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명흠(宋明欽, 1705-1768


송명흠(宋明欽, 1705-1768)                                 PDF Download

 

국 18현의 한 명인 송준길(宋浚吉)의 현손으로, 동생 송문흠(宋文欽)과 더불어 당시 송씨 문중의 쌍벽으로 불리웠다. 자는 회가요, 호는 역천(?泉)이며, 시호는 문원(文元)이다. 이재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는데, 이재는 김창협의 학통을 이은 수제자 로서 노론 내 낙론학맥을 계승 발전시켰으며, 영조 치세 연간 노론 벽파의 중심인물로 활동한 문신이다.

동문수학한 미호 김원행과는 막역한 강학지우로 유명하다. 혈족 관계로 보면, 김원행의 생모가 송명흠의 조부인 송병원의 딸이기 때문에 송문흠은 김원행의 외가쪽 사촌 동생뻘이다. 대과에 응시하지는 않았고, 뒤에 학행으로 추천를 받아 청도도사·지평·장령 등이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754년(영조 30) 특별히 서연관(書筵官)을 제수하여 별유(別諭)를 내리기까지 하였으나 글을 올려 사양하였다. 1755년 옥과현감(玉果縣監)이 되었으나 모친상을 당하여 사직하였다. 삼년상을 마친 뒤, 집의·승지·참의 등의 벼슬이 주어졌으나 역시 글을 올려 거절하였다. 만년에 정국이 다소 안정되면서, 1764년 부호군에 임명되고 찬선(贊善)으로 경연관이 되어 정치문제를 논의하는 가운데 영조의 비위에 거슬리는 발언을 하여 파직되었다.

<국역 영조실록>에 따르면, 송명흠은 1763년(영조39) 3월 5일의 상소에서 비유한‘적불(赤?)’이란 말로 영조의 노여움을 샀는데, 이에 대해 계속해서 초선(抄選)들의 상소가 잇따르자 1764년 5월 17일의 기사에서 영조는 “송명흠의 적불이란 말도 역시 산야(山野)의 당론”이라고 단정 지었다. 이후 박세채의 문묘 종향 문제로 당론이 이어 지자 11월 28일에는 신경(申暻)ㆍ송명흠ㆍ홍계능(洪啓能)ㆍ김양행(金亮行)을 모두 초선에서 빼라고 명하면서 당습(黨習)은 망국의 단서인데 그 원인은 산림의 선비에게서 말미암았다고 글을 지어 유시하였다.
그리고 11월 30일에 송명흠, 김양행, 홍계능을 서인으로 만들었다.

적불(赤?)은 붉은 무릎 가리개로, 대부(大夫)이상의 관원은 적불을 착용하고 초헌을 탔는데, <시경(詩經)> 조풍(曹風) 후인장(候人章)에 조(曹)나라 군주가 군자(君子)를 멀리하고 소인을 가까이하였으므로, 대부가 5인인 제후(諸侯)의 제도를 무시한 채 그 복색(服色)을 한 자가 수백 명이었으며 어진 이는 도(道)를 지키느라고 도리어 빈천(貧賤)하게 되었다는 뜻으로 소인들이 조정에 가득한 것을 풍자한 말이다. 송명흠이 올린 상소에

“근습(近習)에 정(情)을 두거나 인척(姻戚)을 사사로이 좋아한다면 장차 덕망 있는 이를 임명하는 관작이 모두 사인(私人)에게 돌아가는 것을 볼 것이니, 사신이 비평한 바에 ‘저 소인들은 적불(赤?)을 한 자가 수백 명인 어리고 예쁜 소녀들이야 굶주리는 수밖에’라고 한 것이 될 것입니다. 이로 미루어 나간다면 온갖 일이 그러할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적불 두 글자를 쓰고 있다. 이 소에 대해 영조가 “내 비록 덕이 없지마는 어찌 조후(曹侯)와 같은 데 이르렀겠느냐?”

라고 역정을 내며, 대신·승지·옥당을 불러 각각 소견을 진달하라 명하였는데, 영의정 신만(申晩)은 임금이 진정하기를 청하고, 좌의정 홍봉한(洪鳳漢)은 말하기를, “이것은 문장을 끊어서 뜻을 취할 것이니, 반드시 무심코 인용했을 것입니다.”라고 하여 변론을 하였고, 승지와 여러 옥당이 대답한 것도 모두 대신의 말과 같았기 때문에 임금의 뜻이 조금 풀려 이에 비답을 내리기는 했지만 그 사지(辭旨)가 몹시 엄중하였다고 기록에 전한다.

애초에 영조가 송명흠을 불러들일 적 기사가 <영조실록>에 실려 있는데, 군신 간에 이와 같은 대화를 나누고 있다. 송명흠이

“격물(格物)·치지(致知)의 공부가 극진하지 못하면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이 공정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나 임금의 덕을 광구(匡救)하는 자는 충(忠)이고 임금의 잘못에 아부하고 순종하는 자는 충이 아니니, 이것을 미루어 나가면 좋아하고 싫어함이 저절로 공정해질 것입니다. 무릇 진언(進言)에 대해서는 말이 쓸 만하면 쓰고 쓸 수 없으면 쓰지 않을 뿐입니다. 어찌 갑작스레 벌을 가할 수 있겠습니까?”

라고 말하였다.
이에 임금이 회답하기를,

“천천히 강구(講究)해야 할 것이니 모름지기 말을 쓰지 않았다 하여 떠나지 말라. 내가 경연관(經筵官)을 얻은 것이 마치 밝은 촛불을 얻은 것과 같으니, 모름지기 상세히 문의(文義)를 진달하라.”

실상 앞의 상소문에서 직언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은 이와 같은 군신간의 후은의 정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려니와, 그 직언의 내용은 주자가 효종에게 올린 <무신봉사>의 격물치지의 학문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처음에 군신간의 후은의 정 이 도타울 때에도 ‘격물치지’를 말하고 상소문에서도 마음을 비우고 ‘격물치지’의 학문에 힘쓸 것을 당부한 내용으로 전후가 수미일관하다. 그러하기에 상소문에 대한 평에서 사관들이 이렇게 적고 있다.

“송명흠은 선정신 문정공(文正公) 송준길(宋浚吉)의 현손(玄孫)으로서 일찍이 가정의 학문을 이어받았으며 글을 읽고 몸을 닦아 사림(士林)이 추앙하는 바가 되었다. 정초(旌招)를 누차 내렸으니 뜻을 지키고 나오지 않더니, 은례(恩禮)가 갈수록 융성해지자 감격하여 조정에 나왔다. 전석(前席)에 출입하면서 애연히(?然)히 서로 믿음이 있었는데, 마침내 처음 의 예우(禮遇)를 계속하지 않기에 이르자 진소(陳疏)하고 지레 돌아감으로써 그 쓰임을 다할 수 없게 되었으니, 사론(士論)이 매우 애석하게 여겼다.”

저서에 《역천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