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계능(洪啓能:?~1776)


홍계능(洪啓能:?~1776)                                          PDF Download

 

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남양(南陽)이며, 호는 신계(莘溪)이다. 아버지는 참봉 우조(禹肇)이다. 1750년(영조26)에 우의정 정우량(鄭羽良)의 천거로 등용되어 1757년(영조33)에 왕손교부(王孫敎傅)가 되고, 이듬해에 자의(諮議)가 되었다. 1759년(영조35) 평안도도사(平安道都事)로 나갔다가 곧 돌아와 지평(持平)을 거쳐 이듬해에 집의(執義)로 승진하였으며, 1763년(영조39)에는 세자시강원 진선(世子侍講院進善)이 되었다. 이듬해에 성격이 난폭하고 남의 비방을 일삼는다 하여 파직되었다가 1768년(영조44) 다시 진선(進善)에 기용되었다.

이 때 또 다른 풍산 홍씨(豊山洪氏) 일파가 시파(時派)를 결성하여 뒤에 정조가 될 세손(世孫)을 보호하려 하자, 벽파(僻派) 홍인한(洪麟漢)과 더불어 세손의 즉위를 반대하였다가 1776년(영조52)에 정조가 즉위하자, 하옥되어 옥사하였다. 아들 신해(信海)와 조카 이해(履海)도 모두 주살(誅殺)당하였다.

명의록(明義錄)》 에는 홍계능(洪啓能)을 대정현(大靜縣)에 천극(荐棘)하라고 명한 기사가 보이며, 대사간 이의익(李義翊)도 계사를 올려 그에 대하여 신랄한 지적을 하면서 그가 산림(山林)에 초선(抄選)된 것이 부당하다고 논의한 글이 보인다. 이렇듯이 《왕조실록》에만 해도 무려 120여 건의 기사가 보이는데, 관직을 제수하거나 이러저러한 사건과 연루되어 얽히고설킨 가운데 유배를 가는 등 관직생활이 순탄하지 않았음을 직감할 수 있다.

실제로 《영조실록(英祖實錄)》의 1758년(영조34)조에 보면, 우의정 신만(申晩)은

“홍계능(洪啓能) 등이 학문이 정밀하고 깊은데도 오히려 정초(旌招)의 반열에 들어가지 못하였으니, 매우 애석한 일입니다.”

라고 아뢰자, 임금이

“초선(抄選)하는 예로써 거행하라.”

고 명하였는데, 이에 대하여

“홍계능의 사람됨이 음흉하여, 유자(儒者)로서 이름을 도적질하였다고 식자들이 비웃었다.”

라고 적고 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의리에 입각한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한다는 것이 지론임을 이 홍계능의 행적을 통해서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겠다. 세상 사람들이 흔히들 말하는 ‘선악개오사(善惡皆吾師)’란 바로 이런 경우를 놓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일에는 늘 두 가지 양상이 대두된다. 하나는 본받아야할 대상으로 그렇게 함으로써 나의 삶에, 또는 나의 행동에 유익한 정보가 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반대로 경계로 삼아야 할 대상으로 그렇게 하면 절대로 안 되는 것이며, 그렇게 할 경우에 패가망신하거나 엄청난 물의를 야기시키는 결과를 낳는 것이다. 이 두 가지의 경우를 정확히 인지하고 있어야만 어떤 문제에 봉착하였을 때 슬기롭게 대처할 수 있게 된다. 그런 연후에 이를 지혜롭다고 하게 되는 것이다.

홍계능의 경우는 역사적인 기록을 통해서 볼 때 안타까운 면이 적지 않다. 뭐가 문제인가? 순간의 판단으로 평생을 그르친 결과인가! 역사에 길이 오명(汚名)을 남겨서 후인들로 하여금 경계로 삼계된 것이 본인의 의도한 바는 아니었을 것이다.

<참고문헌>
– 《영조실록(英祖實錄)》
– 《정조실록(正祖實錄)》
– 《속명의록(續明義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