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우만(奇宇萬)1846∼1916 – (제2편)


기우만(奇宇萬)-(제2편)                                          PDF Download

 

1846(헌종 12)∼1916. 조선 말기의 학자이자 의병장.

관은 행주(幸州)로 지금의 경기도 고양이다. 자는 회일(會一), 호는 송사(松沙)이며 또는 학정거사(學靜居士)라고도 부른다. 기우만은 개항 직전인1846년에 태어나 개화기를 거쳐 조선이 멸망하는 역사적인 격동기를 겪은 호남의 대표적 유림이었다. 노사 기정진 손자로서 그 학문과 위정척사 정신을 계승하여 항일의병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지난 호에 이어 여기서는 기우만의 시 세계를 소개하고자 한다.

그의 시 세계를 보면, 우선 현실에 대해 암울하게 인식하는 내용들을 담고 있다. 이것은 그가 개항 시대 이후에 태어나 일본과 서양 세력에 의해 조선이 침탈당하고 마침내 멸망하는 과정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생의 경험에 의해 그는 현실을 암울하게 표현했다.

 

각라가 중화를 어지럽힌 지 삼백년
角羅猾夏三百年

지나치게 높이 올라가면 반드시 그 끝에 일이 생기는 법
亢極必反竟生事

오랑캐가 때를 틈타 일어나 제멋대로 날뛰니
氐羌乘時起陸梁

방현령이나 두여회조차 손 묶인 형세와 같네
房杜束手指如臂

중심과 뿌리가 벌레에 먹히니 구할 수 없고
心蠱根蠧竟莫救

꼬리는 너무 커져 지금 천지에 흔들기도 어렵네
尾大難掉今天地

기자 가르침 백년 염치 있는 풍조는 쓸어 버렸는지
箕敎百年廉風掃

한 말 곡식, 한 자 베까지도 아전들이 긁어 가버리누나
斗粟尺布輸剝吏

개화가들이 소 울면 말이 응대하듯 하니
牛鳴馬應開化家

여자들은 정조도 없고 선비들은 뜻을 잃었네
女無貞操士喪志

임금을 위협하여 자리를 비우게 하여 노름판의 막돈처럼 만들었으니 虛位挾天作孤注

높은 충정심에 어찌 제 목숨 없어질까 되돌아볼까.
危忠那顧軀命毁

 

기우만이 보기에 당시 현실은 기자에 의해 교화되어 중화에 가까웠던 그 유풍은 모두 사라졌다. 기자가 주나라 중화문명을 가져와 조선 땅에 예악과 문물이 융성하고 윤리가 떳떳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염치없는 풍조가 성행해서 아주 적은 양의 곡식과 옷감조차도 모두 다 빼앗아 가버리는 아전들이 횡행한다. 아전들은 백성을 보호해야 하지만 도리어 가혹하게 세금을 걷고 자신들의 사욕을 채우는데 급급하다. 아전의 임무를 다하기는커녕 인간으로서 기본적으로 갖고 있어야 할 염치조차 없다.

한편 개화가들은 임금을 겁박하고 노름판의 막돈처럼 함부로 대하는 행위를 자행한다. 개화파들은 일본이나 서양을 개화 모범으로 삼았다. 조선의 전통적인 문화, 사상, 제도는 개혁해야할 대상이었다. 일본과 서양도 직접적으로 조선을 침탈하는 것보다는 조선 내의 정치가들과 결탁하는 편이 훨씬 유리했다. 그 과정에서 민비 시해, 고종의 아관파천, 청에 의한 대원군 납치 사건 등이 발생했다. 이는 신하가 왕권에 도전하는 행위로서 유학 윤리 관점에서는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다. 또한 개화파들은 외국의 사상 등을 수용, 확산시키면서 유학적 윤리사상을 비판했다. 그 결과로 여자들은 정조 관념이 없어지고 선비들은 뜻을 잃어버리는 상황이 되었다.

이는 ‘오랑캐가 틈을 타 날뛴’ 결과이다. 그래서 서두에서 ‘각라(청 오랑내)가 화하(華夏), 즉 중화를 흔들’었고 시간이 지나 극성하여 조선에도 오랑캐 힘이 미쳤다고 서술한 것이다. 조선의 위기를 오랑캐와 중화의 대립적 관점, 곧 화이론적 관점에서 파악한다. 그러므로 조선은 ‘짐승 발자욱이 가득하고 귀신이나 도깨비들이 출몰’하는 공간이며 인간의 나라가 아닌 것으로 인식하는 암울함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방현령이나 두여회 같은 능력이 뛰어난 이들도 이 위기 상황을 제어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선비들이 상심하고 청산으로 들어가 버렸기 때문에 나라가 위태로운 지경에도 임금의 걱정을 덜어줄 이 하나 없는’ 현실은 더욱 암울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걸출한 인재들의 부재는 암울함을 더욱 절실하게 해주는 것이다.

 

한번 죽어 양을 붙잡은 이가 나라에 있으니
一死扶陽國有人

천추의 광악에 홀로 그 정신 높구나
千秋光岳獨精神

충성스런 영혼은 응당 주운의 검이 되어
忠魂應化朱雲劒

아첨만 하는 간사한 신하들을 궁궐 계단 앞에서
殿陛頭頭斷佞臣

하나하나 목 베어내리

이 시의 애도 대상은 박영원(朴永源)이다. 1896년 기우만이 의병을 일으켰을 때 박영원도 참여했다가 관군에게 잡혀 죽었다. 기우만은 그의 충의 정신을 기리며 한나라 주운에 비견했다. 주운은 당시 사부였던 장우(張禹)가 직언을 하지 못하고 암첨하는 것을 보고 검을 빌려 장우의 목을 쳐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기우만은 박영원이 주운과 같이 강직함과 충성심을 가졌다고 칭송한 것이다. 기우만은 이런 인재가 활약하기를 희망하지만 현실은 간신들만 가득하다. 결국 주운 같은 박영원이 살아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므로 그저 상상 속에서만 간산들을 죽이는데 그친다. 나라에 도움이 되는 인재가 죽는 허탈감으로 인해 현실의 암울함을 더욱 절실해지는 것이다.

이처럼 기우만은 시를 통해 암울한 현실 인식을 드러냈다. 기우만이 살던 시대는 조선 내부적 모순으로 사회가 호란했고 외세에 의한 침탈까지 더해져 국가로서 총체적인 난맥상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문인들은 자신들의 시를 통해 다양한 현실 대응적 면모를 보였다. 국가의 위기 및 사회적 혼란상에 대해 우려하고 비판하는 경향의 시들이 나타났다. 무엇보다 당시 현황에 대해서는 ‘유학 및 유교적 정신의 쇠퇴’, ‘이적화된 조선’이라는 인식이 공통적으로 나타났는데, 이는 기우만의 시에서 보여준 시대 인식과도 동일한 것이었다. 거기에 더 나아가 당시 유교가 다양한 사상 및 학문들이 포진해 있는 상황에 놓여있음을 명확히 인식, 그것들을 ‘오랑캐의 것’, ‘이단’으로 규정하면서 이설(異說)에 현혹되지 않도록 경계하였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기우만의 문학은 소극적 척사 및 현실 비판 성향을 띠고 있다. 그러나 유학적 가치를 강조하고 후학들에게 유학을 고수하기를 권유함으로써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자신만의 해법으로 시대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그리고 전통 유학의 가치를 재인식하고 계승하고자 했다. 시를 통해서 이러한 의식을 드러낸 것은 ‘문학은 시대 상황을 보여주어야 하며 세상을 바른 데로 이끌어야 한다’는 문학의 사회적 효용을 실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송사 기우만의 시세계 고찰」(<동양학>제60집, 김기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