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상준(柳相浚:1853~1895)


경당 유상준(柳相浚:1853~1895)                      PDF Download

 

그의 본관은 고흥(高興)이며, 자는 백명(伯明), 호는 경당(敬堂)이다. 아버지는 계은(溪隱) 유낙연(柳樂淵)이다. 1853년 지금의 전라북도 고창군(高敞郡) 고수면(古水面) 봉산리(蜂山里)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 유진룡(柳鎭龍)이 전라남도 영광군(靈光郡) 불갑면(佛甲面)에서 살다가 이곳으로 옮겨와서 살았다고 한다.

그는 타고난 성품이 순박하고 인정이 많으며 효성이 지극하였다. 여섯 살 때인 1858년(철종9)부터 가학(家學)으로 문리(文理)를 얻었으며 문장에도 능하였다. 그는 나이 22세 되던 1874년(고종11)에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충청남도 공주의 상로리(上蘆里)에 거주하는 전재(全齋) 임헌회(任憲晦)의 문하에 입문하였고, 그 이듬해에 스승의 허락을 받아 주자(朱子)의 영정(影幀)을 참배하였다. 이때 지은 시(詩)가 있으며, 그 해에 <망향정사실기(望鄕亭事實記)>를 짓기도 하였다.

1876년(고종13) 스승 임헌회가 세상을 뜨자, 장례를 마치고 고향에 돌아와 매년 스승의 기일(忌日)이 돌아오면 제사를 지냈으며 심상(心喪: 상복(喪服)은 입지 않으나 상제(喪制)와 같은 마음으로 근신(謹身)하는 일)으로 3년을 지켜 냈다. 또한 매일 아침 주자(朱子)의 영정(影幀)에 참배하고 난 뒤에 글을 읽거나 글을 짓는 일을 생활화하니, 향리(鄕里)의 사람들이 모두 그를 본받았다고 한다.

1882년 4월에 그는 간재(艮齋) 전우(田愚)를 방문하여 스승의 문집을 간행하는 건으로 의사를 개진하였으나, 11월에 있을 스승의 제사 때 다시 논의하기로 하고 돌아온 사실이 있다. 그가 31세 되던 1883년(고종20)에 드디어 스승 임헌회의 문집 간행을 완성하여 행의를 바르게 지키는 선비다운 면모를 보였다.

그는 살아생전에 혼정신성(昏定晨省: 아침저녁으로 부모의 안부를 살피는 일)을 철저하게 실천한 효자였으며, 사서(史書)에 심취한 영향이 있었는지 그는 평생토록 청나라 연호를 쓰지 않았다. 또한 그는 특히 《소학(小學)》과 《근사록(近思錄)》 등을 손에서 내려놓지 않고 공부했던 근실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평상시에 극기(克己)로 분노를 다스리고 명(銘)을 써 붙여 놓고 엄격하게 자신을 다스렸으며, 시문(詩文) 짓기를 즐겨하지 않았으나, 가례(家禮)의 법도를 지키고 후진(後進)의 양성(養成)에 정성을 다하였다.

타고난 기상은 약한 편이었으나 꾸준히 의연한 기상을 스스로 길러 냈으며, 향교에서 여러 차례 그의 학덕을 천거하려 했으나 단호히 거절하였다. 그는 모친의 장례를 치를 때도 가풍을 지켜, 문상하러 온 조문객들에게 술과 고기를 대접하지 않고 식상(食床)을 마주한 채 옛 가르침을 담론으로 나누는 미덕을 지켜 냈다.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과 간재(艮齋) 전우(田愚) 등과 교류가 깊었다.

그가 43세 되던 1895년(고종32)에 아버지를 두고 자신이 먼저 죽는 것은 불효라고 통곡하면서 죽으니, 그의 부친인 계은공(溪隱公)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일찍 죽은 자식을 애석하게 여겨 그의 문하생으로 하여금 그의 유문(遺文)을 수집하여 정리하게 하고 간재(艮齋)에게 서문(序文)을 부탁하여 2권 1책으로 된 《경당유고(敬堂遺稿)》를 간행하였다. 묘소는 전라북도 고창군(高敞郡) 고수면(古水面) 봉산리(蜂山里)에 안치되어 있다.

<참고문헌>

《경당유고(敬堂遺稿)》, 1897.
《모양지》, 유호석, 양사재, 1963.
《고창삼향지》, 고창삼향지편찬위원회, 1991.
《고창군지》, 고창군지편찬위원회, 1992.
《고창의 성씨》, 이기화 편저, 고창문화원, 2002.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