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현(金珍鉉)


김진현(金珍鉉)                                                             PDF Download

 

181878(고종 15)~1966. 근대의 유학자이다. 본관은 광산이며, 자는 경유(景儒)이며 호는 운파(雲坡)이다. 아버지 김재화(金在華, 호 晩圃)와 어머니 하동정씨 동욱(東旭)의 딸 사이에서 1878년(고종 15) 10월 13일에 광주 서방(瑞坊)에서 태어났다. 조선 말기의 학자이자 의병장인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1846∼1916)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시문집으로 「운파유고(雲坡遺槁)」가 전해진다.

한일합방 이후 일본인 전도(田島)가 와서 유적(儒籍)에 날인하면 식전(息典)이 있을 것이라며 날인을 청하자, 분개하며 호통을 쳐서 돌려보내기도 했다. 89세가 되던 1966년에 사망하였다.

운파유고」는 근대의 유학자 김진현의 시문집이다. 6권 6책으로 석인본이다. 1978년 김진현의 아들 김영도(金永燾)와 조카 김영만(金永滿)이 편집·간행하였다. 권두에 이가원(李家源)의 서문과 권말에 노문영(盧文永)의 발문이 있다. 현재 고려대학교 도서관, 전남대학교 도서관, 단국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권1에는 부(賦) 4편, 시 553수가, 권2에는 서(書) 185편이, 권3에는 서(序) 18편, 기(記) 23편, 발(跋) 23편이, 권4에는 잡저 35편, 제문 20편, 상량문 2편이, 권5에는 비문 6편, 묘갈명 8편, 묘표 12편, 행록 6편, 행장 14편, 전(傳) 2편이, 권6에는 부록으로 설(說)·의(意)·하(賀)·기(記)·만사 각 1편, 서(序) 3편, 축(軸) 2편, 행장, 묘갈명 등이 수록되어 있다.

잡저의 「존주해(尊周解)」는 존주대의(尊周大義)를 시대의 변화에 맞추어 주나라를 대신하여 명나라를 존숭할 것을 주장하여, 망국의 실의 속에 민족 주체성에 대한 각성이 엿보인다. ‘존주대의’는 제후가 천자의 나라를 높이는 의리이다. 공자는 「춘추」라는 책을 지어 중국 주 왕실을 높였다. 또한 중국 송나라 때의 주자가 존주대의를 중시했다. 조선조에 이르러는 통상 명나라를 존숭하고 청나라를 배척하자는 논리의 근거로 썼다. 「민위귀론(民爲貴論)」은 존귀한 것으로 인군(人君) 같은 이가 없지만, 인군은 백성이 아니면 존귀할 수 없기 때문에 백성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존재라며 백성의 귀중함을 역설한 논설이다. 백성들의 생업을 편안하게 함으로써 천하태평을 이룩할 수 있음을 강조하여 정치하는 위정자들의 각성을 시사하고 있다.

공사변(公私辨)」은 ‘공’과 ‘사’를 분명하게 구분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인물변(人物辨)」은 인간은 귀천의 차이 없이 도덕적 품성을 갖추는 것만이 진보적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언행변(言行辨)」은 언행을 삼가야 한다는 내용의 글이다. 「삼산재배송사선생수의문목(三山齋陪松沙先生隨疑問目)」은 1897년 기우만의 문하에서 수학할 때 기록한 것이다. 경전 연구 중에 의심나는 곳을 간추려서 질의응답한 내용이다. 경의(經義)뿐만 아니라 상례와 제례의 호칭 문제도 언급하고 있어 주목된다.

경술기사(庚戌記事)」는 1910년 경술국치 후 당시 덕망 있는 인물의 회유책으로 자행되던 일본 천황의 은전(恩典)이라는 대장에 날인하라는 일본 경찰의 회유와 여기에 대처한 자신의 태도를 기술한 것이다. 「신담록(薪膽錄)」은 1911년 기우만이 남원시 서림주재소에 출두하여 일본 경찰에게 문초받은 전말을 기록한 것이다. 그밖에 우사(寓舍)에서 발견된 의병장과 주고받은 서신 및 의병활동․의관․복식․학문․은전 등에 걸쳐 진행된 문답을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또한 김진현과 관련되는 채국계(採菊契)의 내용을 소개한다.

‘채국계’는 교유계(交遊契) 또는 풍류계(風流契)로, 지금의 전남대학교 뒤편 반룡부락에 거주하던 김진현을 위하여 이철종(李哲琮) 등이 1933년 중구일(重九日)에 동료 제자들과 스승의 지우(知友) 등 300여명을 모아 계를 만들었다. 김진현은 이미 강의계(講誼契)를 만든바 있고, 채국계가 계를 만드는 것을 지원하였으며, 해방 후 난심계(蘭心契)까지 결성하는 등 시문을 좋아하고 주변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즐겼다.

‘채국계’라는 계명을 붙인 것은 중양절(음력 9월 9일)과 관계가 깊다. 지금은 우리들의 기억에서 멀어졌지만 구구절, 구일날 또는 궐날이라고도 하는 중양절은 추석 못지 않은 큰 명절이었다. 햇곡식으로 조상께 천신(薦新)하고 누런 국화를 따서 국화전을 부치고 국화주를 빚어 시식(時食)으로 삼았다. 중국에서는 옛날부터 1에서 10까지의 기본수 가운데 기수(奇數)를 양수(陽數)라 하여 1월 1일, 3월 3일, 5월 5일, 7월 7일, 9월 9일을 명절로 삼았다. 그 가운데에서도 양수의 극이라 믿는 9가 겹치는 날을 중양(重陽)이라 하여, 양기를 존중하는 사상에서 큰 명절로 삼아왔다.

한나라와 위나라 시대부터 국화를 감상하고 높은 곳에 올라 시를 읊는 상국등고(賞菊登高)의 습속이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신라 이래로 중구절을 숭상하여 군신(君臣)이 설연창화(設宴唱和)하였고, 풍류를 아는 선비들은 높은 곳에 올라 시를 쓰고 단풍과 국화를 감상하며 하루를 즐겼다. 조선조 이래 중구절은 일반 백성들의 명절이라기보다 양반들, 특히 남자들의 명절이었다. 중양절의 의미를 살려주는 국화를 계명에 붙인 것은 이와 같은 전통에서 기인한 것으로 계절감 및 계의 성격을 상징적으로 잘 나타내준다. 1968년 김진현 사후 채국계는 받드는 대상을 상실하고 소멸하였다.

채국계는 성년이 된 운파 김진현의 문인과 친우들로 구성되었는데 거주지는 서방․용봉 지역이었다. 창계시 계원이 300명이 넘었으니 김진현을 흠모하고 따르는 이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짐작할 수 있고 그의 높은 학식과 문장의 고매함을 알 수 있다. 한학의 대가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조직이므로 단결력이 튼튼하고 스승이 생존해 있는 기간 동안은 별다른 계원의 변동없이 잘 유지되어 왔다.

채국계의 강신일은 매년 음력 9월 10일이었다. 강신일이 되면 20여명의 유사가 200명 이상이 참석하는 계회의 음식물을 각자의 자비로 부담하여 준비하고 가마솥, 땔감, 그릇 등을 터가 넓은 정자나 냇가의 나무숲 아래로 가지고 나가 직접 밥을 지어먹었다. 같은 솥의 밥을 함께 먹음으로써 하나라는 일체감을 더욱 다진 것이다. 채국계도 강의계와 유사하게 스승을 받들고 교제를 넓히자는 취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상국등고(賞菊登高)는 못하였지만 지참한 지필묵으로 운에 맞춰 한 편의 싯구를 읊으며 늦가을의 정취를 한껏 표출하는 장을 마련하였으며 이를 본계의 중요한 대목으로 여겼다.

이 자리에서 직강에 의해 한시 짓는 법이 강의되었고, 서로 앞다투어 시문을 써내 주고받으며 필력을 향상시키고 우의를 돈독히 하였다. 계비는 창계시 20전, 해방이후 30원씩의 계비를 각출하는 등 최소 운영비용만을 거두었을 따름이며, 계원에 대한 상조 기능은 거의 없었고 그때그때 계원 상호간 부조만 있었다. 김진현 사후 유족과 그를 따르는 몇몇 제자에 의해 「운파유고문집(雲坡遺稿文集)」이 발간되었다. 지금까지 채국계를 통해 선인들의 스승에 대한 존경심이 얼마나 강했는지를 알 수 있으며, 해방 후 극히 짧은 기간 동안 우리의 의식이 급변하고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참고문헌]: 「光州의 契」(광주광역시립민속박물관, 1996),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