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응조(申應朝, 1804-1899)


신응조(申應朝, 1804-1899)                                  PDF Download

 

신/신응조는 본관은 평산(平山)이고 자는 유안(幼安), 호는 계전(桂田)·구암(苟菴)이다.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 상현(常顯)의 아들이다. 대유학자 홍직필(洪直弼)의 문인이다.

1852년(철종 3)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이조정랑·부제학 등을 역임하였고, 1866년에 이조참판·대사헌, 1871년에 강원도관찰사, 1873년 형조판서·이조판서를 거쳐 이듬해 예조판서가 되었다.

1882년 7월 판부사(判府事)로 있으면서 왜양일체(倭洋一體)의 처지에 서서 사학(邪學)과 양술(洋術)을 배격하였다. 특히 인천개항은 삼남과 서북의 이권을 침탈당할 위험이 있을 뿐만 아니라, 군사·지리상의 요지이기 때문에 최대의 우려가 있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실질적으로 서양세력을 배척하고 수교 및 통상을 제한하려는 척사적 처지를 정책적 측면에서 주장했다.

임오군란 이후, 재집권한 대원군이 우의정으로 임명했으나 출사하지 않았다. 뒤에 좌의정에 올랐으며, 연로하여 퇴임한 뒤에는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문집으로 『구암집(苟庵集)』이 있다.

 

원래 『구암집』 127권이 필사본으로 가장(家藏)되어 오다가 6·25 때 없어지고 현재 전해지는 ⌈구암집⌋은 이전에 전우(田愚)가 원본에서 직접 발췌·편집하여 필사한 것으로 원집 13권 속집 7권, 재속집 8권으로 모두 28권 14책이다. 전우의 제자인 이인구(李仁矩)에게 전수되어 비장(秘藏)해 온 것을 손자인 석희(錫羲)가 대본으로 제공함으로써 1993년 평산신씨종중이 영인·간행하였다.

옥당시서진소회(玉堂時書進所懷)」는 신응조가 홍문관에 있을 때 경연(經筵)에서 철종(哲宗)을 모시고 강의한 것이다. 학문에 힘써 성군이 될 것을 당부하면서 자신의 소견을 상신하는 글이다. 서(書)는 이선영(李善永)·남공철(南公轍)·조병덕(趙秉悳)·임헌회(任憲晦) 등 당시의 명공석학들과 주고받은 서한이 실려 있다. 주로 경전(經典)과 시사(時事)에 관한 논술이 많다.

잡저는 주로 선비가 심신(心身)을 단련하여 지덕(知德)을 계발하는 수양의 덕목인 「자성(自省)」·「경타(警惰)」·「징분(懲忿)」·「지과(知過)」·「방욕(防欲)」 등이 있다. 또한 인간의 생활을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데 필요한 모든 재화를 획득하고 이용하는 과정을 논하는 「재원(財源)」·「용재(用財)」, 범죄를 행한 자에게 국가 권력이 과하는 제재에 대해 논한 「형벌(刑罰)」 등 다양한 제목을 제시한 논술이 많다.

 

속집의 잡저 81편은 78세 때 12일 동안 저술한 것으로 수필문학이다. 「비언」에서는 판부사(判府事)로 있을 때 왜양일체(倭洋一體)의 처지에 서서 사학(邪學)과 양술(洋術)을 배격하였다. 특히 인천 개항은 삼남과 서북의 이권을 침탈당할 위험이 있을 뿐만 아니라 인천이 군사·지리상의 요지이므로 큰 우려가 있음을 강조하여, 서양세력을 배척하고 수교 및 통상을 제한하려는 척사적 처지를 정책적 측면에서 주장하였다.

설증」은 옛 문헌에서 확실한 증거를 찾아 경사(經史)를 설명하는 고증학(考證學)이다. 「설총」은 여러 학설을 모아 놓은 것이다. 이 책 가운데 「비언」은 조선 말기의 역사적 변천과정의 사회상을 연구하는 데 도움이 되는 자료이다.

 

<참고문헌>

국역조선왕조실록
한국민족문화대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