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중국 연변 포럼

>> 2018년 중국 연변 포럼 <율곡학과 유학사상>

겸재(謙齋) 조태억(趙泰億:1675~1728)


겸재(謙齋) 조태억(趙泰億:1675~1728)        PDF Download

 

1.생애와 이력
겸재 조태억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양주(楊州)이며 자는 대년(大年), 호는 겸재(謙齋)·태록당(胎祿堂)이다. 증조부는 조존성(趙存性), 조부는 형조판서 조계원(趙啓遠), 부친은 이조참의 조가석(趙嘉錫)이며, 어머니는 윤이명(尹以明)의 따님이다. 조태구(趙泰耉)와 조태채(趙泰采)의 종제(從弟)인 그는 최석정(崔錫鼎)의 문인이다.

1693년(숙종 19) 진사를 거쳐 1702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검열(檢閱), 지평(持平), 정언(正言)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고, 1707년 문과중시(文科重試)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1708년에 이조정랑(吏曹正郎)을 거쳐 우부승지(右副承旨)를 역임하고, 다음 해에 철원부사(鐵原府使)로 나갔다가 1710년에 대사성(大司成)에 오르고, 통신사(通信使)의 직함을 띄고 일본에 다녀왔다.

그 뒤 이조참의(吏曹參議)와 호조참의(戶曹參議)를 역임하였다. 1712년에 왜인(倭人)의 국서(國書)가 격식에 어긋났다는 이유로 관작(官爵)이 삭탈되고, 문외출송(門外黜送)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1714년에 다시 기용되어 이듬해 공조참의(工曹參議)가 되고 예조참의(禮曹參議)를 거쳐 1717년에 여주목사(驪州牧使)로 나갔다가 1719년에는 장례원판결사(掌隸院判決事)가 되었다.

1720년에 다시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로 나갔다가 1721년(경종1)에 호조참판(戶曹參判)을 역임하고, 그 해에 대사성(大司成)과 세제우부빈객(世弟右副賓客)이 되었다. 이어 부제학(副提學), 형조판서(刑曹判書), 지경연사(知經筵事), 우빈객(右賓客)을 거쳐 1722년에 대제학(大提學)을 역임하였으며, 공조판서(工曹判書)와 예조판서(禮曹判書)를 거쳐 1724년에는 호조판서(戶曹判書)가 되었다.

그 해에 영조(英祖)가 즉위하자, 즉위의 반교문(頒敎文)을 지었고, 병조판서가 되었다가 출사(出仕)한지 8일 만에 복상(卜相)이 있어 이조판서 이조(李肇)의 추천으로 우의정(右議政)에 올랐다. 같은 날 호위대장(扈衛大將)을 제수 받았으며 대제학을 겸임하였다. 1725년(영조1)에 사간(司諫) 이봉익(李鳳翼)과 지평(持平) 유복명(柳復明) 등의 요청으로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전직되었다가 이어 삭출(削黜)되었다.

1727년에는 정미환국(丁未換局)으로 다시 좌의정(左議政)에 복직되었다가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로 전임하였다. 1721년에 호조참판으로 있을 때서 조태구(趙泰耈), 최석항(崔錫恒), 이광좌(李光佐) 등과 함께 세제(世弟)의 책봉과 대리청정(代理聽政)을 반대하여 철회시켰으며, 소론정권(少論政權)에 참여하여 크게 기용되었다.

영조 즉위 후에 김일경(金一鏡) 등 소론 중에 과격성향을 지닌 이들을 국문할 때 책임관이 되었으나 위관(委官)의 직책을 편치 않게 여겨 임금에게 친히 국문하기를 청하기도 하였다. 초서(草書)와 예서(隸書)에 능하였으며 영모화(翎毛畵)를 잘 그렸다. 1755년에 나주괘서사건(羅州掛書事件)으로 관작이 추탈되었다. 저서에는 겸재집(謙齋集)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2.「실록(實錄)」에 보이는 조태억의 행적
겸재 조태억은 이언적(李彦迪)의 후손을 세우고, 박팽년(朴彭年)과 하위지(河緯地)와 곽준(郭䞭)의 후손을 거두어 등용하기를 요청하면서 다음과 같이 상소를 올렸다.

“신라(新羅) 때의 여러 능(陵)이 황폐해져 풀이 무성하므로 눈에 보이는 것이 모두 마음을 상하게 만들며, 48기의 왕릉 가운데 잃어버린 것이 대부분입니다. 신라왕의 시조전(始祖殿)의 경우는 곧 우리 세종(世宗) 때에 세운 것으로, 봄·가을의 중월(仲月)에 평양(平壤)에 있는 기자(箕子)의 숭인전(崇仁殿)과 마전(麻田)의 고려 태조(高麗太祖)의 숭의전(崇義殿)의 경우 모두 그 자손을 참봉(參奉)에 임명하여 그 제사를 받들되 옛날 삼각(三恪)의 의전과 같이 하였습니다. 세종 때의 사당을 세워 치제(致祭)한 것은 성의(聖意)를 둔 바 있는데, 왕자(王者)의 사당에 시골 사람이 일을 맡으니, 끝내 구간(苟簡)한 데로 돌아갑니다. 만약 숭인전과 숭의전의 규례(規例)에 의해 전호(殿號)를 게시하라 명하고, 참봉 두 사람을 차출(差出)하되, 혹은 신라왕의 자손으로 채우거나 혹은 유식한 선비로 임명하여 관원의 복색(服色)으로 전묘(殿廟)에 제수를 올려 제사를 모시게 한다면, 또 이들로 하여금 때때로 여러 능침(陵寢)을 봉심(奉審)하고 추목(芻牧)을 금하게 하며, 또한 경순왕(敬順王)의 유묘(遺廟)도 보살피게 한다면, 국가에서 경건하게 하는 도리에 더욱 빛이 날 것입니다.”

 

그러자 임금은 다음과 같이 비답을 내려 이르기를, “상소한 내용이 진실로 매우 마땅함을 얻었다. 전조(銓曹)와 예조(禮曹)로 하여금 즉시 거행하게 하라.”하였다. 이 부분에 대하여 사관(史官)은 다음과 같이 평어(評語)를 붙여 이르기를, “영남의 문관 및 선현(先賢)의 후예들을 매번 재질(才質)에 따라 조용(調用)하도록 하였으나 정관(政官)이 색목(色目)에 구애받고 또 사사로운 청탁(請托)을 따라 끝내 실효가 없었으며, 조태억의 소청(疏請)도 또한 빈말로 돌아가고 말았으니, 개탄스러운 일이다.”라고 하였다. 이 기록은 내용은 경종실록 경종1년 5월 11일조에 수록되어 있는 내용이다.

그리고 「실록(實錄)」에 보이는 또 다른 기사 내용이 있는데, 그가 통신사의 임무를 띠고 일본에 가서 국서(國書)를 전달하는 과정에서 생긴 문제인데 문외출송되(門外黜送되)기까지의 전말을 보여주는 기사이다.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통신사(通信使) 조태억(趙泰億) 등 세 사람이 의금부(義禁府)에 공초(供招)한 내용을 보기로 한다.

범휘(犯諱)에 관한 한 가지 사실은 차라리 우리 쪽에서 먼저 고쳐 잘못을 저 사람들에게로 돌려서 저 사람들이 할 말이 없게 했어야 할 것이었으며, 서식(書式)을 고쳐 보내는 한 가지 사실은 차라리 이번의 고치기를 청하는 단서(端緖)로 인하여 우리 쪽에서 추환(推還)하여 먼저 고쳐서 체면의 손상과 모욕이 돌아오지 않게 했어야만 하였습니다. 대마 도주(對馬島主)에게 글을 보내어 서로 더불어 적절하게 처리한 뒤에 치계(馳啓)하여 품청하였으니, 국서의 추환은 우리 쪽에서 먼저 발(發)한 것이지 본디 저 사람들이 물리쳐 돌려보낸 것이 아닙니다.

왜인(倭人)의 성품은 이상하여 반드시 굳게 고집함을 능사로 삼아 필경 비례(非禮)로 몰아내고 쫓아냄을 면하지 못할 경우 향후의 조치가 또한 깊이 염려스러웠으니, 어찌 돌아가는 기일의 더디고 빠름을 계교(計較)하여 힘써 다투지 않았겠습니까. ‘겁을 내었다.’느니, ‘마음이 흔들리고 의심하였다.’느니 하는데 이르러서는 실로 지극히 원통합니다. 문목(問目) 가운데 전후의 장계(狀啓)에 조금도 인구(引咎)하지 않았다는 한 가지 사실은 원래 스스로 변명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 내용으로 보면 조태억이 일본에 가서 국서를 전달하려 하자, 일본 측에서 격식이 맞지 않는다고 트집하면서 받아들이지 않자, 당당하게 처리하지 못하고 그냥 물러온 것 아니냐는 혐의를 받게 되어 이에 대하여 해명한 내용으로 보인다. 여기에 대한 임금의 비답은 “형벌을 쓰지 말고 의논하여 처리하라.”고 명하자,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 김우항(金宇杭)과 황흠(黃欽), 동의금부사(同義禁府事) 남치훈(南致熏) 등은 다음과 같이 의견을 제시하였다.

“이미 전한 국서(國書)를 추환(推還)하고 멀리서 조정(朝廷)에 계품하여 고치기를 청한 것은 이미 전대(專對)의 책임을 잃었으며, 서식(書式)에 대한 한 가지 사실은 잘못이 저 사람들에게 있으니 마땅히 죽기로써 다투어서 회청(回聽)을 기약해야 했는데 이렇게 하지 않고 경솔하게 먼저 돌아왔으니, 왕명(王命)을 받들고 사신으로 가서 실직(失職)한 죄를 면하기 어렵습니다. 법문(法文)에 꼭 들어맞는 근거할 만한 율(律)이 없으니, 성상께서 재량하실 것을 품청합니다.”

 

이 의견에 대한 임금의 비답 역시 “대신(大臣)에게 물으라.”고 명하였다. 이에 다른 대신들이 의견을 각각 제시하였다. 그 중에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서종태(徐宗泰)와 이이명은 또 다음과 같이 의견을 제시하였다.

“옛 서식(書式)을 따름은 이치가 곧고 말이 바르니, 반드시 밝게 깨우치고 힘써 다투어서 그 회청(回聽)을 기약하여야 마땅한데도 그 강박(强迫)에 의해 돌아왔고, 경솔하게 강호(江戶)를 떠나 쟁변(爭辨)할 길이 없게 만들었습니다. 서식은 중대한 것인데도 사신은 이에 있어 생각이 잘못되어 마침내 막중한 국서(國書)를 이미 전하였다가 도로 가지고 돌아오기에 이르렀습니다. 저 사람들의 뜻이 모만(侮慢)에서 나오지 않았다고 이를 수 없고, 나라의 체통이 지극히 손상되고 모욕을 받았습니다. 청컨대 정법(情法)을 참작하여 감죄(勘罪)하소서.”

 

다른 대신들이 계속해서 의견을 제시하였는데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김창집(金昌集)은, “사신의 장계(狀啓)에 ‘왜인의 말이 「만약 끝내 가지고 가고자 하지 않는다면, 이미 받은 국서는 우리나라로 돌려보내고 이미 바친 국서는 받아 가지고 조선(朝鮮)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하였으니, 이제 어찌 추환(推還)의 일이 우리 쪽에서 먼저 나왔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또 말하기를, ‘줄곧 엄체(淹滯)하여도 결코 회동(回動)의 형세가 없다.’고 하고, 또 말하기를, ‘사신의 일이 엄체됨은 하루가 급하다.’고 하였으니, 염려하는 바가 유체(留滯)에 있었음을 또한 어찌 덮을 수 있겠습니까. 처음에 비록 왜인과 왕복(往復)하기는 했지만 그 왕복한 것은 사흘을 넘지 않았으니, 또한 귀로(歸路)에 오르기에 급하였다고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말미의 죄의 경중(輕重)을 의논함에 있어서는 인혐(引嫌)하여 의견을 명백하게 제시하지 않았다. 이 의견에 대한 임금의 비답은, “판중추부사 서종태의 의논이 바로 내 뜻에 맞다.” 하고, 아울러 관작(官爵)을 삭탈(削奪)하여 문외 출송(門外黜送)하라고 명하였다. 이것이 조태억에 대한 문외출송(門外黜送)의 전말이다. 이 내용은 「숙종실록(肅宗實錄)」 38년 3월 27일(경술)조에 그 자세한 기사가 기재되어 있다.

 

3. 조태억의 음악과 그림에 대한 예술성
겸재 조태억이 음악(音樂)에 대하여 문답한 글을 정리해 놓은 것으로 「좌간필어(坐間筆語)」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은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1책. 활자본이다. 겸재가 1711년(숙종37) 통신사 정사(正使)로 일본에 갔을 때에 연회에서 연주된 음악(燕樂)에 대하여 아라이(新井白石)와 문답한 내용을 정리해 놓은 책인데, 책머리에는 스즈키(鈴木公溫)와 무로(室鳩巢)의 서문이 있다. 당시에 통신사절은 정사 호조참의 조태억, 부사 사복시정 지제교(司僕寺正知製敎) 임수간(任守幹), 종사관(從事官) 행병조정랑지제교(行兵曹正郎知製敎) 이방언(李邦彦) 등이었다. 이들은 이 해 5월에 길을 떠나서 이듬해 3월 서울에 돌아왔다. 이때의 기록으로는 이 「좌간필어」 말고도 「강관필담(江關筆談)」과 부사 임수간의 「동사일기(東槎日記)」, 압물통사(押物通事)로 따라갔던 김현문(金顯門)의 「동사록(東槎錄)」 등이 이 책에 함께 편집되어 있다.

당시 1709년에 일본에서는 도쿠가와막부(德川幕府)의 5대 장군 도쿠가와 쓰나요시(德川綱吉)가 죽고 도쿠가와 이에노부(德川家宣)가 뒤를 이었다. 그래서 통신사를 보내게 되었던 것인데, 1711년 11월 3일에 유자(儒者)로서 도쿠가와 이에노부의 고문이었던 아라이가 우리 사신을 위하여 연회를 베풀었다. 이 자리에서 일본 측은 특별히 고악(古樂)을 연주하였던 것이다. 그 곡명은 <진모(振鉾)>, <삼대염(三臺鹽)>, <장보악(長保樂)>, <앙궁악(央宮樂)>, <인화악(仁和樂)>, <태평악(太平樂)>, <고조소(古鳥蘇)>, <감주(甘州)>, <임가(林歌)>, <능왕(陵王)>, <납증리(納曾利)>, <장경자(長慶子)」 등의 12곡이다.

좌간필어」에는 아라이가 12곡에 대하여 내용을 설명하고, 우리나라 사신들이 그것에 대한 느낌이나 의문점을 제시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이 가운데에 <장보악>에 대하여 아라이는 “이는 고려부(高麗部)의 음악입니다. 귀국(貴國)에 지금도 이 악무(樂舞)가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이에 대하여 조태억은 없다고 대답하였다. 그런데 이 12곡 가운데에 고려부 음악은 모두 다섯 곡이다. <장보악>을 비롯하여 <인화악>, <고조소>, <임가>, <납증리> 등이 그것이다. 조태억의 기록[輯]’으로 되어있는 「강관필담」은 이틀 뒤인 1711년 11월 5일에 아라이가 우리 사신 숙소를 방문하였을 때에 풍속과 세계 정세 등에 대하여 필담을 나눈 내용이다.

그리고 겸재는 동시대 인물인 정선(鄭敾)과 같은 호를 쓰고 있으며, 특히 초서(草書)와 예서(隸書)를 잘 썼으며, 영모(翎毛)를 잘 그렸다고 하는데, 남아있는 작품은 그리 많지 않다. 유일하게 미국 필라델피아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그의 작품이 있는데, 미술관의 설명 자료에 의하면 이 그림은 1970에 개인 수집가의 기증에 의해 현재의 미술관에 소장하게 되었다는 간단한 해설이 있다. 그리고 현재까지 남아 있는 그의 작품은 대단히 드문 편으로 간송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그의 제발(題跋)이 있는 화훼도가 한 점 있으며, 작가가 일본 통신사로 갔을 때 남긴 기마인물도가

현재 한림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정도이고, 통신사로 갔을 때 일본화가 가노츠네노부가 그린 그의 초상화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림에 대한 설명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지본 담채화로써 세로가 긴 축형의 그림으로 상단에 둥근 보름달이 떠 있고 그 아래로 청록색의 바위에서 자라난 한 나무가 하얀 꽃을 활짝 피웠으며, 바위 아래에는 대나무 잎이 외곽을 두르는데 그 속에 토끼 두 마리가 함께 앞을 보고 있고, 토끼와 함께 붉은 색과 푸른색의 꽃도 함께 피어있는 아름다운 모습이다. 그리고 그림 안에 들어 있는 화제(畫題)를 옮겨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 있겠다.

 

옥토끼가 나란히 앉아 밝은 달 바라보니 玉兎並往閒望月
맑은 기운 호흡하며 달의 정신 느껴보네 呼吸淸氣月精神

 

달은 현 치세의 임금을 상징하는데, 제화 글에서 보름달이 둥실 떠서 맑은 기운을 호흡한다고 하였으니 임금의 치세가 온 세상에 골고루 미치는 태평성세의 시대임을 말하고 있으며 바위의 꼭대기와 달 사이에 보이는 벌은 ‘봉(奉)’의 의미가 있어 임금의 뜻을 받들어야 된다는 뜻이 있다. 바위는 청록의 푸른빛을 가하고 작은 태점으로 이끼의 모습이 장식되어 있는데, 바위 자체는 오랜 세월 또는 장수의 의미가 있으면서 바위의 푸른색은 오행(五行)의 의미로 볼 때 인(仁)의 뜻이 있고, 바위 밑에서 자라난 한 줄기의 나무에 활짝 핀 흰색의 꽃은 의(義)의 뜻이고 그 바위 주변에 대나무 잎이 드러나 있는 것은 올곧은 지조와 선비의 기상을 말하고 있다. 아울러 두 마리의 토끼는 부부애와 갈라진 입술에서 다산(多産)의 기원 그리고 토끼 주변의 붉은색과 푸른색의 꽃은 음양(陰陽)의 조화를 말하고 있는 듯하다.

이 그림은 회갑이나 고희를 맞이한 가까이 있는 벗에게 선물한 그림으로써 ‘성격이 곧고 인의(仁義)를 갖추었으므로 주상(主上)의 명을 받들고, 부부가 서로 뜻을 화합하여 오랫동안 장수하기를 기원’하는 축원의 그림으로 증정된 작품으로 보인다.

이 내용은 아래 인터넷 주소의 블로그에서 인용해 온 것인데, 화제의 내용은 다소 수정을 가하였다는 것을 밝혀둔다.

 

<참고문헌>
「숙종실록(肅宗實錄)」
「경종실록(景宗實錄)」
「영조실록(英祖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신임제요(辛壬提要)」
「동국붕당원류(東國朋黨源流)」
「당의통략(黨議通略)」
「청선고(淸選考)」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kalsanja&logNo=220812112734

청성(靑城) 성대중(成大中:1732~1809)


청성(靑城) 성대중(成大中:1732~1809)        PDF Download

 

성대중의 본관(本貫)은 창녕(昌寧), 자(字)는 사집(士執), 호(號)는 청성(靑城)‧동호장(東湖長)‧순재(醇齋)‧용연(龍淵)이다. 청성은 포천(抱川)의 다른 이름이다. 포천군(抱川郡) 소흘면(蘇屹面) 적안촌(赤岸村)에서 소계(疎溪) 성효기(成孝基: 1701~1770)의 아들로 태어나서 78세를 일기로 고향 포천으로 돌아와서 생을 마쳤다. 포천은 그의 4대조 성여완(成汝完: 1309~1397) 때부터 살았던 곳이다.

6대조인 은궤옹(隱几翁) 성이문(成以文: 1546~1618)은 홍문관(弘文館) 부제학(副提學)과 대사간(大司諫)을 역임하였고, 5대조인 성준구(成俊耈: 1574~1633)는 이이첨(李爾瞻: 1560~1623) 등의 모함으로 남해(南海)에서 16년간 유배생활을 하다가 인조반정(1623) 때 유배에서 벗어나 황해감사(黃海監司)와 양서관향사(兩西管餉士)를 지냈다. 그가 청하(淸河) 최씨(崔氏)인 덕남(德男)의 딸과 혼인하여 후룡(後龍)을 낳으니, 바로 성대중의 고조(高祖)이다. 고조인 성후룡(1621~1671) 때부터 서얼(庶孼)의 가계(家系)로 내려오게 되었다. 성후룡은 우의정을 지낸 풍계(楓溪) 김상용(金尙容: 1561~167)의 서녀(庶女)와 혼인하여 성완(成琬: 639~1710)과 성경(成璟: 1641~1712)을 낳았다. 증조인 성경은 성몽규(成夢奎)를 낳고 성몽규는 성효기를 낳았다.

성대중은 서얼출신이었으나 그의 선대는 벼슬을 계속 해왔으며, 그의 아들 성해응(成海應: 1760~1839)과 손자 성우증(成祐曾: 1783~1864)에게 이르도록 면면히 문한(文翰)의 전통을 이은 가문이었다. 손자 성우증은 자신의 가문에 대하여 ‘문장으로 이름이 났으며, 특히 일본에까지 드날렸음을 밝혔고, 큰아버지인 성해응은 문장은 물론 경학에까지 조예가 깊어 고금을 꿰뚫었음’을 회상하기도 했다.

그는 1753년(영조29) 22세에 생원시에 합격한 후 1756년(영조32) 25세에 정시(庭試)에 합격하였다. 1759년(영조35) 28세에 교서관 부정자, 정자, 박사가 되었으며, 이듬해에는 문신전강(文臣殿講)과 전경문신전시(專經文臣殿試)에서 영조의 칭찬을 받고 말을 하사받기도 하였다. 1763년(영조39) 32세에 통신사(通信使) 조엄(趙曮: 1719~1777)을 따라 제11차 계미통신사행(癸未通信使行)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일본에 갔다. 그 이전에 이미 성대중의 종증조부인 성완은 1682년 임술사행(壬戌使行)의 제술관으로, 종조부(宗祖父) 성몽량(成夢良: 1673~1735)은 숙종(肅宗) 때 제9차 기해사행(己亥使行)에 통신사의 서기로 일본을 다녀오기도 하였다. 대부분 사행을 떠나기 전에 기존의 사행기록을 숙독하였음을 볼 때, 성대중은 이미 통신사로 다녀온 문사들의 기록들과 사행문화를 숙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일본에 체류할 때 시문으로 두각을 보여 일본인의 찬사를 받았으며, 사행원 중에서 성대중의 필체를 가장 높게 평가하여 길 가는 도중에도 사람들에게 글씨를 써주기도 하였다. 사행 다녀온 기록을 「일본록(日本錄)」이라는 이름으로 남겨놓았다. 1책은 「사상기(槎上記)」라는 이름으로 매일매일 있었던 일을 일기 식으로 적은 것이며, 2책은 바로 「일본록」으로 일본에서 체험한 견문(見聞)을 기록한 것이다. 분량은 많지 않지만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과 학자적인 모습을 뚜렷하게 나타내고 있다. 예를 들면, 일본에서 수차(水車)를 적극 활용하여 민생에 도움을 준다는 사실을 포착하고 눈여겨보았다거나, 예수와 마테오리치의 학문에 대한 언급은 계미사행을 다녀왔던 다른 문사들의 기록에는 보이지 않는 귀중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일본에서의 체험은 귀국 후 이덕무나 홍대용 등 실학파 문인들에게 전해져 영향을 주었다고 하겠다.

성대중과 절친하게 교유한 인물을 꼽아보자면 청장관(靑莊館) 이덕무(李德懋: 1741~1793),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1737~1805), 현천(玄川) 원중거(元重擧:1719~1790), 중운(仲雲) 이한진(李漢鎭:1732~?), 중흥(仲興) 나걸(羅杰?~?), 효효재(嘐嘐齋) 김용겸(金用謙:1702~1789) 등이 모두 연암그룹으로 분류되고 있다. 이들이 선진문물의 수용에 적극적이었음을 볼 때 성대중 역시 넓은 의미에서 실학파(實學派) 문인으로 볼 수 있겠다. 1764년(영조 40) 33세에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 승문원 교검(承文院校檢), 봉상시 판관(奉常寺判官)을 역임하였다. 1765년(영조 41) 34세 되던 해에 홍봉한(洪鳳漢)이 서얼(庶孼) 출신 인재로 추천하자 영조가 등용할 것을 명하여, 1766년(영조 42) 35세에 울진 현령(蔚珍縣令)이 되었다. 이때 자신의 호를 ‘동호장(東湖長)’이라 하였다.

울진에서 현령으로 약 5년간을 있으면서 울진의 옛 이름인 ‘선사(仙槎)’를 넣어 「선사만랑집(仙槎漫浪集)」이라는 시집을 남겼다. 개인이 지은 시뿐만이 아니라, 스승인 김준(金焌: 1695~1775)을 비롯하여 스승이 소개시켜준 임배후(林配垕)‧안석경(安錫儆)‧민백순(閔百順) 등을 만나고 함께 유람하며 지은 시들도 실려있다.

1772년(영조 48) 41세에 아버지의 장례를 마치고 사헌부 지평이 되었다. 당시 견책당한 간신(諫臣)을 구원하다가 삭직(削職)되었지만, 이듬해에 다시 지평에 제수되었다. 1774년(영조50) 43세에 사헌부의 장령이 되고, 이어 평안도 운산 군수(雲山郡守)가 되었다. 1777년(정조1) 46세에 벼슬이 갈리자 돌아와 1778년(정조2) 47세에 용양위 부사과(龍驤衛副司果)가 되었다.

1781년(정조5) 50세에 교서관 교리가 되었다. 당시 교서관을 외규장각(外奎章閣)으로 개편하였는데 성대중은 이를 관장하여 서적의 수교(讐校)와 편찬을 담당하였고, 51세 되던 해에 「국조보감(國朝寶鑑)」을 간행한 공로로 승서(陞敍)되었다. 다음 해에 경상도 흥해 군수(興海郡守)가 되어 구휼(救恤)정책을 잘 수행한 공으로 1784년(정조8) 53세에 승서되었다. 1787년(정조 11) 56세에 교서관 교리가 되었을 때 응제(應製)에서 수석을 차지하였고, 북청 도호부사(北靑都護府使)가 되어 부임할 때에 임금이 어필(御筆)과 설전첩(雪牋帖)을 하사하여 옛사람의 격언(格言)을 써서 올리게 하였다. 이 때 패관소품(稗官小品)의 문체가 유행하고 있던 차에 정조는 문체반정(文體反正)을 천명(闡明)하고 글을 지어 올리게 하니, 고금의 문로(文路)를 논한 수천 자의 글을 지어 올리기도 하였다.

1792년(정조 16) 문체반정(文體反正) 때에는 그의 글이 순정(醇正)한 글이라는 평가를 받아 노론계 북학자들 중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정조의 칭찬을 받았으며, 종삼품(從三品)에 해당하는 북청부사(北靑府使)로 특채되었다. 그가 받은 가장 높은 직급이었다. 정조는 여러 각신들에게 북청에 부임하는 성대중을 위해 전별연(餞別宴)을 열어주도록 명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남공철이 전별연을 열었고 이 자리에는 이덕무(李德懋)․서영보(徐榮輔)․이서구(李書九)․유득공(柳得恭) 등이 참석하여 함께 시를 짓기도 하였다.

1793년(정조 17) 62세에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오르고, 이듬해 위원 군수(渭源郡守)가 되어 호전법(戶錢法)을 행하고 사군을 없애어 민심을 다스렸다. 1795년(정조19) 64세에 체직되어 포천으로 돌아갔다. 이듬해인 1796년에 정조의 특명으로 「장릉사보(莊陵史補)」를 수교(讐校)하고, 이서구(李書九)와 「존주휘편(尊周彙編)」을 편찬하였다. 그 해 겨울 임금이 「춘추(春秋)」를 간행하려 하면서 대문(大文)의 글씨를 쓰도록 하고 학식과 필법이 순정(醇正)하다고 칭찬하자 ‘순재(醇齋)’라는 자호(自號)를 지었다. 1797년(정조 21) 66세에 오위장(五衛將)이 되었고, 「춘추」가 간행되자 상으로 말을 하사받았다.

1803년(순조 3) 72세 되던 해 가을에, 아들 성해응(成海應)이 음성 현감(陰城縣監)이 되자 아들의 부임지로 따라가면서 화양동(華陽洞)의 문정서원(文正書院)과 만동묘(萬東廟)를 배알하고 그 주변을 유람한 뒤 「화양동기(華陽洞記)」를 지었다. 1807년(순조 7) 76세 되던 해 가을에 고향인 포천으로 돌아왔다. 포천에서 후학을 가르치던 중 1809년(순조 9) 2월 17일 78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그가 저술한 기록물 가운데 「청성잡기(靑城雜記)」가 전하는데 자기 자신을 언급한 부분이 흥미롭다. 영조로부터 자신의 관상에 대하여 평가받은 일화를 적고 있다. 기록에 실려있는 그 내용의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영조대왕(英祖大王)이 황송하게도 나의 얼굴을 가지고 한번은 임헌(臨軒)하여 연신(筵臣)들에게 말하였다. ‘성(成) 아무개의 얼굴은 하관(下觀)이 풍만한 것이 강자아(姜子牙: 강 태공(姜太公))의 모습과 닮았다.’ 당시 내 나이 아직 서른이 못 되었기에 혼자 남몰래 웃으면서 생각했다. ‘나는 서른이 되기도 전에 성주(聖主)를 만났는데 어찌 여든이 되어서야 문왕(文王)을 만난 자와 비교한단 말인가. 성왕(聖王)의 말도 때로는 틀릴 때가 있나 보다.’

지금 내 나이 예순이 넘어 귀밑머리가 희끗희끗해진 뒤에야 비로소 금상(今上: 정조)으로부터 세상에 흔치 않은 대우를 받게 되었다. 옛 문장에 재주 있는 신하로 한나라의 두 사마씨(司馬氏: 사마천(司馬遷)과 사마상여(司馬相如)) 이후로 임금에게 인정을 받은 자를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는가. 그러나 모두 나에게 미치지는 못한다. 이제야 비로소 영조대왕이 나를 강태공에 비유한 것이 아마도 오늘을 예견한 것이었음을 알고 나니 감개무량하고 황송하기 그지없다. 그래서 삼가 기록하여 자손들에게 보이는 것이다.”

 

성대중은 영조에게 관상에 대하여 들을 당시에는 왜 하필 나이 많은 강태공에 비유하는지 속으로 웃었다고 고백하였다. 나아가 임금의 말로 옳지 않을 때가 있는 것이라고까지 생각하였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나이가 들었을 때 정조에게까지 대우를 받게 되는 지경에 이르자, 영조께서 강태공에 비유한 이유를 짐작해 볼 수 있겠다고 고백하며 감개무량함을 토로하였다.

하지만 후손들에게는 단지 관상과 골격으로 함부로 판단하지 않기를 경계하고 있다. 계속된 그의 기록을 마저 보기로 한다.

“그러나 얼굴 모습이 풍만하고 수척한 것은 오로지 양생에 달려 있으니 단지 골격만이 부귀로 인해 크게 자라는 것은 아니다. 나는 어렸을 때 지나치게 수척해서 사람들이 모두 요절할 것이라고 여겨 장가도 들지 못할 뻔했는데, 가정에서 교도하여 보양을 적절하게 한 덕분에 스물이 넘어서는 혈기가 충만하고 얼굴이 풍만해서 도리어 관상이 좋다는 말을 들었다. 일본에 갔을 때 우리 일행을 살펴본 자들이 대부분 나를 두고 풍채가 으뜸이라고 하였다. 지금도 허연 수염에 홍안이라서 사람들이 나에게 뭔가 특별한 수양 방법이 있을 것이라고 의심하는 경우가 있지만, 사실 섭생(攝生)조차도 이러고저러고 할 만한 것이 전혀 없는데 무슨 특별한 수양 방법이 있겠는가. 다만 어렸을 때부터 생각을 적게 하고 기욕(嗜慾)을 줄였을 뿐이다.

옛사람이 말하는 ‘세 가지(술, 여색, 재물)에 미혹되지 않는다’는 것을 내가 거의 실천한 듯하니, 이것이 내가 내 자신을 양생(養生)하는 방법이다. 이것은 모두 자기 자신에게 달려있는 것이어서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지만 섭생(攝生)은 오히려 정력을 소모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점을 아울러 기록하여 자손들을 경계하는 것이다.

금상(정조)이 또 나의 얼굴을 가지고 경연에서 여러 차례 언급하여 못난 나의 관상이 재차 성왕(聖王)의 인정을 받았으니, 어찌 평생에 잊지 못할 은총이 아니겠는가. 이것 또한 자손들이 대대로 전해야 할 것이다.”

 

성대중은 영조와 정조 시대에 서얼(庶孽) 출신으로서 문학적 재능에 뛰어나서 수많은 벼슬이력과 다양한 인물들과의 교유를 통해 존재를 드러냈던 지식인이다. 문인들만이 아니라 다양한 예술인들과의 교유를 통해 그의 학문과 사유의 깊이를 더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의 실학파 문인들에게도 영향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일본 문인들과도 교유하며 지은 창화시(唱和詩)나 필담(筆談)들의 기록을 볼 때, 그의 문학적 재능과 식견이 탁월했다는 것은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참고문헌>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일성록(日省錄)」
「국조보감(國朝寶鑑)」, 신숙주(申叔舟).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 정약용(丁若鏞).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이규경(李圭景).
「번암집(樊巖集)」, 채제공(蔡濟恭).
「약천집(藥泉集)」, 남구만(南九萬).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정약용(丁若鏞).
「금릉집(金陵集)」, 남공철(南公轍).
「농수집(農叟集)」, 최천익(崔天翼).

존재(存齋) 위백규(魏伯珪:1727~1798)


존재(存齋) 위백규(魏伯珪:1727~1798)        PDF Download

 

1.위백규의 생애
존재 위백규는 전라남도 장흥군(長興郡) 관산면(冠山面) 방촌리(傍村里) 출생으로, ‘호남 4대 실학자’ 또는 ‘호남 3천재’ 중 하나로 손꼽힌다. 그가 태어나던 날 밤에 그의 아버지는 백룡(白龍)이 우물로 내려오는 꿈을 꿨다고 하는데, 그가 범상하지 않은 유년기와 소년기를 겪은 사실이 1875년에 종손 다암(茶嵒) 위영복(魏榮馥:1832~1884)이 펴낸 「존재집(存齋集)」의 서문에 잘 드러나 있다. 그 서문은 고산(鼓山 임헌회(任憲晦)가 지은 것이다. 그가 지은 서문의 내용을 일부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공은 2세에 육십갑자를 외웠으며, 6세에는 글을 지을 줄 알았고, 8세에 역학(易學)에 몰두하였다. 10세 이후에는 제자백가(諸子百家)를 두루 읽어 천문(天文), 지리(地理), 복서(卜筮), 율력(律曆), 선불(仙佛), 병법(兵法), 의약(醫藥), 관상(觀相), 주거(舟車), 공장(工匠) 등등 학문에 널리 통달해서 손금 보듯 꿰뚫었으니, 참으로 하늘이 내리신 인재라 하겠다.”

이 글은 한국문집번역총서의 「존재집」에 실려 있는 글이다. 과연 천재다운 면모를 가히 짐작할 만하다. 그가 7살(1733) 때 지었다는 시 「별을 읊다[(詠星]」라는 작품은 이를 뒷받침하기에 충분하다 하겠다.

 

이름과 자리는 각각 정해졌어도 各定名與位
기운으로 형체 없이 걸려있다만 須氣掛無形
삼광 중의 하나로 참여하게 되어 參爲三光一
어두운 밤을 밝게 비쳐주는 구나 能使夜色明

 

그뿐만이 아니다. 그가 9세 때에는 천관산에 올라 시를 읊어 세상 사람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그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천관산 절 찾아 발걸음 옮기다 보니 發跡天冠寺
공중에 사다리 놓으면 하늘에 오르겠네. 梯空上春昊
인간들이 사는 세상 잠시 굽어보니 俯視人間世
티끌먼지 삼 만리에 자욱이 끼어 있네. 塵埃三萬里

 

존재 위백규는 12살(1738) 때 “다른 사람을 보기보다는 차라리 자신을 보고, 다른 사람의 말을 듣기보다는 차라리 스스로에게 들어라”라는 문구를 좌우명으로 삼으며 수신(修身)에도 힘을 기울였다. 작은 분판을 만들어 차고 다니면서 그 날의 실수를 기록하면서 스스로의 언행을 경계하기도 했다. 그는 15세 이전에 4서6경을 섭렵하고 17세 때부터 장천재에 기거하며 훈장을 했다. 그는 25살(1751) 때 전남 장흥에서 충청도 덕산에 사는 병계(屛溪) 윤봉구(尹鳳九:1683~1767)를 직접 찾아가 속수례(束脩禮)를 올리고 그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하였다. 그는 그 후에 과거시험에 계속 응시했으나 번번이 실패하자 40세에 관직에 대한 뜻을 접고 초야에 묻혀서 학문과 향촌 사회 계몽에 힘썼다.

위백규의 나이 68세 때 서영보(徐榮輔)의 천거로 그의 저술과 덕행이 정조에게 알려졌다. 태풍으로 인해 마을 피해 지역에 파견되었던 서영보가 과객 행세를 하고 위백규 집에 묵게 되었다. 그날 밤이 제삿날인데 국법으로 밀주(密酒)를 단속할 때였다. 아내가 제주(祭酒)를 내오자 “백성들이 법을 안 지키면 누가 지킨단 말이요?”라고 하면서 제주를 부어버리고 청수(淸水)를 떠오게 하였다.

그런 행동과 그의 저술인 「환영지(寰瀛志)」를 정조임금에게 전하자, 정조는 그를 급히 상경하도록 했다. 궁궐에 들어가던 날 장문(長文)의 상소를 올렸다. 여섯 조항의 정책(政策)을 건의하였는데 유생들의 반발이 있었다. 그러나 정조임금은 그의 고향과 가까운 곳에 옥과현감(玉果縣監) 자리를 제수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선정(善政)을 펼치다가 노환(老患)으로 72살에 세상을 떠났다. 그 후에 그의 묘지에는 어떤 글도 새기지 말라는 그의 유언에 따라 아무 글도 새기지 않은 백비(白碑)가 세워졌다.

 

2.위백규의 학문과 작품세계
위백규는 말년에 참봉 유맹환(兪孟煥)에게 보낸 편지에서 스스로를 ‘삼벽(三壁)’이라고 칭했다. “사는 지역이 궁벽하고, 성씨가 궁벽하고, 사람이 궁벽하다.”는 의미였다. 궁벽한 지역에 사는 선비로 거의 전 생애를 보냈으나 경학(經學) 뿐만 아니라 지리(地理), 역사(歷史), 의학(醫學) 등에 관한 저술에도 힘을 기울이며 학문의 폭을 넓혔다. 특히 그는 지리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그가 지은 「지제지(支提誌)」는 그의 고향에 있는 천관산에 관한 지리와 문화를 상세히 담고 있다. 현존하는 기록물 중에 개인이 편찬한 산지(山志)로는 유일하다. 정조임금이 궤짝에 담아 올려 보내라고 했던 「환영지」는 지리지의 백과사전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 팔도의 지도와 함께 중국과 세계지리가 실려 있다. 이 저서에 있는 조선 팔도 지도는 김정호(金正浩)의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보다 91년이나 앞서 있다. 또한 유럽과 지중해가 표시된 지도도 같이 실려 있다. 32살 때 우연히 서양 「구구주도(九九州圖)」와 마테오리치의 「곤여만국전도(坤與萬國全圖)」를 본 계기로 12년에 걸쳐 마무리했다고 한다. 그가 남긴 저서 「존재집(存齋集)」은 경학, 지리, 역사, 의학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으며 총 24권 12책에 달한다.

그 방대한 그의 작품 중에서 그의 학문적 역량의 깊이를 엿볼 수 있는 작품이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그의 문집 「존재집」 제20권 잡저(雜著)에 보면 「연어(然語)」라는 재미난 글이 있어 일부분을 발췌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이 글은 장문(長文)의 문답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그 대상은 매화를 의인화하여 대화 형식으로 열거하고 있는데, 고금의 역사에 대한 비판의식 등등 다양한 일을 소재로 다루고 있다. 이 글의 서문에는 매화를 의인화한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있다.

옛날에 장자(莊子)가 그림자가 말을 한다고 하자 사람들이 괴이하다고 했고, 미불(米芾)이 ‘돌 어른[石丈]’이라고 부르자 사람들이 미쳤다고 했다. 그림자는 말을 하지 않고 돌은 어른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매화와 말하면서 매화를 ‘군(君)’이라고 하니, 나는 과연 괴이하고 미쳤단 말인가? 군자는 괴이하고 미친 짓을 하지 않으니, 나는 과연 군자가 아니란 말인가. 아니면 장주와 미불이 소인이 아니니, 나는 과연 장주와 미불 같은 사람이란 말인가? ‘매군(梅君)’과 더불어 말한 것을 「연어(然語)」라고 이름 붙이니, 사람들이 나를 괴이하고 미쳤다고 말하는 것도 당연하다.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나로 하여금 괴이하고 미치게 하는 자는 또한 누구인가? 이상은 제사(題辭)이다.
[昔莊周爲影言, 人以爲詭, 米芾呼石丈, 人以爲癲, 盖影非有言而石非可丈也. 今吾與梅言而君之, 吾果詭而癲哉. 詭與癲, 君子不爲, 吾果不君子哉. 周與芾亦不爲小人者, 吾果周與芾而已耶? 與梅君言, 命曰然語, 宜乎人之謂我詭而癲也. 雖然使我詭而癲者, 又誰歟? 右題辭.]

 

이 글은 단락을 짓고 있는 한편 작은 제목을 주어 그 아래 문답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이 글을 중간 중간 채택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가장 먼저 ‘원지(原旨)’라는 제목 하에 매화와 더불어 대화형식을 설정하여 견해를 피력한 일부를 살펴보기로 한다.

자화가 “남에게 죄를 지으면 오히려 용서를 빌 수 있거니와, 자신에게 죄를 지으면 용서를 빌 곳이 없다오.”라고 하자, 매군이 “그래서 혼자 있을 때를 삼가라는 거지요.”라고 했다.
[子華曰, 得罪於人, 猶可辭也, 得罪於己, 無所容也. 梅君曰, 是以愼獨.]

자화가 “군자는 자신을 자기로 삼기 때문에 자신의 사욕을 극복하여 자기를 성취하고, 소인은 자신으로 자기를 잊기 때문에 자신을 죽여 자기를 망친다오.”라고 하니, 매군이 “그렇지요.”라고 했다.
[子華曰, 君子以己爲己, 故克己而成己, 小人以己忘己, 故殉己而亡己. 梅君曰, 兪.]

자화가 “살길이 많은 자는 그 삶이 곧 죽음이요, 군자는 살아가는 이유가 하나뿐인 까닭에 그 삶이 즐겁답니다.”라고 하니, 매군이 “그렇지요.”라고 했다.
[子華曰,生之路多者, 其生也死也. 君子之所以生者一而已, 故其生也樂. 梅君曰, 兪.]

자화가 “자신의 그릇된 점을 감추려는 자는 남의 작은 잘못을 들추어내기를 좋아하고, 남의 선행을 시기하는 자는 남이 면전에서 자기를 칭찬해 주는 것만을 기뻐하지요.”라고 하니, 매군이 “그렇답니다.”라고 했다.
[子華曰, 自掩其非者, 好摘人之細過, 猜忮人善者, 喜人面譽. 梅君曰, 兪.]

자화가 “나무를 부비여 불씨를 일으킬 수 있는 것은 열기가 계속 이어지기 때문이며, 닭이 비오는 밤에도 제때 우는 것은 지각이 오롯하기 때문이랍니다.”라고 하니, 매군이 “그래서 하루 동안 게으름을 피우면 1백년의 근면함을 무너뜨리게 되는 것이니, 정치(精緻)하지 않은 박학(博學)은 장점으로 취할 만한 재능이 못되지요.”라고 했다.
[子華曰, 鑽燧而火炎者, 熱氣接續也. 雞鳴雨夜而不忒者, 知專也. 梅君曰, 是以一日之怠, 廢百年之勤, 不精之博, 無取長之能.]

자화가 “꽃이 지지 않으면 열매가 맺히지 않고, 소금을 볶지 않으면 짠맛이 만들어지지 않지요. 그래서 명예를 추구하는 자는 내실 있는 행동이 없고, 항상 안일하게 지내는 자는 성취하는 재주가 없답니다.”라고 하니, 매군이 “그렇습니다.”라고 했다.
[子華曰, 花不謝實不成, 鹵不熬醎不成. 是以求名者, 無實行. 恒逸者, 無成材. 梅君曰, 兪.]

자화가 “남한테 요구하기를 싫어하지 않는 자는 이미 남에게 줄 수 없는 자이고, 남이 자기를 떠받들어 주기를 끝없이 바라는 자는 이미 남을 섬길 수 없는 자이지요.”라고 하니, 매군이 “그렇습니다.”라고 했다.
[子華曰, 求諸人無厭者, 己不能與人者也. 欲人承奉不已者, 己不能事人者也. 梅君曰, 兪.]

자화가 “몸을 갈라 구슬을 몸속에 간직한다면 이는 재물에 대해 어리석은 것이고, 내 몸을 욕되게 하여 자손을 위한 계책으로 삼는다면 이는 나에 대해 어리석은 것이지요. 이는 자기 위함을 중요시하려다가 마침내 자기를 상실하는 것과 똑같습니다.”라고 하니, 매군이 “군자는 자기를 잊어버림으로써 자기를 온전하게 하지요.”라고 했다.
[子華曰, 剖身而藏珠, 愚於貨也. 僇吾身爲子孫計, 愚於我也. 其重於爲私, 遂以喪私一也. 梅君曰, 君子忘私以全其私.]

자화가 “위태롭고 어지러운 때를 당하여 순절(殉節)함으로써 의(義)를 취하기는 어렵지만,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기는 쉽다지요.”라고 하니, 매군이 “그렇습니다.”라고 했다.
[子華曰, 當危亂之時, 殉節以取義難, 爲知己死易. 梅君曰, 兪.]

자화가 “바라는 것 없이 선행을 하는 것은 음덕(陰德)이고, 이유 없이 복이 모이는 것은 몸을 망치는 재앙이지요.”라고 하니, 매군이 “그렇지요.”라고 했다.
[子華曰, 無所爲而爲善者, 陰德也. 無所致而福臻者, 身之殃也. 梅君曰, 兪.]

자화가 “성인은 자기 마음속에 천명을 터득하고 있기 때문에 천명을 즐기고, 군자는 하늘에서 천명을 받았음을 알기 때문에 천명을 두려워합니다. 보통 사람은 하늘을 무시하는데, 하늘을 무시하는 사람은 하늘도 그를 버립니다.”라고 하니, 매군이 “그렇습니다.”라고 했다.
[子華曰, 聖人得天於己故樂天, 君子知天於天故畏天, 衆人無天, 無天者天亦棄之. 梅君曰, 兪.]

 

이와 같이 다양한 소재를 가지고 매화를 의인화하여 대상을 설정해 놓고서 대화하듯이 글을 적어놓았는데 한결같이 교훈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이 글 역시 그가 평소에 추구해오던 정신의 일면을 엿볼 수 있어 흥미롭다 하겠다. 그리고 이어서 ‘신회(神會)’라는 제목으로 되어 있는 글도 여러 가지 소재를 토대로 위와 같은 형식을 취하고 있으나 여기에서는 생략하도록 한다. ‘학례(學禮)’라는 제목 아래에 수록되어 있는 글들 중에 장사를 지내고 나서 신주(神主)를 세우고 정성을 쏟는 이유와 축문을 읽고 난 뒤에 바로 태우지 않는 것은 “효자의 지극한 정으로 간절하고 몹시 슬퍼하여 마치 장차 아뢸 것이 있는 듯이 하는데, 이는 마음으로 신령을 평안하게 하려는 뜻이니, 그 마음이 지극하고 은미하다 할 것입니다.[孝子至情, 慇懃惻怛, 如將告者, 此是以意安神之義也, 其意至矣微矣.]”라고 의견을 제시하여 일반인들이 “반혼(返魂)을 급히 하느라 축문을 불태울 겨를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이는 전혀 의미가 없는 말이라고 주장하여 의인화하여 설정한 매군(梅君)을 통해 긍정적인 답을 얻어내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사회(寫懷)’라는 제목 아래에서는 자신의 평생을 평가하는 듯한 회포를 칠언율시로 읊어놓았다. 그 글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육십일 년의 세월을 헛되이 보내고서 虛過六十一年春
총명한 남자의 몸을 홀로 저버렸구나. 孤負聰明男子身
늙어서야 지난날의 불효를 모두 알았고 到老全知曾不孝
책을 보고 내가 그릇됨을 매번 깨달았네. 看書每覺我非人
한 일의 절반은 과장을 드나든 잘못이오 事爲半是名塲誤
친구들과는 쓸데없는 농담으로 친한 냥하고 朋友空憑戲語親
여기에다 다시 술 잔뜩 취했으니 어찌하랴 仍復醉迷其奈爾
이제부터 술 절제하며 천진함을 기르리라 從今節飮養天眞

소싯적부터 날마다 잘못을 깨달았건만 日日知非自少時
이제 와보니 오십구 년이 되었음 알겠네 于今五十九年知
우연히 거백옥의 나이와 같아 부끄럽다만 偶同伯玉年堪愧
이렇게 깨친 뒤 어리석은 한 사람 되었구나 覺後眞成一呆痴

 

그야말로 자기 반성을 읊은 작품이라 하겠다. 그리고는 본격적으로 「창수(唱酬)」라는 제목 하에서 그는 매화와 대화형식을 빌어 마음껏 고금을 넘나들며 서술을 자유자재로 풀어내었다 그것이 무려 칠언율시(七言律詩)로 10수나 된다. 그 중 일부를 살펴보기로 한다. 앞의 것은 자화가 선창(先唱)한 작품이고 뒤의 것은 매군(梅君)이 이어서 화답한 것이다.

 

자화가 한가로이 즐기는 것 사랑하지 않는 건 子華非是愛偸閒
밭둑에 담배와 호미 있고 물가에 낚싯대 있어 田有烟鋤磯有竿
세상일은 다만 분수에 편안해야 좋은 법이니 世事只應安分好
이 마음 속이지 않기가 어렵다는 걸 알아야지 此心惟識不欺難
봄이 오면 부귀하게 온갖 나무에 꽃이 피고 春來富貴花千樹
고요해지면 벗님처럼 한 난간에 달 떠오르니 靜後賓朋月一欄
술에 취해 오동나무 기대자 천지 드넓어서 醉倚高梧天地濶
티끌과 아지랑이를 웃으며 바라본다오 塵埃野馬解頤看

산수 간의 그윽한 거처 깊어서 싫지 않는데 山水幽居不厭深
괴롭게도 물이 찾아와서 서로 사귀자 하네요 物來交物苦相尋
성현 모두 떠나 내가 스스로를 슬퍼하나니 聖賢盡去吾悲我
시비 서로 기울임은 옛날에도 지금 같았다오 非是相傾古爲今
어찌할 수 없는 때에 천명을 알게 되고 無奈何時知天命
헤아릴 수 없는 곳에서 사람 마음 보이나니 沒思量處見人心
구월의 가을과 삼월의 봄철을 맞아 但逢秋九春三節
국화와 꾀꼬리 찾아 숲에 가면 좋으리다 訪菊選鸎好出林

삼벽이라서 세상사람 모두가 비웃는다만 三僻由來世共嗤
좋은 시절 만날 때면 홀로 시 읊조려보네 每逢佳節獨吟詩
경륜과 재주는 비록 여상은 아니어도 經綸才局雖非呂
요순 기약한 포부 어찌 이윤에게 사양하랴 堯舜襟期豈讓伊
어두운 곳 속이지 않는 마음 하늘이 알고 暗不欺心天可質
배움에 옛날을 스승으로 여김 내 의심치 않네 學念師古我無疑
긴긴 낮 밝은 창에 봄바람 따사로우니 明窓晝永春風暖
바로 은자가 꿈에서 깨어나는 그때로다 正是幽人夢覺時

시비와 영욕은 모름지기 놀랄 것도 없으니 是非榮辱莫須驚
만사가 내게는 점점 부질없음을 느낀다오 萬事由吾漸覺輕
절로 건재한 시내와 산은 천고의 뜻이요 自在溪山千古意
조용히 폈다지는 꽃과 대나무는 사철의 마음 從容花竹四時情
근심하지 않아야 천지가 위대함을 믿게 되고 不憂始信乾坤大
시기함이 없어야 세상살이 평탕함을 알련마는 無忮方知世路平
소옹의 청야음을 읊조리고 나니 誦罷邵翁淸夜咏
창에 가득 맑은 꿈에 달빛도 분명하구나 一窓晴夢月分明

세월이 번갈아 서로 떠나가니 歲月迭相謝
고금이 고개 돌릴 사이에 바뀌었네 古今轉眄移
앉아서 시절의 경물이 변한 걸 보니 坐看時物變
늘그막에 생각이 하염없구려 遲暮有餘思

봄바람에 꽃은 정원에 만발하고 春風花滿庭
여름비에 물고기가 물가에서 뻐끔대는데 夏雨魚吹澨
가을 절구에서 올벼의 향기 풍기고 秋杵早稻香
겨울 베갯머리 새 술 한창 익어 가네요 冬枕新酒沸

 

위에서 본 바와 같이 그의 작품세계는 실로 대단하리만큼 격조가 있음을 짐작할 수 있겠다. 가히 문장력과 천재성을 두루 겸비한 인물임을 증명할 수 있겠다.

위백규는 또한 백성들의 삶을 어느 양반들보다도 가장 가까이에 살면서 그들을 이해하고자 했다. 그는 양반 신분임에도 향촌(鄕村)에서 직접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그는 46세(1772년) 때에 「농가 9장(農歌九章)」을 지었다. 농사를 짓는 모습을 관찰하거나 자연을 즐기는 시가 아니라 직접 논밭을 경작하며 땀흘려 일하면서 느낀 점을 한글로 지은 작품을 남겼다. 아침에 농기구를 챙겨 소를 몰고 집을 나서서 밭을 갈고, 보리밥 한 사발과 콩잎 나물 반찬으로 새참을 먹고, 저녁에 집으로 돌아오기하기까지 농번기의 하루와 가을 수확의 즐거움을 9개의 연시조로 묘사한 것이다. 그 중의 두 번째 작품인 「밭으로 가다[適田]」는 시를 살펴 보기로 한다.

 

“도롱이에 호미를 걸고 뿔이 굽은 검은 소를 몰고
고동풀을 뜯어먹게 하며 깃물가로 내려갈 때
어디서 품진 벗님은 함께 가자하는가.”

 

소박한 시골 풍경을 저만치서 바라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존재 위백규가 남긴 시는 무려 200여 편 400여 수나 된다. 「농가9장」 외에도 보리 농사 연작시인 「죄대(罪對)」, 「맥대(麥對)」, 「청맥행(靑麥行)」 등과, 자연재해를 원망하고 관리들의 횡포를 고발하는 「연년행(年年行)」과 회갑을 맞아 부모를 추모하는 장편가사 「자회가(自悔歌)」 등이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백성들의 삶을 몸소 겪으며 현실 사회에 문제를 인식하고 폐단에 대한 비판과 정책을 제시하는 「정현신보(政絃新譜)」를 남겼다. 그는 이 글에서 탐관오리들의 부패 실상을 고발하고 벼슬아치들의 횡포를 고발하였다.

 

3.위백규의 효성과 개구리 전설
위백규는 돌아가신 어머니 유인(孺人) 오씨(吳氏)를 장사지낼 때에 고례(古禮)를 상고하여 명기(明器)에다 미곡(米穀)과 육포(肉脯)와 어포(魚脯)를 넣어 편방(便房)에 두었다. 그런데 그 이듬해 여름에 검은 개미가 무덤 옆에 잔뜩 몰려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발견한 위치가 하필이면 편방의 위쪽과 너무 가까웠다. 그는 개미가 먹을 것을 이리저리 찾다가 어쩌면 편방을 침입할까봐 걱정하여 개미를 상대로 다른 곳으로 옮겨가도록 회유하는 글을 지어 타이르듯이 읽어 주었다. 그 글을 요약하여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너희에게는 군주와 신하의 의리가 있고 수시로 흙을 물어 나르는 예(禮)가 있고 집을 짓는 지혜가 있으니, 준동하는 다른 미생물들과는 비교할 바가 아니다. 지금 만약 사람이 그 어버이를 장사지낸 땅을 염두에 두지 않고 봉분을 쌓은 곳에 구멍을 내서 현실(玄室)의 음식에 침노하여 꺼내 먹으려한다면 불인(不仁)함이 심한 것이니, 의리가 있고, 예가 있고, 지혜가 있다는 너희들이 어찌 유독 이렇게까지 불인한 짓을 할 수 있다는 말이냐?
[惟爾有君臣之義, 有時述之禮, 有築封之智, 非與他蠢蝡蒙迷之虫比也. 今若不有人葬其親之地, 竅穴其堋築, 侵奪其玄室之食, 則其不仁甚矣. 豈有義有禮有智之物, 獨不仁若是哉.]”

 

라고 하면서 그는 개미를 마치 철없는 어린 아이들을 어르고 달래듯이 회유하였다. 그러나 계속해서 염려하는 마음을 늦추지 못하고 다시 간곡한 어조로 사리를 들어서 회유하였다. 그 말에는 진정 부모를 위하는 효성이 깃들어 있음을 볼 수 있다. 다시 그 원문을 살펴보기로 한다.

 

“게다가 개미는 본래 사람들이 미워하는 대상이 아니다. 지금 다행히 명기는 침범하지 않았다마는 만년의 유택(幽宅)을 견고하게 하려는 것은 사람의 자식이라면 지극한 심정을 갖기 마련인데, 파헤쳐 가르고 구멍을 내서 점차 무너지게 한다면 또한 어찌 지각 있다는 너희들이 차마 할 수 있는 일이겠느냐? 이리해서 너희 스스로 사람에게 증오를 자초한다면 이 또한 매우 지혜롭지 못한 짓이다. 불인(不仁)하고 지혜롭지 못한 존재가 어찌 무덤 속에서 군신의 의리를 행할 수 있겠느냐? 삶을 욕되게 함이 또한 크다 할 것이다. 네 형상이 비록 미물일지라도 어찌 그 본성을 욕되게 하면서 살고자 한다는 말이냐? 너희 개미들은 분명 이런 짓을 하지 않으리라 믿는다.
[且蟻本無惡於人, 今雖幸而不犯明器, 維是萬年幽宅, 欲其鞏固, 是人子至情, 而蝕作罅孔, 使馴致圮壞, 亦豈有知之物所可忍耶, 以此自取憎惡於人, 是亦不智之甚也, 不仁不智, 焉能作君臣於幽房之中哉, 其爲忝生又大矣, 而爾形雖微, 寧欲忝其性以生哉, 蟻必不爲是也, ]

 

하찮은 미물임에도 불구하고 “봉의(蜂蟻)는 유군신(有君臣)”이라는 옛말에 근거하여 의리를 내세워 설득하고 회유하고 달래는 논조로 글을 지었다. 이 글의 끝부분에서는 서로의 갈등관계를 해소하고 화해의 무드로서 서로 침해하지 않는 차원에서 타협을 유도하는 논지로 마무리를 하였다. 흥미롭다기보다는 그의 부모에 대한 효성의 발로로 인식하는 것이 타탕한 글로 여겨진다.

“지금 너희 개미들을 위한 계책을 말해보자면, 이곳 산 말고도 토양이 깊고 고와서 어느 곳이든 너희 거처로 마땅하지 않은 데가 없으니, 너희들은 너희 무리를 데리고 멀리 옮겨가서 새롭게 개미무덤을 만드는 것이 좋겠다. 그리하여 명기(明器)에 가까이 오지 말고, 봉분의 사초도 무너뜨리지 말도록 하거라. 그리하면 너희들에게는 해로움이 없을 것이요, 나에게는 증오가 없을 것이다. 사람이 하는 말을 듣고 깨닫는다면 어찌 보통의 벌레 가운데 훨씬 뛰어난 존재가 아니겠느냐? 개미들아! 속히 떠나도록 하여라.
[今爲蟻計, 此一山之外, 深壤美土, 無往而不宜爾居也. 爾率醜類, 遠徙爾垤, 勿近明器, 勿敗莎封, 在爾無害, 在我無惡. 人有所言, 能聞覺悟, 豈不超勝於凡虫又萬萬哉, 蟻其速圖之.]”

 

이뿐만이 아니라 그는 생전에 특별한 행적이 종종 보이기도 했다. 미물에게 어떤 영향을 준 것이 분명한 듯도 싶다. 우선 그와 관련된 ‘개구리 전설’이 있는 장소가 두 곳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옥과에서 현감직에 있을 때 천광호(天光湖)라는 넓은 호수가 있었는데, 밤만 되면 개구리들이 시끄럽게 울었다고 한다. 개구리 소리 때문에 잠을 못 이루자 「주역(周易)」의 괘(卦)를 뽑아 던지자 잠잠해졌다. 그 이후부터 개구리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았다고 한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그의 종택(宗宅)에도 전해온다. 그의 종택 앞 연못에서 개구리 소리가 요란해서 위백규는 독서에 집중할 수가 없어 부적(符籍)을 그려 노비에게 연못에 던지게 하였더니 개구리가 울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도 이 연못에는 개구리가 없으며 시험삼아 살아 있는 개구리를 연못에 넣으면 금방 생기를 잃고 만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참고문헌>

「존재집(存齋集)」(위백규)
「병계선생문집(屛溪先生文集)」(윤봉구)
「매산집(梅山集)」(홍직필)
「사마방목(司馬榜目)」
「조선유학사」(현상윤, 민중서관, 1949)
「존재 위백규와 다산 정약용의 생애와 사상연구」(위정철. 한국학술정보(주)」, 2012.8.10.)
「존재 위백규의 사회개선론: 18C(세기) 말 향촌의 자율성 모색을 중심으로」(이해준, 「한국사론」5, 서울대학교, 1979)
「위백규의 생애와 사상」(하성래, 「실학논총」, 호남문화연구소, 1975)
「이조실학파의 성리학관」(김경탁, 「고려대학교 문리논집」7, 1963)

아정(雅亭) 이덕무(李德懋:1741~1793)


아정 이덕무(李德懋:1741~1793)                      PDF Download

 

1. 이덕무의 생애
아정 이덕무는 정종(定宗)의 서자인 무림군(茂林君)의 10세손으로 본관은 전주이다. 자는 무관(懋官), 호는 아정(雅亭)인데, 이 밖에 형암(炯庵), 청장관(靑莊館) 또는 동방일사(東方一士)라는 호도 사용했다. 그가 즐겨 사용한 청장(靑莊)이라는 호는 일명 신천옹(信天翁)으로 불리는 해오라기를 뜻하는데, 이 새는 맑고 깨끗한 물가에 붙박이처럼 서 있다가 다가오는 먹이만을 먹고 사는 청렴한 새라고 한다. 청장으로 호를 삼은 것은 그의 성격과 무관하지 않음을 알 수 있겠다.

그의 아버지는 통덕랑 성호(聖浩)이고, 어머니인 반남박씨(潘南朴氏)는 토산현감 (兔山縣監)을 역임한 사렴(師濂)의 따님이다. 할아버지 필익(必益)은 강계부사(江界府使)를 역임하였다. 그의 아버지가 이덕무 6살 때에 글을 가르치려고 중국 역사책인 「십구사략(十九史略)」을 읽혔는데, 1권을 다 배우기도 전에 문리를 터득한 영재였다고 한다. 16세에 수원백씨(水原白氏)인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백사굉의 따님과 혼인하였고, 20세 무렵에는 남산 아래 장흥방에서 살았다. 이 무렵 집 근처 남산을 자주 오르며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시를 많이 지었다.

그는 조선후기 서울 출신의 실학자인 이용후생파(利用厚生派)의 한 사람으로, 박제가(朴齊家), 이서구(李書九), 유득공(柳得恭)과 더불어 사가시인(四家詩人) 중 한 사람으로 청나라에까지 문명(文名)을 날렸다. 그가 초기에는 신분상의 서자라는 이유로 경서(經書)로부터 기문이서(奇文異書)에 이르기까지 박학다식하고 문장이 뛰어났음에도 출세에 상당한 제약을 받았으나 정조의 인재등용 정책에 힘입어 규장각(奎章閣)을 설치하여 서얼 출신의 뛰어난 학자들을 등용할 때 박제가(朴齊家), 유득공(柳得恭), 서이수(徐理修) 등과 함께 검서관(檢書官)으로 발탁될 수 있었다. 박물학에 정통한 그는 사회 경제적 개혁을 주장하기보다는 고증학적인 학문 토대를 마련하여 훗날 정약용(丁若鏞), 김정희(金正喜) 등에 학문적 영향을 준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가난한 환경 탓에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으나 학문에 비상하고 시문에 능하여 젊어서부터 이름을 떨쳤다. 사후에 그의 행장을 지은 연암 박지원은 시문에 능한 이덕무를 기리며 “지금 그의 시문을 영원한 내세에 유포하려 하니 후세에 이덕무를 알고자 하는 사람은 또한 여기에서 구하리라. 그가 죽은 후 혹시라도 그런 사람을 만나볼까 했으나 얻을 수가 없었다.”라고 하며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그는 청장이라는 별호에 어울리는 호리호리한 큰 키에 단아한 모습, 맑고 빼어난 외모처럼 행동거지에 일정한 법도가 있고 문장과 도학에 전념하여 이욕이나 잡기로 정신을 흩뜨리지 않았으며, 비록 신분은 서자였지만 오직 책 읽는 일을 천명으로 여겼던 듯하다. 가난하여 책을 살 형편은 못되었지만, 굶주림 속에서도 수만 권의 책을 읽고 수백 권의 책을 베꼈다. 이덕무의 저술총서이자 조선후기 백과전서라 할 수 있는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에서 볼 수 있듯이, 사실(史實)에 대한 고증부터 역사와 지리, 초목과 곤충, 물고기에 이르기까지 그의 지적편력은 실로 방대하고 다양하여 고증과 박학의 대가로 인정받고 있다. 그의 묘지명(墓誌銘)을 지은 이서구(李書九)는 그에 대하여 “겉으로는 쌀쌀한 듯이 보이나 안으로 수양을 쌓아 이익과 권세에 흔들리거나 마음을 빼앗기지 않은 인물이다.”라고 평가하고 있다.

그의 나이 26세 되던 1766년에 대사동으로 이사한 후, 서얼들의 문학동호회인 백탑시파(白塔詩派)의 일원으로 유득공, 박제가, 이서구를 비롯하여 홍대용, 박지원, 성대중 등과 교유하였다. 학문적 재능에 비해 신분적 한계로 천거를 받지 못하다가 그의 나이 39세 되던 1779년에 정조의 정책에 의하여 규장각 초대 검서관(檢書官)으로 기용되면서 벼슬길이 열렸다. 1789년에는 박제가, 백동수와 함께 왕명에 따라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를 편찬하는 성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검서관 이후에 사도시주부(司䆃寺主簿), 광흥창주부(廣興倉主簿), 적성현감(積城縣監) 등을 역임한 바 있다.

 

2. 이덕무의 시세계(詩世界)
1777년에 청나라에서 간행된 「한객건연집(韓客巾衍集)」에는 조선 사람으로서 이덕무의 시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그 후부터 이덕무의 시가 중국 시단에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그의 친구이자 유득공의 숙부인 유금(柳琴: 1741~1788)이 1776년 중국을 방문하면서 훗날 사가(四家)로 불리게 될 이덕무를 비롯한 유득공, 박제가, 이서구 등 4명의 시를 담은 「한객건연집」을 청나라 시인이자 학자로 이름 높았던 이조원(李調元)과 반정균(潘庭筠)에게 소개하였다. 이 시집에 실린 이덕무의 시는 총 99수나 되며 그 내용은 자연과 여정, 인물, 송별, 역사에 이르는 등 다양한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중국에 가 본적도 없는 그의 시작품이 먼저 중국 시단에 널리 알려진 셈이다.

한객건연집」이 소개되고 2년 뒤에 이덕무는 연행단을 따라 중국을 방문했다. 이미 지명도를 쌓은 이덕무는 반정균을 비롯하여 이조원의 동생인 이정원, 기균, 옹방강, 축덕린 등 청조의 문인들과 폭넓은 교류를 하였고, 이들을 통해 그의 시명(詩名)은 청조 시단에서 더욱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이조원은 이덕무의 시를 가리켜 “건실하고 격조를 갖추어 네 사람 중에서 가장 노련하다”고 평가했다.

시에 대한 그의 재주는 정조(正祖)도 익히 인정하였다. 한번은 정조가 규장각 신하들을 불러놓고 「성시전도(城市全圖)」에 대한 백운시(百韻詩)를 짓게 하여 각각 점수를 매겼는데, 이덕무가 1등을 차지했다. 정조는 “신광하의 시는 소리가 나는 그림 같고, 박제가의 시는 말하는 그림이며, 이만수의 시는 좋고, 윤필병의 시는 풍성하고, 이덕무의 시는 우아하고, 유득공의 시는 온통 그림 같다.”고 평하였다. 정조는 이덕무의 시권(詩卷)에 우아하다는 의미의 ‘아(雅)’자를 썼는데, 이후로 이덕무는 아정(雅亭)이라는 호를 지어 사용하게 되었다.

 

3. 이덕무의 교우관계(交友關係)
청나라에 소개된 「한객건연집」의 저자들인 이덕무․유득공․박제가․이서구는 백탑파 혹은 이용후생파로 불리는 실학자이며, 지기(知己)의 정을 쌓은 벗이기도 하다. 특히 박제가와 유득공과는 서자라는 비슷한 처지에서 오는 신분적 공감대가(이) 있었다. 이덕무가 천애지기(天涯知己) 박제가를 알게 된 것은 24세 되던 1764년이다. 이덕무의 처남인 무인 출신 백동수의 집에 갔다가 현판 위에 써진 박제가의 ‘초어정(樵漁亭)’이라는 글씨를 인상 깊게 본 것이다. 3년 후 이덕무는 백동수의 집에서 박제가와 운명적으로 만나게 되는데, 그와의 첫 만남을 두고 “너무 맘에 들어 즐거움을 견딜 수 없을 정도였다”고 말했을 정도로 기뻐했다. 이덕무와 박제가의 우정은 1793년 이덕무가 죽을 때까지 근 30년간 이어졌다. 30년 동안 이덕무가 있는 곳엔 박제가가 있었고 박제가가 있는 곳엔 항상 이덕무가 있었다.

가녀리고 큰 키의 이덕무는 고상하고 조용했던 반면에, 박제가는 작은 키에 박력있고 자기 주장과 고집이 강한 인물이었다. 두 사람의 외모와 성격은 달랐지만, 뜻이 맞았고 항상 서로를 그리워했다. 눈이 내린 어느 겨울 날, 착암 유연옥의 집에서 해금 연주를 듣던 박제가는 한밤중에 자신의 벗 이덕무가 보고 싶어졌다. 다음의 글은 그의 저서 「정유각집(貞蕤閣集)」에 수록되어 있는 내용이다.

“올 적엔 달빛이 희미했었는데 취중에 눈은 깊이도 쌓였네. 이러한 때 친구가 곁에 있지 않으면 장차 무엇으로 견딜 것인가. 내게는 즐겨 읽던 「이소」가 있으니 그대는 해금을 안고 야심한 밤 문을 나서 이덕무를 찾아가세.”

 

이 두 사람은 1778년 중국 연행에도 함께 갔을 정도로 인연이 깊었고, 1779년에는 규장각 검서관에 동시에 등용되어 십 수년간 동료의 정을 나누었다. 잦은 숙직과 힘든 근무 속에서도 두 사람은 의지해가며 규장각 도서들을 편찬해냈다. 실재로 이덕무는 박제가 보다 9살이나 연상이었으나, 이들에게는 나이 차이가 그다지 의미가 없었다. 이덕무와 박제가는 아주 가난한 삶을 살았다. 하루는 빈곤을 겪던 이덕무가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집안에서 가장 값비싼 것을 팔았는데, 그것이 「맹자(孟子)」라는 책이었다. 글을 하는 선비가 책을 내다 판다는 것은 가지고 있던 전부를 내놓은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덕무는 책을 팔아 밥을 해먹고는 유득공을 찾아가 크게 자랑했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유득공 또한 이덕무와 마찬가지로 ‘그대가 옳다’하며 자신이 가지고 있던 「좌씨전(左氏傳)」을 팔아 이덕무와 함께 술을 마셨다. 이덕무와 유득공은,

 

“맹자가 친히 밥을 지어 나를 먹이고, 좌구명(左丘明)이 손수 술을 따라 나에게 술잔을 권한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하며, 크게 웃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밤새 술을 마시며 맹자와 좌구명을 칭송하였다. 1년 내내 굶주리며 책을 읽기만 한다고 해서 살 방도가 나오지 않는다면 차라리 책을 팔아 끼니를 마련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그들의 이 말에는 평생 글을 읽어봐야 과거시험에도 응시할 수 없었던 서얼들의 신분적 한계를 자조적(自嘲的)으로 묘사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기구한 현실을 유쾌하고 장난스런 태도로 승화시켰고, 또한 세상의 출세와 명예로부터 한 꺼풀 벗어나 자유인의 경지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지닌 학문적인 성향과 타고난 기질의 호방함이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4. 이덕무의 죽음과 저술
아정 이덕무는 1793년 1월 25일에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본래 체력이 약한 데다가 규장각 검서관 생활에서 오는 고된 직무와 생활고에 따른 감기와 함께 폐렴 증상이 겹치면서 타계한 것이다. 갑작스런 비보를 들은 박제가와 이서구, 박지원, 남공철은 그의 죽음을 애통해하며 그를 기리는 글을 지었고, 정조는 내탕금(內帑金) 5백 냥을 하사하여 그의 유고(遺稿)를 간행하게 하고 아들 광규를 규장각 검서관으로 특차했다.

이덕무의 박학다식은 이용후생파 사이에서도 유명했다. 가난하여 책을 사 볼 수 없어 집에는 비록 책이 없었으나, 책을 쌓아 둔 것과 다름없었다. 평생 동안 읽은 책이 거의 2만여 권이 넘었고, 손수 베낀 파리만큼 작다는 승두세자(蠅頭細字) 또한 수백 권으로서 자획이 방정하며 아무리 바빠도 속자(俗字)를 전혀 쓰지 않았다고 한다. 그가 쓴 책은 10여 종에 달하였는데, “나의 글이 진귀하지 못한 것이라, 한번 남에게 보이면 사흘 동안 부끄러워진다. 상자 속에 깊숙이 넣어 두었는데 스스로 나올 날이 있을 것이다.”하여 처음 쓴 초집(初集)의 이름을 「영처고(嬰處稿)」라고 이름 붙였다. 또한 청장이라는 물새 이름을 자호(自號)로 삼은 뜻을 유념하여 두 번째 문집을 「청장관고(靑莊館稿)」라 이름을 붙였다. 또한 듣는 대로 쓰고 보는 대로 쓰고 말하는 대로 쓰고 생각하는 대로 썼다는 의미의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 예절에 관한 「사소절(士小節)」 등이 있고, 그 외에 「청비록(淸脾錄)」, 「기년아람(紀年兒覽)」, 「청정국지(蜻蜓國志)」, 「앙엽기(盎葉記)」, 「한죽당섭필(寒竹堂涉筆)」, 「예기억(禮記臆)」, 「송사보전(宋史補傳)」, 「뇌뢰낙락서(磊磊落落書)」 등이 있다.

 

5. 이덕무의 세계관
아정 이덕무와 박제가는 북경 연행 중에 유리창을 중국 문인들과 만나는 장소로 삼았다. 이덕무는 박제가와 달리 청나라의 선진 문물에 경도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조선후기 특히 18세기는 실학자들의 중국 방문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던 시기였다. 홍대용을 비롯하여 박지원,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와 같은 연암 주변 인물들이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이들은 모두 중국 여행에서 돌아온 뒤 「연행록(燕行錄)」을 남겼는데, 이덕무는 「입연기(入燕記)」라는 「연행록」을 남겼다. 「입연기」는 1778년 3월 17일 서울을 출발하여, 윤6월 14일 의주로 돌아오기까지의 여정을 담은 연행록이다.

이덕무는 중국을 다녀온 연암파 실학자들과 달리 청나라 왕조의 지배체제를 부정적으로 인식한 인물이다. 박제가와 절친한 사이였지만, 이덕무는 그의 친청적(親淸的) 세계관을 비판적으로 바라보았다. 비슷한 시기에 중국을 다녀왔지만, 조선 선비들이 청나라를 오랑캐로 폄하하는 것을 비판한 박지원·박제가와는 서로 다른 중국관을 가지고 있었다. 이덕무는 청나라의 선진 문물에 경도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중국은 중국일 따름이고 조선도 나름대로 장점이 있으니, 중원만 모두 옳겠는가? 비록 도회지와 시골의 구분은 있을지 몰라도 모름지기 평등하게 바라보아야 한다.”

 

홍대용과 박지원, 박제가와는 또 다른 자국 중심의 상대주의적 세계관을 가진 그는 청나라와 조선을 자주적이고 평등한 관계로 인식하였다. 사실 청나라에 대한 이덕무의 인식은 전통적인 보수성향을 띠면서도 자국 중심적이고 평등한 것으로 점차 변화해 나갔다고 할 수 있다. 18세기 대명의리(大明義理)와 존주양이(尊周攘夷)의 생각이 팽배했던 시기에 조선 선비들이 가졌던 청나라에 대한 고민과 갈등을 이덕무를 통해 읽을 수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참고문헌>
「정조실록(正祖實錄)」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연암집(燕巖集)」
「귀사당집(歸思堂集)」
「국조보감(國朝寶鑑)」
「이덕무의 실학사상」(이성무, 「향토서울」31, 1967)
「네이버지식백과」

명곡(明谷) 최석정(崔錫鼎:1646~1715)


명곡(明谷) 최석정(崔錫鼎:1646~1715)        PDF Download

 

1. 생애
명곡 최석정(崔錫鼎)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초명은 석만(錫萬)이며, 자는 여시(汝時)·여화(汝和)이고, 호는 존와(存窩)·명곡(明谷)이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병자호란 때 주화론(主和論)을 주장했던 최명길의 손자이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총명함이 남달라서 9세에 시서(詩書)의 전문과 사서(史書)를 읽었고, 12세에 이미 「주역(周易)」에 통달하여 손수 점치는 법을 그림으로 그렸다. 17세에 초시 장원을 하고 1671년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을 모두 지냈으며 8번이나 영의정 자리에 오르면서 전문 관료의 삶을 살았다. 숙종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으며 국가의 주요 현안을 해결하는데 큰 역할을 했던 인물이다. 그가 남긴 저서는 「예기유편(禮記類編)」, 「명곡집(明谷集)」 36권, 「구수략(九數略)」 등이 있다.

 

2. 동양철학에 바탕을 둔 수학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조선 사회 재건을 위해서 실용 학문 지식이 필요했던 시기에 최석정은 수학에 큰 관심을 보였다. 그의 대표 저서인 「구수략(九數略)」 2권에는 고전역학을 바탕으로 한 수학이론을 정리하여 그 내용을 수록해 놓았다. 이 책은 기존 동양의 수학을 동양철학의 관점에서 새로운 시각으로 다시 해석한 수학책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책의 출간 시기가 정확히 언제인지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최석정이 오랜 관직생활을 하면서 나름대로 학문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충분히 가졌기에 이런 저서를 남길 수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 책을 특별히 주목하게 되는 것은 당시의 다른 수학책에 없는 인용서 목록이 수록되어 있는데, 중국에 널리 알려진 산학책은 물론이고 중국에서 발간된 서양 수학의 내용을 번역한 「천학초함(天學初函)」과 「주산」까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이 책이 서양의 수학을 부분적으로나마 이 땅에 최초로 소개한 책으로 평가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구수략(九數略)」의 내용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우선 수(數)의 기원과 근본을 설명하고, 덧셈․뺄셈․곱셈․나눗셈을 하기 위한 산대의 모양과 산대를 늘어놓는 방법, 분수를 나타내는 방법과 그 계산, 그리고 동양수학의 교과서인 「구장산술(九章算術)」의 재해석 등을 시도하고 있다. 규칙을 가지고 더해지는 급수의 합, 연립방정식(聯立方程式) 등의 방정식 이론과 풀이도 포함하고 있는 것이 더욱 흥미롭다.

이 책을 통하여 최석정은 특히 이전의 수학책에서는 언급하지 않은 주산과 산대계산법을 비교하여 설명하면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였다. 다시 말하면 그는 중국의 주판셈을 설명하면서 자세한 계산법은 중국의 수학책 「산법통종(算法統宗)」에 있으므로 중복해서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고 간략하게 언급하고, 당시 중국의 관사가 산대계산을 하지 않고 모두 주산(珠筭)을 사용하는 것과 일본이 역시 이 주산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모두 인식의 부족에서 오는 편견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최석정이 이와 같이 주판셈에 대하여 상대적으로 부정적인 시각을 가졌던 것은 아마도 주산에 비해서 산대계산은 자유롭고 넓은 범위의 자릿수 표현이 가능하기 때문이며, 특유의 분방함과 확장성이 가능한 우리 고유의 산대계산법에 대한 자신감이 작용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 책에서 더욱 흥미로운 것은 「하낙변수(河洛變數)」 부분에서 다양한 마방진(魔方陣)을 소개하고 있다는 것이다. 소개된 46개의 마방진들은 ‘하도(河圖)와 ‘낙서(洛書)’에서 시작하여 다양한 변형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마방진 일부는 중국의 「양휘산법(揚輝算法)」과 「산법통종」에 나와 있는 것이지만, 「낙서오구도(洛書五九圖)」, 「낙서육구도(洛書六九圖)」, 「낙서칠구도(洛書七九圖)」, 「낙서팔구도(洛書八九圖)」, 「낙서구구도(洛書九九圖)」, 「범수용오도(凡數用五圖)」, 「기책팔구도」, 「중상용구도」, 「구구모수변궁양도(九九母數變宮陽圖)」 등은 다른 산학서(算學書)에서 찾아볼 수 없는 최석정만의 유일한 창작품들이다.
이 책이 지닌 차별화된 특징을 다시 유추해본다면, 심오한 동양철학을 인간사의 법칙도 아니고 만물의 법칙도 아니며 점을 치는 수의 법칙도 아닌, 수학(數學)의 법칙을 적용하여 창안한 것이라 하겠다. 역학(易學)의 관점에서 수학을 설명한다는 것은, 수학을 하나의 잡학(雜學)으로 보지 않고 도학(道學)의 한 계통으로 파악하려는 의도가 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구수략」은 단순히 영의정 최석정의 지적유희의 소산인 수학책이 아니라는 데에 그 의미가 있다. 그가 다음과 같이 언급한 내용을 통해 그러한 사실을 유추해 볼 수 있겠다.

 

“수의 이치가 제아무리 심오하다할지라도 어찌 여기에서 벗어나겠는가? 이제 세상에 새로운 뜻을 밝혀서 「구장산술(九章算術)」의 모든 법칙을 풀고자하노니, 보는 사람은 새로운 설을 만들었다고 하여 홀대하지 말기를 바라노라.”

 

다시 말하면 최석정이 중국의 수학책에 있는 마방진을 연구하여 소개하면서 최석정만의 독창적인 마방진을 그의 저서 「구수략(九數略)」에 수록해 놓았는데, 그 중에서도 백미로 손꼽히는 「구구모수변궁양도(九九母數變宮陽圖)」는 최석정이 직접 명칭을 붙여준 것으로, 오일러보다 61년 앞서 발표되었다고 공인된 세계최초의 「라틴마방진」이다. 실제 모습을 제시하면 아래 그림과 같다.

 

2018율곡학인물-조동영-최석정편
「구수략」에 수록된 최초의 라틴마방진 「구구모수변궁양도」와 「구구모수변궁음도」 /이장주 교수 제공

 

그리고 최석정은 「구수략(九數略)」의 목록에다 「묵사집산법(默思集算法)」을 소개하였다. 이 책은 경선징(慶善徵: 1616~1690)이 지은 우리나라의 수학책인데, 이 책을 소개하면서 종6품 활인서 별제(活人署別提)였던 그를 극찬하였다. 최고의 양반이 당시 중인 계급이 종사하는 경선징에 대하여 신분의 차이를 넘어서 학문의 세계에서만큼은 격이 없었던 서로의 관계를 보여주는 단초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또 다른 흥미로운 면을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최석정은 「주역(周易)」의 괘(卦)를 바탕으로 상수학(象數學) 이해개념을 선보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당시 천문(天文)과 역법(曆法)에 수학이 가장 많이 쓰였는데, 최석정은 천문학을 공부하면서 「선기옥형(璿璣玉衡)」 제작에도 참여하였던 것이다.

 

3. 당쟁의 대립 구도에서 국정을 이끌었던 최고관료
최석정은 다양한 학문에 대한 개방성과 현실 중심의 정책 입안자였다. 당시 주요 사상인 주자성리학에만 치우치지 않고 양명학, 수학, 천문학과 같은 학문을 수용하는 개방성이 그의 정치노선에도 크게 작용하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후유증으로 호패법(號牌法), 호포법(戶布法), 주전론(鑄錢論) 같은 사회 정책을 두고 서로 다른 당파간의 정책 대립이 격렬한 시기에 현실 가능한 정책을 제시하고 추진하려고 하였다.

사회 모순을 점진적으로 해결해나가는데 중점을 두고 온건하고 합리적인 정치 노선을 추구하면서 소론의 입지를 지켜나갔다. 당시 소론의 영수였던 최석정은 노론 세력들의 공격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비록 당파 사람들의 미움을 받아서 여러 차례 벼슬에서 쫓겨나기도 했으나, 임금의 신임으로 다시 등용되곤 하였다. 그의 성정은 인자했으며 총명하고 박식하되 주장하는 논의가 각박하지 않았다고 한다.

아무래도 그가 온건한 정치 성향에 영향을 준 배경에는 학문의 배경이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보여진다. 서인 세력이 갑술환국(甲戌換局) 이후 노론과 소론으로 분당하면서 최석정의 스승인 남구만(南九萬)과 또 다른 스승 박세채(朴世采)는 소론을 이끌던 사람들이였다. 최석정은 12살 때부터 남구만의 문하에서 글공부를 하였다. 남구만은 성리학뿐만 아니라 역사지리에도 밝아서 역사지리에 대한 견해를 최석정에게 편지로 말하곤 하였다. 「황극탕평론(皇極蕩平論)」을 발표해서 양당의 대립을 막으려고 했던 박세채 또한 최석정의 스승이었다.

최석정-초상
보물 제1936호 최석정 초상 /문화재청

그의 할아버지 최명길은 우리나라 초기의 양명학자(陽明學者)였으며 그의 친구 정제두(鄭齊斗)는 우리나라 양명학을 집대성한 사람이었다. 이처럼 다른 학문을 수용하는데 개방적이고 정치적 대립에서도 온건했던 소론의 성향이 그의 정치 성향도 두드러지게 나타나 있음을 알 수 있다.

 

4. 만년의 여유로운 생활
최석정은 벼슬길에서 물러난 후에 주로 소래산 기슭에서 생활하였다.소래산은 시흥과 인천을 경계로 하는 지역의 산이다. 지금의 인천대공원 근처에 위치해 있다. 이 산이 원래는 인천의 진산(鎭山)이었다고 한다. 그가 은퇴 이후에 생활하면서 남긴 이 칠언율시(七言律詩) 한수를 보기로 한다. 이 시작품을 통해 그가 만년에 정계에서 물러나 자연과 더불어 한가롭게 보내면서 느끼는 정서와 즐거움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엿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그가 한평생 살아온 노곤함과 피로감이 한 수의 시에 응축되어 있는데 감상할수록 여운이 남는 작품이기에 소개해 본다.

 

소래산 기슭은 서식할 만한 곳이어서 蘇山之下可棲遲
늙지는 않았어도 한가로워 기쁜 것은 差喜身閑未老時
바람결에 야학 소리 편안하게 들려오고 野鶴風前多逸響
눈 내린 뒤 강둑 매화 두어 가지 피어선데 江梅雪後有疏枝
두보 아닌 학력으로 성벽 어찌 이루랴만 學非杜預那成癖
양웅의 글을 보다가 기발함을 알았으니 字到楊雄漫識奇
오솔길에 오가는 사람 적다 탓할 일 아니요 村逕不嫌來往少
이 중에 진짜 즐거움은 본심을 알아가는 것 箇中眞樂只心知

 

<참고문헌>
「현종실록(顯宗實錄)」
「숙종실록(肅宗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명곡집(明谷集)」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이긍익(李肯翊).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이규경(李圭景).
「경세유표(經世遺表)」, 정약용(丁若鏞).
「청선고(淸選考)」
「곤륜집(昆崙集)」
「당의통략(黨議通略)」
「인물지」(충청북도, 1987)
「진천군지」(진천군지편찬위원회, 1994)
「내고장 전통가꾸기」(증보판)(진천문화원, 1999)
「한국인물대사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 중앙M&B, 1999)
「문화유적분포지도」-진천군(충북대학교 박물관, 2001)
「(국역) 상산지(常山誌)」(상산고적회, 2002)

<참고 사이트>
[네이버 지식백과] 조선의 융합인재, 수학자 최석정 (KISTI의 과학향기 칼럼, KISTI)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3409161&cid=60335&categoryId=60335
– [네이버 지식백과] 최석정 [崔錫鼎] – 현실 가능한 정책을 제시한 소론 정치가(인물한국사)
– YTN 사이언스 : 위대한 과학기술인_최석정 편 (2016-06-20 )
– 수학동아.2018.3월호
– 석사논문 [최석정 생애와 학문]. 윤명선. 전남대학교 교육대학원: 교육학과 역사교육전공 1996.

김원행(金元行)


김원행(金元行)                                                              PDF Download

 

1702년(숙종 28)∼1772년(영조 48).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백춘(伯春), 호는 미호(渼湖)․운루(雲樓),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아버지는 승지 김제겸(金濟謙)이며, 어머니는 밀양박씨로 이조판서 박권(朴權)의 딸이다. 당숙인 김숭겸(金崇謙)에게 입양되어 종조부 김창협(金昌協)의 손자가 되었다. 일찍이 종조부 김창흡(金昌翕)에게 배웠고, 이어 낙론계의 종장인 이재(李縡, 1680~1746)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였다.

1719년(숙종 45) 진사가 되었으나, 1722년(경종 2) 신임사화(辛壬士禍)를 계기로 벼슬을 단념하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1721년에서 1722년 사이에 발생한 ‘신임사화’는 왕위 계승문제를 둘러싸고 노론과 소론 사이에 일어난 정치 싸움으로, 임인옥사(壬寅獄事)라고도 한다. 경종이 자식 없이 병이 많았으므로 속히 왕세자를 책봉해야 한다는 노론과, 이를 시기상조라고 하는 소론이 대립하면서 훗날 영조가 되는 연잉군을 세제로 책봉하였다. 그러던 중 소론 길일경(金一鏡)의 상소와 노론이 숙종 말년부터 경종을 제거할 음모를 꾸며왔다는 목호룡(睦虎龍)의 상소로 김창집(金昌集)․이이명(李頤命)․이건명(李健命)․조태채(趙泰采) 등 노론의 4대신을 비롯한 노론의 대다수 인물이 화를 입었다.

이 일은 그의 할아버지 김창집을 비롯하여 아버지 김제겸(金濟謙)과 맏형인 김성행(金省行) 등이 목숨을 잃거나 유배되는 등 그에게 큰 고통을 안겨준 사건이었다. 그 자신은 작은 할아버지인 김창협(金昌協) 댁으로 출계한 상태였기 때문에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이에 과거를 포기하고 어머니 송부인의 유배지인 금산(錦山)에 가 있으면서 「맹자」․「심경」․「율곡집」․「우암집」 등을 읽는데 전념하였다. 이후 청주에 머물면서 독서와 저술에 전념하다가 1745년(영조 21)에 청주의 미음(渼陰)으로 올라와 석실서원에 머물면서 후진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그는 1740년 내시교관을 비롯하여, 1750년 위수․종부시 주부, 1751년 익찬․지평, 1754년 서연관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였다. 그리고 1759년 왕세손(정조)이 책봉되자 세손의 교육을 위하여 영조가 그를 불렀으나 상소를 올려 사퇴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1761년 공조참의․성균관좨주․세손유선에 임명되었으나 역시 사양하고 산림처사로 생을 마감하였다. 저서로는 「미호집」이 있다.

제자들의 기록에 의하면 김원행의 용모는, “몸이 다부지면서 살집이 있었고, 얼굴은 크고 원만하였으며, 신체는 윤기가 흐르고 순수한데가 있었으며, 눈빛은 매서우면서도 넉넉하였다. 큰 입술은 붉었고, 구레나룻이 있었으며, 목소리는 크고 엄하였다. 손바닥은 두텁고 손가락은 짧았으며, 또 상체가 길고 하체가 짧아 서면 작았으나 앉으면 키가 커보였다”라고 묘사되고 있다.

홍대용(洪大容)이 김원행으로부터 들은 일화를 기록한 「미상기문(渼上記聞)」에는 종조부인 김창흡이 김원행에게 “너는 독서를 몇 번하여 암송하는가?”라는 질문에 “「서경」 중의 한편인 「우공(禹貢)」 읽기를 다섯 번에 겨우 암송하였습니다”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김원행의 암기력이 매우 뛰어났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미호언행록」에는 김원행이 6번 읽고 가까스로 외웠으나. 김창흡은 4번 읽고 외운 뒤에 종신토록 잊어버리지 않았다고 한다. 김원행의 암기력이 뛰어났으나 김창흡의 암기에는 미치지 못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인물됨이 「영조실록」 48년 12월 30일 졸기(卒記)에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태어나면서부터 자질이 뛰어나고 기개와 도량이 빼어나니 선배들이 모두 국정을 맡을 만한 능력을 갖춘 사람으로 인정하였다. 1722년 후부터는 산골에 물러가 살면서 오로지 자신을 위한 위기(爲己)의 학문에 마음을 썼다. 평소에 하는 일이 분명하고 의리를 변별함이 명확하였다. 이런 까닭에 세상에서 유학의 종주가 되었다.” 남을 위해 공부하는 위인지학(爲人之學)과 구분하여 자기 자신이 진정 참다운 사람다운 사람이 되기 위해 공부하는 것이 위기지학(爲己之學)이다. 자기 자신을 위한 공부에는 당파도 없고 신분차별도 없고 지역도 뛰어넘을 수 있기 때문에 지속적인 자기 성장이 가능하다.

또한 그의 「언행록」에는 “학자가 공자와 맹자의 도리를 배우고자 한다면 주자를 배우지 않고서야 되겠는가? 주자의 도리를 배우고자 한다면 우암(송시열)을 배우지 않고서야 되겠는가”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그의 학통은 이이(李珥)와 송시열(宋時烈)로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학통을 바탕으로 박세채(朴世采)․윤증(尹拯) 등 소론을 배격하는 노론의 대표인물로 자리하게 된다.

김원행은 실천을 중시하는 「소학」․「대학」․「중용」을 학문의 근본으로 삼았고, 또 교육하는 기본으로 삼았다. 김원행은 제자인 황윤석(黃胤錫)에게 학문하는 요령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학문하는 요령은 오로지 문자에 의지할 것이 아니라 행동, 말, 부모 섬김, 어른 공경, 사람과 접하여 실천한 것이 곧 근본 공부이다.” 즉 학문의 요령은 글이라는 문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의 관계에서 말을 조심하고 행동을 바르게 하며 부모를 섬기고 어른을 공경하는 등의 실천이 바로 공부의 근본이라는 것이다.

김원행은 당시 학술논쟁의 중심에 있던 인물성동이(人物性同異)의 문제에 있어서도 ‘누가 옳은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유학 본연의 정신에 입각해서 자기의 ‘본성’을 회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이어서 본성을 회복하는 방법으로 독서를 강조한다. “대개 독서하고 궁리하여 그 지식을 개발하지 않으면 진실로 그 본성이 본래 있음을 알 수 없을 것이고, 비록 안다고 하여도 행하는데 힘쓰지 않으면 또한 그 본성을 회복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독서하는 순서로는 먼저 소학을 읽은 다음 「대학」을 읽되 반드시 「대학혹문」을 겸해서 읽고, 다음으로 「논어」→「맹자」→「중용」→「심경」→「근사록」을 읽은 뒤 나머지 경전을 읽을 것을 권장하였다.

여기서는 이 글에서는 김원행이 강학했던 석실서원(石室書院)을 소개한다. 석실서원은 1656년 인조 대에 서인의 중심으로 활동하다고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에서 자결한 문충공 김상용(金尙容)과 문정공 김상헌(金尙憲)의 충절과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충렬서원이다. 주지하다시피 김상헌은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청나라와의 화친을 배척하고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한 인물이다. 또한 그는 1639년 청나라가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요구한 출병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청나라에 압송되어 6년 후에 풀려났다. 이때 가문의 묘산이 있는 석실촌에 은거하면서 자신의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특히 효종이 즉위하여 북벌을 명분으로 표방하던 때에, 효종은 김상헌을 대로(大老)로 추대하여 조정과 재야의 중망을 모으려 하였다. 이에 김상헌이 죽은 지 2년 후인 1654년(효종 5)에 서원건립이 발의되고, 그로부터 2년 후에 서원이 건립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7년 뒤인 현종 4년(1663)에 석실사(石室祠)라는 편액을 하사받고 국가의 권위를 인정받은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다.

석실서원에서 처음으로 강학을 연 이는 김상헌의 증손인 김창협과 김창흡 형제이다. 김창협은 39세 때인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송시열이 사사되고 아버지인 김수항(金壽恒)과 큰아버지인 김수흥(金壽興) 등이 대거 유배되자, 지금의 경기도 포천시인 영평(永平)으로 은거하였다. 1694년 갑술환국(甲戌換局) 이후에도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고향인 양주 미음으로 이주하여 학문에 전념하다가, 1695년 그의 나이 45세 때 집 근처의 서원에 머물면서 강학을 시작하였는데, 원근의 선비들이 매우 많이 모였다고 한다. 이들 문하에서 많은 인재들이 배출되었는데, 이재(李縡)․어유봉(魚有鳳)․민이승(閔以升)․이희조(李喜朝)․이재형(李載亨)․박필주(朴弼周)․민우수(閔遇洙)․신무일(愼無逸) 등이다. 석실서원에서의 강학은 김창협 사후 김창흡에 의해 1721년까지 계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김창흡은 문학으로 명성이 높았는데, 그의 문하에 영조시대 최고의 시인으로 일컬어지는 이병연(李秉淵)과 최고의 진경산수화가인 정선(鄭敾)이 그 제자이다.

김창협을 이어 김창흡에 의해 유지되던 석실서원의 강학은 1721년 신축사화로, 그의 형인 김창집(金昌集)과 조카 김제겸(金濟謙)이 유배되자 상심한 끝에 지병이 악화되어 1722년 2월 21일에 김창흡이 죽는 등으로 석실서원의 강학이 중단되었다.

그러나 신임사화로 중단되었던 석실서원의 강학은 1745년에 김원행에 의해 다시 재개되었다. 김원행은 신임사화로 할아버지 김창집과 아버지 김제겸, 형인 김성행(金省行) 등이 목숨을 읽고, 가족들이 유배되는 등 혹독한 집안의 화가 이어졌으나, 그 자신은 작은 할아버지인 김창협 댁으로 출계한 상태였기 때문에 화를 모면할 수 있었다. 김원행은 당시의 충격으로 벼슬을 단념하고 청주에 은거하면서 학문에 전념하다가 1745년을 전후로 경기도 양주의 미음으로 이주하여 석실서원을 왕래하면서 강학을 재개하였다.

그는 서원에서 강학을 재개하면서 서원의 학규(學規)와 강규(講規)를 마련하는 등 본격적인 강학활동을 통해 많은 제자들을 양성하였다. 특히 강학활동에 있어서 당론을 떠나 배우고자 하는 자에게는 누구에게나 문호를 개방하여 황해도를 비롯한 서북 3도는 물론, 영남지방의 문인들이 40~50명에 이를 정도로 그의 문인들은 전국적인 분포를 이루었다. 이러한 현상은 김창협․김창흡 이래로 전승되어 온 서울학계의 포용성과 ‘당론이 다른 사람일지라도 배우고자 하는 자는 제자로 받아들이겠다’는 김원행의 문인에 대한 개방적인 태도의 결과였다.

김원행은 석실서원에서의 강학활동으로 이름난 학자를 많이 배출하였는데, 박윤원(朴胤源)․김이안(金履安)․홍대용(洪大容)․황윤석(黃胤錫)․오윤상(吳允常) 등이다. 김원행의 큰아들 김이안이나, 박지원과 일가가 되는 박윤원, 천문학 연구로 널리 알려진 황윤석 등이 석실서원의 출신이었다. 이들은 함께 경전을 탐독하는 것을 물론, 혼천의(渾天儀)와 같은 경전 외의 것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였다. 김원행의 성리설과 예설은 주로 박윤원․김이안․오윤상 등을 통해 전수되었으며, 황윤석은 성리학․천문학․수학․어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학문적 관심을 보였다. 특히 그의 실용학문을 중시하는 실천적 사고는 홍대용에게 영향을 주었다.

당시 학풍에 대해 김원행은 “요즈음 과거에 힘쓰는 학문은 가장 저열한 부류이고, 또 문장에 힘쓰는 학문이 다음단계라고 할 것이다. 경서의 장구에 탐구하는 학문이 그 다음 단계인데, 아래 두 단계에 비해 차이가 있는 것이 당연하다. 또 장구를 하는 학문을 취하여 그 알게 된 바에 나아가 실천하는 것이 최고의 유학자의 일이 될 것이다”라고 하여, 학문의 단계를 과거→사장→경학→실천에 힘쓰는 네 단계로 구분하고 경학에 바탕한 실천을 중시하였다. 과거와 문장을 위주로 하는 선비와 경학과 실천에 힘쓰는 선비 사이에 질적인 차이를 두었다.

이러한 석실서원은 처음에는 서인 계열의 서원으로, 노론과 소론이 갈릴 때에는 노론계 서원으로, 그로고 노론계의 분화과정에서는 인물성동론을 주장하는 낙론(洛論)의 근거지로 기능하였다. 석실서원이야말로 조선 중화주의 이후 진경문화에서부터 북학사상에 이르는 집권세력의 최대 중심으로 자리잡았던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1868년(고종 5년) 대원군이 서원을 혁파할 때에 철폐 대상에 올라 완전히 훼철되었으며, 서원 터는 폐허가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비록 그러하나 김창협 형제의 문하에 출입하였던 정선이 석실서원을 진경산수로 그렸기에 석실서원과 김원행의 모습이 더욱 오래도록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고 하겠다.

 

[참고문헌]:
「영조실록」, 「매산집(梅山集)」,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김원행의 학문과 석실서원에서의 강학활동」(김인규, 「동방학」22, 한서대학교 동양고전연구소, 2012)

황경원(黃景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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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9년(숙종 35)~1787년(정조 11) 조선후기의 문신.

본관은 장수(長水). 자는 대경(大卿), 호는 강한(江漢)이며 시호는 문경(文景)이다. 아버지는 통덕랑을 지낸 황기(黃璣)이며, 어머니는 안동권씨로 권취(權冣)의 딸이다. 황경원은 당시 노론 낙론계의 중심인물인 이재(李縡)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황경원은 19세(1727)에 생원시에 2등으로 합격하였다. 그 뒤 의금부도사를 지내다가 1740년(영조 16)에는 증광문과에 병과로 합격하여 홍문관수찬에 제수되었다. 이어 예문관검열․병조좌랑을 거쳐 홍문관응교로 있을 때에는 명나라 의종(毅宗)의 제사를 건의하여 실시하게 하였다. 40세(1748)에는 당시 좌의정이었던 조현명(趙顯命)의 추천으로 동궁(東宮)이던 사도세자의 강학을 맡기도 하였다. 이로부터 대사성․대사간․대사헌 겸 양관제학 등을 거쳐, 1761년 이조참판에 이르렀으나, 이정(李涏)의 상소사건에 연루되어 거제도로 유배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합천으로 옮겨졌다가 고향으로 돌아와 풍천부사로 복관되었다. 영조가 죽기까지 12년 동안 호조참판․홍문관제학․이조참판 겸 대제학과 형조․예조․공조의 판서 등으로 활약하였다. 1776년 정조가 즉위하면서 모두 사양하고 중추부판사로 있다가, 1787년(정조 11) 2월 25일 향년 80세로 별세하였다.

1776년 정조가 즉위하여 규장각을 건립하자, 제학에 임명되어 이후 규장각을 중심으로 하는 방대한 편찬사업에 참여하여 중추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특히 정조가 동궁 시절에 이미 구상하였던 송사(宋史)의 재수작업인 「송사전(宋史筌)」의 편찬에 적극 참여하였으며, 「규장각지(奎章閣志)」 편찬에 참여하여 그 서문을 남기고 있다. 또한 명나라 의종 이래로 명나라에 대한 절의를 지킨 조선 사람들의 전기인 「명조배신전(明朝陪臣傳)」을 저술하였으며, 문집으로 「강한집」이 있다.

조선후기 문학사의 흐름으로 살펴보았을 때, 황경원은 최립(崔岦) 이후 한문의 4대가인 장유(張維)․이식(李植)․이정구(李廷龜)․신흠(申欽)으로부터 김창협(金昌協)․이의현(李宜顯)의 계통을 잇고, 뒤로는 홍석주(洪奭周)․김매순(金邁淳) 등으로 이어지는 순정고문가의 계보 안에서 뚜렷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주로 스승 이재의 문인들과 교유하였으며, 특히 ‘영조조의 사가(四家)’로 일컬어지는 이천보(李天輔)․오원(吳瑗,)․남유용(南有容)과도 친밀한 사이였다. 그 밖에 감창협의 손자인 김원행(金元行)․송명흠(宋明欽)․송능상(宋能相) 등과 교유하였다.

황경원은 18세기 영․정조 시대의 대표적 관각문인이다. ‘관각’은 관청의 건물, 즉 국가의 문장을 관장하는 관료문인을 말한다. 황경원은 영조시대에 국가의 문장을 관장하는 문형(文衡)을 오래 역임하면서 당대 문풍을 주도했던 문인이다. 정조를 비롯하여 후대의 많은 평자들로부터 “고아한 순정문의 맥을 잇고 있는 대문장가”로 극찬을 받았던 인물이다. 또한 집권층인 노론 낙론계의 대표적 인사로서 투철한 주자학적 이념에 근간을 둔 보수적 흐름을 주도한 인물이기도 하다. 청년시절의 박지원(朴趾源)이 그를 찾아가 자문을 구하기도 하였으나, 지금은 진보적 성향을 보인 박지원과 대척적인 위치에서 시대변화에 다소 둔감했던 보수적 문인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 글에서는 황경원이 남긴 206편의 시 가운데 ‘대명의리’에 관한 내용을 소개한다. ‘대명의리’는 명나라에 대한 조선의 의리를 말한다. 대명의리는 황경원에 있어서 평생의 신념이자 동시에 그의 문학세계의 저변을 이루는 핵심 주제이다. 황경원은 명나라가 이미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반세기가 지난 시점이고, 또 청나라가 중원을 완전히 장악하여 의미가 없던 시대였음에도 불구하고, 왜 대명의리의 문제에 집착하였을까?

황경원은 206편의 시를 남겼다. 무엇보다도 그에게 있어서 시는 아름다운 시상을 전개하여 문학적 역량을 드러내기 보다는 평생 고수하던 신념을 표출하는 수단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의리를 지켜야 하는 대상인 명나라에 대해 공부를 하다가 느낀 점을 시로 읊었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상처로 남은 흔적이 있는 유적지를 지나면서는 치욕의 역사에 몸서리치며 시를 지었다. 시로 명나라 장수들의 활약상을 장황하게 읊었고, 구원병을 파견하도록 결정을 내린 신종과 의종의 공덕을 높이 기렸다. 이들 시를 관통하는 일관된 정서는 청나라에 대한 강한 적개심과 역사적 치욕에 대한 울분, 그리고 명나라에 대한 한없는 고마움이다.

송시열(宋時烈)은 “대의에 입각하여 복수가 행해지지 않으면 대경(大經)․대법(大法)이 사라지고 인륜인 삼강(三綱)이 없어져 아들이 아비를 알지 못하고 신하가 임금을 알지 못하여 민심이 어긋나고 천지가 닫히게 되어 혼란에 빠져 금수의 무리로 전락한다”거나 “위로 천하의 제후로 무도한 자가 있거나 신하가 임금을 죽이고 자식이 부모를 죽이는 자가 있으면 힘으로 토벌해야 한다”라고 하여 북벌을 주장하였다.

병자호란 직후 송시열의 ‘북벌론’은 인륜 질서를 수호한다는 의미에서의 죄를 토벌한다는 개념이었다. 그러나 청나라가 중원을 완전히 장악하고 자신감이 커진 강희제(康熙帝)가 유화책을 쓰면서 조선에 대한 압력을 줄이게 되자, 청나라에 대한 토벌의 논리는 힘을 잃었다. 이때 부각되기 시작하는 것이 재조지은(再造之恩)의 논리이다. ‘재조지은’은 나라를 다시 만들어준 은혜라는 뜻으로, 나라가 망할 위기에서 구해준 것을 뜻한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의 원조로 조선이 은혜를 입었고, 결국 명나라기 이로 인하여 멸망하였다는 것이다. 이에 명나라의 멸망이 조선에 대한 원조였기 때문이었다고 하는 상소로부터 시작된 ‘재조지은’의 논리는 곧바로 만동묘(萬東廟) 설치와 중수, 대보단(大報壇) 제향의 강화, 청나라의 연호 거부, 존명 관계 서적 편찬 등 국가 차원의 사업으로 이어졌다. 만동묘와 대보단은 임진왜란 때 원군을 보낸 명나라 신종의 은혜와 의리를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이나 제단이다.

 

忠臣刎腹怒 충신들은 분노로 배를 찔렀고
貞士裂書爭 곧은 선비들은 다투어 글을 찢었네.
已傷丹極淪 조정이 능욕을 당한 것도 이미 서럽거늘
未覩黃河淸 황하가 맑아지는 것을 보지 못하는구나.
招提餘恨在 법당에는 아직도 한이 남아 있는데
埤堄曉鴻鳴 성벽 위에 설치한 낮은 담에는 새벽 기러기만 울며간다.

 

이 시는 남한산성에 있는 절, 장경사에 묵으며 지은 「숙장경사(宿長慶寺)」라는 작품이다. 구름 고요하고 달 밝은 밤에 고즈넉한 피리 소리를 들으며, 황경원은 병자호란 당시 분노로 배를 가르고 항복 문서를 울부짖으며 찢었던 치욕의 날을 떠올린다. 만리 밖에서 명나라의 구원병이 출병하였으나 이르지 못해, 그 사이 조정이 능욕을 당했고 이후 기어이 황하가 맑아지는 것을 보지 못한 채 살아야하는 현실이기에 법당은 ‘아직도 한이 남은’ 공간이 된다.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 포위되어 있던 조선의 조정을 위해 명나라 숭정제(명나라 16대 황제 의종)가 구원병을 파견했다는 사실은 공식적인 역사에서는 찾아볼 수 없고 황경원의 시에 처음 보인다. 훗날 「조선왕조실록」의 기사에 의하면, 황경원이 「명사(明史)」「조선전(朝鮮傳)」을 읽는 과정에서 발견한 사실이라고 한다. 당시 황경원은 그 사실을 영조에게 전했다. “숭정(崇禎) 10년 정월에 조선이 급변을 고하자, 황제가 진홍범(陳洪範)에게 각 진영의 수군의 군관을 선발하여 구원하도록 명하였는데, 강화도가 이미 함락되었다는 말을 듣고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는 것이 골자이다. 당시 의종은 이 일의 책임자를 통렬히 책망하면서 조선과 협력하여 구원하지 못하였음을 안타까워했다는 것이다. 「명사」에서 이러한 내용을 확인한 황경원은 의종의 은혜가 구원군을 보낸 신종과 차이가 없을 뿐만 아니라 더 깊다고 아뢴다. 신종의 파병이 명나라의 전성기였다면 의종의 파병은 위망이 박두할 즈음이었으니 “관창에 남은 무기가 없고 병사들의 실량이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속국의 어려움을 불쌍히 여겨 군사를 파견하였으니 잊을 수 없는 은혜”라는 것이다. 황경원은 이 사실을 영조에게 아뢰어 신종과 더불어 의종을 제향해야 할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이 사실을 들은 영조는 눈물을 흘리며 신종과 함께 의종을 대보단에 제사지내도록 하는 결정을 내린다.

꽤 많은 시간이 흐르고 실현 가능성도 없는 ‘재조지은’이 황경원에게만 유독 집요한 신념으로 나타나는 것은 주목해야 하는 부분이다. 특히 황경원은 무도한 세력이 중원을 차지하면서 도(道)가 어두워졌다고 하는 위기의식에서 나아가 ‘토벌’이라는 실천의지를 곳곳에서 나타내고 있다.

 

滿洲據神京 만주족이 황제의 도읍을 점거하여
天下皆被髮 천하가 온통 오랑캐 세상이 되었네.……
中原多志士 중원에는 지사가 많은데
胡不謨北伐 어찌 북벌을 도모하지 않는가.

 

‘중원에 지사가 많은데 왜 북벌을 도모하지 않는가’라는 물음은 무도한 청나라는 반드시 정벌되어야 한다는 의지를 반영한 것이다. 실리와 동떨어져 있고 실현 가능성도 희박하지만 국가 간의 명분과 의리는 마땅히 지켜야 할 것이라고 황경원은 믿었다. 그랬기에 청나라와의 ‘화친’이라는 외교적 전략에 대해서 철저히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무도한 청나라에 대해 토벌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도리어 안정화되어가는 국제 정세에 크게 분개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有賢人兮行純粹 현자가 있어 순수를 행하였으니
爲天下兮明大義 천하를 위하여 대의를 밝혔다네.
南漢被圍兮援不至 남한산성이 포위되었는데 원병이 이르지 않아
謀臣操筆兮主和議 모신이 붓을 잡고 화의를 주장하였네.
文正裂書兮灑血淚 문정공이 편지를 찢고 피눈물을 흘리며
六日不食兮又自縊 엿새 동안 먹지 않고 또 목을 맸다네.

 

이 시는 김상헌을 기린 「북관행(北館行)」의 일부이다. 김상헌은 병자호란 때에 화친을 주장하는 최명길 등의 주화론(主和論)에 맞서 싸울 것을 주장한 주전론(主戰論) 뿐만 아니라 청나라가 명나라를 공격하면서 출병을 요구하자 반대 상소를 올려 청나라에 압송되었던 인물이다. 김상헌이 강화를 반대하며 “편지를 찢고 피눈물을 뿌리며 엿새 동안 먹지 않고 자살까지 기도한” 사실을 섬세하게 재현한다. 그리고 청나라에 압송되어 감옥에 갇혀서 목숨까지 위협받으면서도 버리지 않았던 충절을 감동적으로 드러낸다.

이처럼 황경원이 시를 통해 표현하고자 했던 것은 ‘대의(大義)’정신이었다. 그러나 대의가 널리 선양되지 못하고 토벌이 실현되지 못하는 현실은 늘 답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 때문에 그는 시에서 슬픔, 한, 눈물 등 격한 감정으로 표현되었던 것이다. 명사(明史)에 해박하고 의리관념이 투철했던 황경원으로서는 명나라의 역사, 우리에게 베풀어준 명나라 황제의 은혜, 우리나라를 위해 싸운 명나라 장수들의 활약상은 물론 조선의 신하이자 명나라의 배신(陪臣, 제후의 대부가 천자에 대하여 자기를 이르듯이, 명나라에 대해 자기를 낮춘 말)으로서 충절을 다한 신하들을 널리 알리는 것을 소명으로 삼았으리라고 생각한다. 그가 붓을 들어 장편의 시를 쓰게 된 것도 이러한 소명의식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영조실록」, 「정조실록」, 「강한집」,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황경원의 문학관과 학문의 성격」(임유경, 「한국말글학」18, 한국말글학회, 2001), 「황경원의 시에 나타난 對明義理의 양상과 성격」(이은영, 「동양한문학연구」36, 동양한문학회, 2013)

전병순(田秉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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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6(순조 16)~1890(고종 27) 조선말기의 학자.

본관은 담양(潭陽)이고, 자는 이숙(彛叔)이며, 호는 부계(扶溪)․겸와(謙窩)이다. 아버지 전석채(田錫采)와 어머니 밀양박씨 사이에서 1816년 4월 27일 경상도 함영 안의현 추천에서 태어났다. 그는 노론 낙론계 학자로, 평생 동안 경남 함양에서 강학을 하며 공자와 맹자의 가르침인 유학의 도(道)를 수호하는데 기여한 재야학자이다. 선대로부터 크게 문명을 떨치지 못한 한미한 가문이었으나, 집안 대대로 유학을 숭상하여 이를 가업으로 이어왔다. 아버지 전석채는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여 크게 현달하지는 못했으나, 학문을 숭상하여 자식들의 교육에 남다른 열정과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타고난 총명함으로 스승의 가르침이 없이 책을 읽을 줄 알았으며, 글방의 스승인 최연중(崔演重)에게 「통감(通鑑)」과 「사기(史記)」 등을 배웠는데, 배운 즉시 이를 모두 외웠다고 한다. 그리하여 집안의 큰 기대를 한 몸에 받아 아버지의 명으로 동생인 전시순(田蓍淳)과 함께 서울에서 강학하고 있던 낙론계의 대학자인 홍직필(洪直弼)에게 나아가 10여년 간 수학하였다. 이때 홍직필의 문하에는 조병덕(趙秉悳)과 임헌회(任憲晦) 등 쟁쟁한 학자들이 수학하고 있었다.

전병순은 스승인 홍직필의 권유로 벼슬할 기회를 가졌으나 사양하고 학문에만 몰두하였다. 그는 홍직필이 서거하자 1년 동안 상복을 입어 스승에 대한 예를 다하였으며, 스승의 원고를 널리 수집하여 소휘면(蘇輝冕)을 비롯한 동문들과 함께 「매산집」을 간행하였다. 이처럼 전병순의 사상적 기반은 가학(家學)의 기초 위에 홍직필의 지도를 받아 사상적 심화를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전병순은 일찍이 어머니를 여의고 할머니 슬하에서 자랐다. 그래서 그는 할머니에게 효도를 다하여 날마다 일찍 일어나 세숫물을 올리고 잠자리의 춥고 따뜻함을 살폈다. 또한 장례를 치루거나 제사를 올리는 일에는 한결같이 예법에 있는 절차에 따라 처리하는 등 정성을 다하였다. 또한 형이 일찍이 작고하여 실질적으로 가문을 이끄는 책임을 맡게 되었는데, 남녀가 편복으로 안채를 드나들지 못하게 하였으며, 잘못이 있을 경우 좋은 말로 타이르거나 스스로 뉘우치게 하였다. 나아가 그는 사람을 사귀는데 노소와 귀천의 구분을 두지 않았으며, 말은 행동으로 실천할 것을 힘썼으며, 의복은 항상 검소하나 청결하게 입고 다녔다.

1869년(고종 6년) 스승인 홍직필의 명을 받들어 덕유산의 계곡인 부계에다 정사(精舍)를 짓고, 학생들에게 유학의 경전과 예서를 가르쳤다. 평생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후학을 기르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아 부계정사에서 강학하다가 1890년 10월 16일에 75세로 생을 마감하였다. 그의 사후 23년이 지난 1912년에 손자인 전범진(田凡鎭)과 전익진(田翼鎭), 문인인 임철규(林哲圭)와 김락종(金洛種) 등이 그가 지은 시문을 수집하여 전우(田愚)의 서문을 받아 「부계집」을 간행하였다.

전병순이 살던 19세기는 서구와 일본의 제국주의 힘에 의해 근대사회로 변해가는 과정으로 조선의 건국이념이자 통치이념이었던 유학, 즉 성리학적 사고가 크게 흔들리는 시기였다. 전병순은 당시의 현실을 난세(亂世)로 규정하고, 이러한 난세에 진정한 유학자로서 어떻게 행동해야하는지를 고민하고, 선현들의 의리에 따라 처신했다.

그래서 그는 공자의 “위태로운 나라에는 들어가지 않고 혼란한 나라에는 머물지 않으며, 천하에 도가 있거든 나아가 벼슬하고 도가 없으면 은둔한다”는 처세관을 본받아, 덕유산 자락에 정사를 짓고 학문과 후진 양성에 주력하였다. 또한 “그 지위에 있지 않으면 그 정사를 도모하지 않는다”거나 “몸이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으면 정치에 대해 말을 해서는 안된다”는 스승 홍직필의 가르침에 충실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홍직필의 문하생들은 당대의 현실을 난세로 인식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인 위정척사(衛正斥邪)와 존화양이(尊華攘夷)의 당위성을 인정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현실적인 한계를 인정하여 일본을 비롯한 제국주의 세력과 전면적인 투쟁을 전개하기 보다는 물러나 자정(自靖)을 통해 후학을 기르면서 훗날을 도모하였다. 이 때문에 다른 유림의 비난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정’적 입장을 취했으며, 전병순 자신도 덕유산 자락의 부계에 정사를 짓고 강학활동에 매진하였다. 이러한 그의 삶과 철학은 그가 지은 시에도 그대로 나타나 있다.

전병순은 일생동안 수많은 시를 지었지만, 현재 전하는 시는 246제(題) 292수(首)이다. 그는 유학의 도를 삶의 표준으로 삼고 이를 수호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으로 여기며 살았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전병순이 공자와 맹자의 가르침인 유학의 도를 수호하려는 의지를 드러낸 시 몇 편을 소개한다.

 

如何末俗多澆薄 어찌하여 말속이 되어 경박함이 심해졌나.
㥿海滔滔摠亂朱 거만한 파도가 도도하게 지배하여 난주(亂朱)가 되었네.

 

이 시는 선배인 운소(雲巢) 어른의 시에 차운한 것으로, 나날이 변해가는 시속(時俗)에 대한 염려와 함께 이를 바로잡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유학뿐이라는 확신을 드러내고 있다. 첫 구절은 부모에게 효도하고 친구에게 신의를 지키는 유학의 삼강오륜이 우리의 전통적인 풍속인데, 서구의 제국주의 세력과 함께 전래된 건전하지 못하고 사악한 가르침(邪敎)이 범람하면서 인심이 점점 경박해져가는 현실을 개탄하고 있다.

둘째 구절은 거대한 파도처럼 밀려오는 제국주의 세력들의 모습과 이들의 지배하에 놓인 조선의 현실모습이다. 서구로부터 들어온 기독교들이 점점 그 세력을 확대하여 ‘위로는 임금과 부모의 분별도 없고, 아래로는 부부의 구별도 없으며, 남녀가 동석하여 손을 맞잡고 춤을 추는’ 말세의 풍속으로 변화되어, 소중화(小中華)의 전통을 지켜온 조선의 백성들이 여기에 차츰 동화되어 가면서 전통적 가치를 잃어가는 현실이다. 그는 공자의 “잡색인 자줏빛이 원색인 붉은 빛을 없애는 것을 미워하며, 정나라의 음란한 음악이 바른 아악(雅樂)을 문란케 하는 것을 미워한다”는 말을 인용하여 ‘임금과 부모도 몰라보고 남녀의 구별도 없는 외설적’인 사악한 가르침의 폐해를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다.

여기에서 ‘소중화’는 명나라가 오랑캐인 청나라에 망하여 인륜과 예의 등 문명의 도가 무너지게 되어 유일한 문화국가가 조선뿐이라는 자긍심을 갖는 것을 말한다. 실제로 조선 말기 지식인들이 외세의 침략에 맞서 ‘존왕양이’와 ‘위정척사’를 주장한 것은 예의정신과 화이사상에 근거한 존화양이(尊華攘夷)로 집약할 수 있다. ‘존화양이’는 중화(중국)를 존숭하고 오랑캐를 물리친다는 뜻으로, 줄여서 화이론(華夷論)이라고도 한다. 이러한 화이사상은 공자의 춘추의리를 계승한 도덕주의 문명사관으로, 주자는 공자의 춘추의리를 13세기 중국이 요나라와 금나라 등 북방족에 밀리어 존망의 기로에 선 남송(南宋) 시기에 구국항쟁의 기치를 들었던 화이사상으로 재창조하였다.

주자에 의해 집대성된 성리학을 건국의 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의 지식인들도 오랑캐로 여긴 여진족이 세운 청나라의 침략에 굴복하자, 중화문화의 본산으로 존숭했던 명나라가 멸망하는 시대적 상황에서, 국가의 존재 이유를 재확인하고 청나라에 대한 항쟁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화이사상을 계승하고 부각시켰다. 청나라에 의해 명나라가 멸망하자, 조선의 유학자들은 조선이 세상에 유일한 문화민족이라는 자존의식을 지니고 ‘소중화’로 자칭하였으며, 이 문화적 자존의식과 주체성으로 오랑캐인 청나라에 당한 굴욕과 수치를 극복할 수 있는 국민적 공감대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이에 조선 말기에는 외세의 침략에 맞설 수 있는 대응 논리로서 ‘존왕양이’와 ‘위정척사’를 기치로 내걸고 외세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고 배척하여 자주국가를 공고히 하고자 하여 의병운동을 전개하였던 것이다.

이에 수많은 유학자들이 외세의 침략에 맞서기 위한 의병운동을 전개하였지만, 무력을 앞세운 외세를 막을 수가 없었다. 이에 민족의 문화적 자존과 주체성을 지키려는 유학자들은 의병운동에 참여하여 목숨을 잃거나 스스로 무력감에 빠져 목숨을 끊는 사람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俯仰乾坤歎 하늘을 우러러보고 땅을 굽어보며 탄식하노라.
吾身不再生 우리의 몸은 다시 태어날 수 없는 것
人何自暴棄 사람들은 어찌 자포자기하는가.

 

이 시는 화서학파를 비롯한 위정척사파들의 의병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이를 통분하여 부모가 남겨주신 몸을 함부로 훼손하거나 목숨을 끊는 이를 비판한 것이다. 신체발부는 부모가 남겨주신 것으로 머리카락 하나라도 훼손시키지 않는 것이 효도의 시작인데, 하물며 목숨을 함부로 끊는 것은 유학자의 도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비판의식은 동문인 전우(田愚)에게도 찾아볼 수 있다. 전우는 “오백년 종사를 보존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3천년의 전통을 계승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하여, 도를 계승하고 후세에 전수하는 일이 진정한 유학자의 일이라고 여겼다. 더 나아가 전병순은 비록 지금 유학의 도가 어두워가지만 반드시 밝은 세상이 올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孜孜勿謂前程遠 부지런히 힘쓰며 앞길이 멀다고 말하지 말라
期到斯文百尺間 사문이 백천간두에 이른 때라네.

 

이 시는 유학의 연구에 더욱 정신하여 유학의 도가 다시 꽃피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이처럼 전병순이 살았던 19세기는 서구와 일본의 제국주의의 힘에 의해 근대사회로 변해가는 과정으로, 조선의 건국이념이자 통치이념이었던 유학의 정통성이 흔들리는 시기였다. 그러나 그 자신은 유학을 신봉하는 유학자로서의 길을 삶의 표준으로 삼아 이를 수호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여기며, 몸소 도의(道義)를 지키며 후진양성에 힘써 미래의 밝은 세상을 위한 기반을 구축하며 살았다. 이에 병인양요(1866)와 신미양요(1871), 그리고 일제와의 통상조약(1876)이라는 대변고의 위기 속에서 위정척사 의식을 갖고 있으면서도, 재야의 유학자로서 유학의 도를 지키기를 고집하였던 것이다.

 

[참고문헌] 「부계집」,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부계 전병순의 생애와 시문학 일고」(이동재, 「한문교육연구」32, 한국한문교육학회,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