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이가 친구와 싸울 때


내 아이가 친구와 싸울 때

아이들은 싸우면서 자란다?
필자가 어렸을 때를 기억해 보면 아이들은 잘 놀다가도 걸핏하면 사소한 일로 티격태격 싸웠던 것 같다. 그러다가 언제 싸웠는지 금방 잊어버리고 깔깔거리며 놀았다. 그 후 청소년기를 넘어 청년기에 돌입하면 그 싸운 일을 금방 잊지 못하고 오랫동안 앙금이 남기도 한다. 더구나 장년기나 노년기가 되면 그 사태는 점점 심각해진다.

이렇듯 아이들은 특성상 싸우다가도 친해지기도 한다. 생각해 보라. 초등학교나 중학교 다닐 때 한두 번 이상 안 싸워본 일이 있는가? 그렇다고 지금 동창회에 갔을 때 그 싸웠던 일을 잊지 못해 여태껏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던가? 그 싸운 일도 하나의 추억이 될 뿐이다.
그래서인지 예부터

‘아이들은 싸우면서 자란다.’

라는 속언이 생겼다. 아이들이 다투는 문제에 대해서 너그러웠고, 그 싸움 때문에 야단칠 때도 자기 자식을 혼냈지, 자식 편을 들어 남의 자식 탓을 하거나 그를 혼내주지 않았다. 물론 상대편 부모도 그렇게 했다. 어쩌면 자식이 잘못된 길로 가는 것은 부모가 잘못 가르쳤다고 여겼기 때문에 아이들이 싸우는 경우도 자신의 허물로 알아서 그랬는지 모르겠다.

학교폭력대책자치위원회

그러나 ‘아이들은 싸우면서 자란다.’라는 말은 이제 금기어가 되었다. 싸움을 방치하거나 모르는 척 하거나 사소하게 여기고 넘어갔다가는 문책을 당해야 하는 사람들도 있다. 대체로 학교의 교사들이 거기에 해당된다. 아이들이 다투다가 조그만 피해를 입어도 피해자나 그 부모가 폭력을 당했다고 신고를 하면, 이른바 ‘학폭위(학교폭력대책자치위원회)’를 열어서 조치를 취하도록 되어 있다. 여기서 쌍방의 부모가 합의를 하지 않을 경우 법정 싸움까지 가는 경우가 빈번하다. 필자도 수차례 목격한 바 있다. 그래서 ‘아이 싸움이 어른 싸움 된다.’라는 속담이 빈 말이 아니라는 것도 실감하였다.

가깝게는 지금의 40대 정도의 사람들이 학교에 다닐 때는 아무렇지도 않았던 일이 왜 이렇게까지 되었는지 묻지 마시라. 이런 일이 생기게 된 원인을 밝히려면 또 많은 지면이 필요하므로 여기서 밝힐 수는 없다.
그런데 율곡 선생이 무슨 선견지명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아이들의 싸움에 대해서 크게 두 가지로 경계하고 있다. 먼저 첫 번째 것을 소개하면 이렇다.

 

〔6〕다른 아이를 건드리고 모욕하여 성내며 서로 다투는 것(侵侮他兒, 相與忿爭)
저는 가만히 있었는데…

초등학교 저학년의 담임을 맡으면 아이들로부터 이런 고발이나 변명을 자주 듣는다.
“저는 가만히 있었는데 갑돌이가 나를 건드렸다.”
라는 따위가 그것이다.
정말로 자기가 가만히 있는데 다른 아이가 자기를 건드리는 일는 성격적으로나 심리적으로 특이한 아이가 온 학급을 휘젓고 다니며 아이들을 귀찮게 하는 경우이다. 이 경우의 해결책은 말로 해서 될 일이 아니다. 해당 아이의 심리 발달과정에서 나온 과잉 행동일 수 있고, 또 정서나 심리의 발달장애 때문에 나올 수도 있어서 전문가의 상담이 필요하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정말로 아이가 가만히 있었는데 건드리는 경우는 또 있다. 그 아이의 행동이 다른 아이가 보기에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어른들은 그런 사람을 ‘밉상’이라 하지 않던가? 아이들 집단에서도 정당하든 부당하든 밉상이 존재한다. 그래서 그 밉상을 여럿이 심하게 괴롭히면 이른바 집단따돌림이라는 ‘왕따’ 현상이 생긴다. 물론 모든 집단따돌림이 밉상 때문만은 아니다. 너무 소심해 저항을 못하는 아이도 여기에 해당될 수 있다. 아무튼 어른들은 그 밉상에 대해 상대를 안 해주지만, 아이들은 어쩌면 더 직설적이기 때문에 밉상에 해당하는 아이나 저항을 못하는 아이를 건드리기까지 한다. 문제는 건드리는 아이들에게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해도 별 효과가 없다는 점이다. 불이익을 주거나 혼내는 것 외에는 자발적으로 싫어하지 않게 할 수 있겠는가? 어른들도 못하는 일인데. 이걸 해결하려면 또 다른 전문지식이 필요하다.

정상과 비정상의 차이는 종이 한 장

그러나 사실 그런 특정한 아이만이 아니라 이른바 정상이라고 여기는 아이들도 이런 정서적 과잉행동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그야말로 종이 한 장 차이일 뿐이다. 우리는 언제부터인지 정상과 비정상을 칼로 무를 자른 듯이 구분하는 일에 익숙해졌는데, 많은 아이들을 한 교실에서 오랫동안 관찰해 보면 그런 구분이 너무나 허술하고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대개의 학부모들은 아이들의 지적 발달에만 관심이 많은데, 그것이 성적과 연관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정서나 사회성 발달이다. 그것이 충분히 발달되지 못해서 부조화를 이루거나 미숙할 때 타인과 충돌이 생길 수밖에 없다. 아이 스스로는 자신이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단지 부모의 벌이나 불이익이 무서워 그런 행동을 자제하겠지만 이 또한 한순간일 뿐이다. 먼 옛날과 달리 수많은 아이들을 교실이라는 좁은 공간에 몰아넣어 장시간 머물게 하기 때문에 미성숙한 아이들이 충돌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그 책임을 학교나 담임교사에게 맡기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 가혹하다.

율곡 선생이 이런 말을 한 것을 뒤집어 생각해 보면, 그 옛날에도 아이들끼리 다툼이 있었던 모양이다. 하기야 형제끼리 다툼도 있었는데 남이겠는가? 그래서 다른 아이를 건드리는 것과 그로 인해서 화를 내며 싸우는 것을 경계했다. 원론적인 차원에서 볼 때 오늘에도 여전히 적용되는 가르침이다. 그러나 그 다툼을 어떻게 예방할지 그리고 그 다툼이 생겼을 때 어떻게 해결하라는 안내는 없다. 다만 상대가 나를 놀리거나 비방할 때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를 말하고 있을 뿐이다. 그것이 두 번째 경계이다.

 

〔7〕경계하는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고 버럭 원망하고 화내는 것(不受相戒, 輒生怨怒)
친구끼리 충고할 능력은 있는가?

옛날 유학자들은 공자의 가르침을 따라 친구를 사귀는 방법과 목적을 분명히 했다. 글로서 벗을 모으고(以文會友), 벗을 사귐으로써 바른 행위를 도우는 일(以友輔仁)이 그것이다. 여기서 말한 바른 행위의 원문은 인(仁)으로써 도덕적 행위의 총칭 정도로 이해하면 되겠다. 그래서 공자는 친구에게 잘못이 있을 때 이렇게 하라고 당부하였다.

마음을 다해 알려서 잘 인도하되 그것이 불가능하면 그만두어 스스로 욕됨이 없게 하라
(忠告而善道之, 不可則止, 無自辱焉.

『논어』, 「안연」).

 

친구가 고치지 않는데도 자꾸 충고하면 자연히 멀어진다. 그래서 스스로 모욕이 된다. 선생도 이런 전통에 따라 친구에게 잘못이 있으면 경계시키는 충고를 해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도 아이가 버럭 원망하고 화를 내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보았다.
문제는 요즘 아이들 수준에서 친구에게 충고할 수 있느냐이다. 그렇게 못하는 데에는 두 가지 난점이 있다. 하나는 친구에게 충고할 정도로 도덕성이 발달되었는가 하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충고해야 할 줄 알면서도 그 친구와 멀어질까봐 오히려 동조하는 행위가 그것이다. 전자는 초등학교 저학년, 후자는 고학년에 주로 해당되는데, 어쩌면 아이들이 그만큼 약았거나 도덕적 상황에 민감하지 않다고 하겠다.

남에게 비방을 당했을 때

여기서 더 나아가 선생은 『격몽요결』에서 남에게 비방을 당했을 때는 싸우거나 대항하지 말고 이렇게 대응하라고 말한다.

누가 나를 헐뜯고 비방하거든 반드시 돌이켜 반성해야 한다. 그래서 내게 정말로 비난당할 만한 행위가 있었으면 스스로 꾸짖어 그 잘못을 고치기를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만약 나의 잘못이 조금밖에 없는데 남이 과장해서 말했다면, 그들의 말이 좀 지나쳤어도 내게 원인이 있었으니 그 잘못을 제거하여 털끝만큼도 남겨두지 말아야 한다. 만약 내게 아무 잘못이 없었는데 남이 거짓말로 날조했다면, 이는 망령된 사람일 뿐이니 망령된 사람과 어찌 진실을 따지겠는가?

(「접인장」)

유학자는 어떤 잘못된 일을 당해서 남 탓보다 먼저 자신을 되돌아본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수기치인(修己治人)의 가르침을 따르기 때문에, 먼저 나의 수신(修身)이 제대로 되었는지 따지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도 자신을 먼저 되돌아보는 정신이 발휘되고 있다. 이것은 수신이 어느 정도 된 사람에게 해당되는 가르침이라고 하겠다. 그러니까 초학자라고 해서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나름의 기초교육을 받았다고 전제하면 되겠다.

문제는 요즘 초등학교 이하 수준의 아이들로서는 이것이 가능할지 참 의문이다. 아니 어른들조차도 열에 한둘도 기대하기 어렵다. 누가 내게 비방을 했다면 따질 것 없이 다짜고짜 명예훼손으로 고소할 것이다. 물론 자신에게 잘못이 있더라도 그것을 애써 감추며 변호사를 통해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소송을 전개할 것이다. 특히 내게 아무 잘못이 없었는데 남이 거짓말로 날조할 경우는 재판에서 이길 확률이 100%이니, 그야말로 정신적 피해보상으로 이득을 취할 절호의 찬스가 아닌가?

이렇듯 선생의 가르침과 현실의 간극은 이렇게 크다. 당시는 덕과 도덕을 높이는 사대부 선비들이 나라를 이끌어 가는 사회였으니 가능할지 몰라도, 오늘날은 자본이 이끌어 가는 사회이니 이와 같은 현상이 당연할지 모르겠다.

교육적 역할

아이들이 서로 다투는 문제에 대해 지나치게 반응하여 소송까지 가는 것도 문제이지만, 아이들은 싸우면서 자란다고 믿어 방치하는 것도 바람직한 모습은 아니다. 사실 ‘학교폭력대책자치위원회’를 두고 다툼을 해결하려는 모습은 어쩌면 행정기관의 면피용 장치에 지나지 않는다. 소송까지 가면 책임 소재까지 물어야 하니 문제가 복잡해지니까 그 수준에서 해결해 보라는 가상한 숨은 뜻이 있을 것이다. 그게 있어 갈등을 중간에서 해결하는 완충적 역할을 하는 긍정적인 부분도 있고, 그것을 빙자하여 걸핏하면 쉽게 해결할 수 있는 사소한 다툼을 가지고 ‘학폭위’를 열어달라고 하여 자신의 요구를 들어달라고 하고,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소송으로 가는 경우의 부정적인 모습도 있다. 모든 제도가 그렇듯이 완벽한 것은 없다. 다 이렇게 장단점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모든 다툼이 폭력을 유발하는가? 그렇지 않다. 다툼의 종류는 무척 많고, 그 가운데 어떤 것은 아이가 성장하면서 필수적으로 겪는 문제도 있다. 각자의 생각이 자라고 그에 따라 의지가 들어나면서 주장이 강해지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대부분의 인간사가 갈등에 따른 다툼의 연속이라 말하지 않았던가?
그런 다툼을 죄악시 여길 것이 아니라, 그 다툼의 종류가 어떤 것인지 또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부모와 교사의 교육적 역할이 매우 중요할 뿐이다. 해당 아이의 정서적 미숙함이나 결함 때문이라면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하겠지만, 그런 경우가 아니라면 다툼의 원인에 대해서 당사자의 의견을 존중해 들어볼 필요가 있다. 한쪽이 도덕적으로 미숙할 경우도 있고, 서로 양립 불가능한 주장을 할 경우도 있고, 또 오해에서 비롯한 경우도 있을 것이다. 각각의 원인에 따라 교육적 해결책도 달리해야 한다.

만약 양자가 주장이 강해서 싸운다면, 도덕률을 앞세워 무조건 야단칠 것이 아니라, 앞의 형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협상이나 양보 등을 통해서 스스로 갈등을 해결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어차피 이들도 그런 방식을 통해 성장하여 성인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갈등하고 싸우는 것보다 협상하고 양보하는 것이 더 낫다는 점을 깨닫도록 해야 한다.

역성드는 것은 금물

학교폭력으로 인해 사람이 다쳐 내 아이가 가해자 또는 피해자가 된 경우라면 상대방과 합의가 잘 안돼서 소송까지 갈수 있겠지만, 그런 경우가 아니라면 부모는 아이를 편들어야 할지 야단쳐야 할지 신중하게 고려해야 한다. 내 아이를 편들었는데 만약 그 싸움이 내 아이의 잘못으로 생겼다면, 반성할 줄 모르는 아이로 키워 그를 망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아이의 잘못이 밝혀졌다면 상대방에게 사과함과 동시에 철저히 반성시켜야 한다. 그것이 진정으로 아이의 장래를 위한 길이다. 그렇지 않고 다짜고짜 상대 아이를 욕하며 아이 편에서 역성든다면, 그 아이의 미래는 기대할 것이 없어진다. 옛날에는 다소 가혹하리만큼 되레 자기 자식을 야단치고 훈계했다. 앞의 율곡 선생의 논리를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