧 리이다(心卽理)’는 이론과는 다르다. 정관석의 이론은 ‘경으로 요약하는’ 후천적 학습과정을 통하여 심이 리의 본체와 하나 되는, 즉 ‘심과 리가 하나이다’는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 이진상의 ‘심즉리’는 선천적 본체 그 자체로서 심이 곧 리가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정관석의 ‘경으로 요약하는’ 공부 방법은 맹자의 잃어버린 마음을 구한다는 ‘구방심’의 공부 방법에 근거하고 있다. 전우 역시

“우리 공부는 다만 ‘경’자를 가지고서 심기(心氣)를 검속하여 그 심기로 하여금 이 리를 넘지 않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공부를 쌓아서 오래도록 계속한다면 자연히 심과 리가 하나되는 것이 이와 같을 뿐이다.”

라고 하였다. 이처럼 전우와 정관석은 모두 ‘경’으로 심을 검속함으로써 심과 리가 하나 되는 경지에 이를 것을 주장하는데, 이것은 주자가 심이 일신을 주재할 수 있는 근거가 모두 경에 있다고 말한 것과 상통한다. 만약 ‘경’에 근거하지도 않으면서 심으로서 일신을 주재한다고 한다면, 이는 바로 맹자의 잃어버린 마음이 되고 악으로 흐르게 되어 ‘심과 리가 하나되는’ 경지에 이를 수 없다. 따라서 정관석은 예로부터 성현들은 모두 경으로 요약하는 공부를 통하여 심과 리가 하나되는 경지에 이르는 것을 그 학문의 요체로 삼았다고 강조한다.

정관석은 심을 곧장 리와 연결시켜 선한 것으로만 해석하는 이진상과 달리, 심을 기와 연결시켜 선한 측면도 있고 악한 측면도 있다고 해석한다. 심에는 선한 측면뿐만 아니라 악한 측면도 있기 때문에 반드시 ‘경’으로써 단속하고 요약하는 공부를 통해야 리와 하나 되는 경지에 이를 수 있다. 이처럼 심에는 선한 측면도 있고 악한 측면도 있기 때문에 심이 곧장 리로 해석해서는 안되고 기로 해석해야 한다.

따라서 성은 리이고 형이상의 개념이 되고, 심은 기이고 형이하의 개념이 된다. 성은 리이고 형이상의 개념이므로 절대선이고, 심은 기이고 형이하의 개념이므로 선과 악이 함께 있다. 따라서 심은 성과 악이 함께 있으므로 항상 성에 근본하거나 성을 표준으로 삼아야 악으로 흐르지 않을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전우의 ‘심본성(心本性)’ 이론이다. 또한 성과 심의 관계를 높고 낮음에 비교하면, 성은 높은 것이 되고 심은 낮은 것이 된다. 이것을 또한 스승과 제자의 관계로 비유하면, 성은 스승이 되고 심은 제자가 된다. 이것이 바로 전우의 ‘성존심비(性尊心卑)’ 또는 ‘성사심제(性師心弟)’의 내용이다.

정관석은 전우의 ‘심본성’과 ‘성사심제’를 계승하는 가운데 자신의 이론을 전개한다. 먼저 정관석은 정자의 “성인은 천에 근본을 두고 있는 반면에 이단인 불교는 심에 근본한다”는 말을 인용하여 심에 근본할 것이 아니라 천(리)에 근본할 것을 강조한다.

또한 주자의

“성은 태극이고 심은 음양이다”

는 말을 인용하여 자신의 이론적 기반인 ‘성은 리이고 심은 기이다’는 것을 논증한다.

또한 이이의

“성은 리이고 심은 기이다”

는 주장과,

송시열의

“공자와 맹자로부터 정자와 주자에 이르기까지 성을 리에 귀속시키고 심을 기에 귀속시켰다는 것이 그것이다.”

는 말을 거론하여 설명하기도 한다. 또한 주자의 ‘심은 성을 주인으로 한다(心主乎性)’는 설을 ‘군자는 천을 받들고 따른다’는 것과 연결시켜 전우의 ‘심이 성에 근본한다’는 이론적 근거로 삼는다.

이러한 의미에서 전우는

“성인이 근본하는 것은 성이다. 그 성을 근본으로 삼는 것은 심이다. 그러므로 내가 ‘심은 성을 근본으로 한다’라고 말한 것이다. ‘심이 성에 근본한다’는 설은 성인이 다시 태어나더라도 이 말을 바꾸지 못한다.”

라고 하였다. 이러한 스승의 학설에 대해 정관석은 그 공로가 지극히 크다고 평가한다.

“전우선생이 이를 근심하여 이전 성현의 본뜻을 발명하고 ‘천에 근본하고 성을 높이는’ 요지를 밝혀 입이 아프도록 논변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저러한 이단의 해설에 빠지지 않도록 하였으니, 그 마음은 진실로 고되지만 그 성공은 진실로 크다.”

전우의 학설이 사람들로 하여금 이단에 빠지지 않도록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말이다.

 

[참고문헌]: 「겸재 정관석의 학문과 사상에 대한 일고찰-간재의 학적 계승과 실천의 관점에서-」(장병한, 『간재학논총』9, 간재학회, 200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