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단상(李端相) 2


이단상(李端相) 2                                                        PDF Download

 

이단상(李端相, 1628∼1669)은 조선시대의 문관으로 부수찬, 교리, 병조정랑, 인천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특히 상수학을 중심으로 독창적이며 개방적인 학풍을 구축하고 낙론의 대표격인 김창협(金昌協)이 심학의 기초를 형성하는데 크게 영향을 미쳐 낙론의 선구자로 평가를 받는다.(참고 우경섭 461쪽) 별칭으로 유능(幼能, 자), 정관재(靜觀齋, 호), 서호(西湖, 호) 등을 사용하였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1628년(1세, 인조 6년)

5월 25일(음력, 이하 월일은 모두 음력임), 남양부(지금의 경기도 수원, 화성, 인천 일부지역)에서 대제학 이명한(李明漢)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명한은 병자호란 때 청나라와 화친을 배척한 척화신이며 대제학을 지낸 인물이다.

할아버지는 좌의정을 역임한 이정귀(李廷龜, 1564∼1635)로,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와 관련된 외교의 일선에서 활동하였으며 조선 중기 4대 문장가중 한명으로 손꼽힌다. 본관은 연안(延安), 즉 지금의 황해도 연백이다. 연안 이씨 가문은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명문가중 하나였다.(우경섭 462쪽)

 

1635년(8세, 인조 13년)

민후건(閔後騫)에게 역사서를 배웠다. 4월, 할아버지 문충공 이정귀(李廷龜)의 상을 당하였다.

 

1636년(9세, 인조 14년)

12월,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아버지를 따라 강화도로 피난하였다. 이때 형 이가상(李嘉相)과 함께 청나라 군대에 붙잡혔으나 친척의 도움으로 풀려났다. 그러나 형 이가상은 어머니 박씨를 구하러 적진에 뛰어들어 청군의 칼에 사망하였다.

 

1637년(10세, 인조 15년)

1월에 강화도가 함락되자 청나라 군대의 포로가 되었다. 2월에 석방되어 송도를 거쳐 부친이 거처하는 수원 쌍부로 돌아왔다. 모친상을 당하였다.

 

1639년(12세, 인조 17년)

10월, 강원 감사로 부임하는 부친을 따라 원주 순영으로 갔다.

 

1640년(13세, 인조 18년)

8월, 부친을 따라 풍악산 및 영동의 여러 명승지를 유람하였다. 10월, 부친을 따라 서울로 돌아왔다. 다음해 가을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1642년(15세, 인조 20년)

3월, 관례를 행하였다. 전의 이씨 이행원(李行遠, 1592∼1648)의 딸과 결혼하였다. 이행원은 대사헌, 이조판서, 병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그는 그림을 잘 그렸으며 지방관으로 나갔을 때 치적을 많이 쌓고 일생을 가난하게 지내 청백리에 뽑힌 사람이었다. 12월, 부친 이명한이 명나라와 내통했다는 이유로 청나라 심양에 잡혀갔다.

 

1643년(16세, 인조 21년)

4월, 부친이 심양에서 풀려나 돌아오자 안주로 마중을 나갔다. 병자호란으로 겪은 이러한 경험 때문에 그는 북벌을 주장했던 우암 송시열(1607∼1689)에 적극 동조하고 그를 따르던 송준길, 김수항, 홍명하 등 학자들과 교류하였다.(우경섭 463)

 

1645년(18세, 인조 23년)

4월, 부친상을 당하였다. 며칠 뒤 작은형의 상을 당하였다.

 

1648년(21세, 인조 26년)

8월, 진사시에 장원하였다. 9월, 큰형 청호공(靑湖公) 이일상(李一相)을 금성 임소로 찾아가 뵈었다. 영암 월출산을 유람하였다. 11월, 서울로 돌아왔다.

 

1649년(22세, 인조 27년)

4월, 정시(庭試) 문과에 병과로 합격하여 승문원 권지부정자가 되었다. 10월, 승정원 가주서, 세자시강원 설서에 임명되었다. 다음해 4월, 가주서 겸 춘추관기사관이 되다. 6월에 설서가 되었으며, 10월에 예문관 검열이 되었다.

 

1651년(24세, 효종 2년)

6월, 대교 및 겸설서가 되었다. 왕명을 받들어 강화도 사서 보관서에 다녀왔다. 12월, 봉교가 되었다.

 

1652년(25세, 효종 3년)

7월, 상소하여 모화관 열무(閱武, 무술 관람)를 정지할 것을 청하였다. 『효종실록』 7월 23일 기사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봉교 이단상이 상소하기를, ‘관무재 행사가 마침 자전(慈殿, 임금의 어머니)께서 목욕하시는 날에 있게 되므로, 바깥 이야기가 혹시 자전께서 성에 올라 구경하실 것이라 합니다. 신은 이 일이 실효는 없고 한갓 소문만 번거롭게 할까 염려됩니다. 그만둘 수는 없더라도 날짜를 고쳐 잡아야 하겠습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응답하지 않았다. …… (임금은) 이때 시행하려던 관무재를 특별히 명하여 날짜를 앞당기게 하였다.”

 

8월, 성균관 전적이 되었으며 실록청 낭청이 되었다. 10월, 사서(司書)에 임명되었다가 이어서 경기도 도사(都事)가 되었다. 12월, 부수찬 지제교에 임명되었다. 경연 검토관과 춘추관 기사관을 겸하였다.

 

1653년(26세, 효종 4년)

이해부터 효종의 북벌 정책이 본격적으로 추진되기 시작했다. 이단상은 이즈음부터 1660년경(효종이 사망하고 현종이 등극한 직후) 중앙 정계에서 물러날 때까지 북벌론자로서 효종의 최측근으로 활약하였다.(우경섭 465)

3월, 부교리 지제교에 임명되었다. 경연 시독관과 춘추관 기주관을 겸하였다. 6월에 교리, 7월에 헌납이 되었다가 병조 좌랑을 거쳐 정랑에 임명되었다.

이해 2월에 이단상은 부수찬 자격으로 부응교 심지한(沈之漢) 등과 함께 재난을 극복하는 방법에 대해서 임금에게 건의하였다. 『효종실록』 2월 13일자 내용의 대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자신을 반성하는 것으로, 겉치레만 일삼지 말고 실질적인 덕을 닦도록 힘써야 합니다.

둘째, 산림(山林)의 선비들을 끝까지 잘 기용하고 정직한 신하를 내치지 말고 포용해야 합니다.

셋째, 언로를 널리 열어, 마땅히 여러 말을 받아들이는 도량을 넓히시어 망령된 말이라도 죄를 주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넷째, 궁중에서 함부로 백성들의 전답을 점유하는 폐단을 명백히 조사하여 원망을 품은 사람이 없게 해야 합니다.

다섯째, 호서(湖西)지방에서 올리는 임금님 수라상 반찬은 제값을 주고 올리도록 해야 합니다.

여섯째, 능(陵)에 거둥하실 때에 백성들을 동원하는 것은 마땅히 가을이 되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1654년(27세, 효종 5년)

10월, 남학 교수를 겸하였으며, 성균관 직강이 되었다가 교리에 임명되었다. 12월에 이조 좌랑에 임명되었다. 이후 그는 여러 차례 이조, 병조의 정랑을 지내고 의정부 사인으로 지제교를 겸하였다.

 

1655년(28세, 효종 6년)

5월, 교리가 되었으며, 8월에 겸사서에 임명되었다. 9월에 대제학 채유후의 천거에 의하여 김수항, 남용익, 이은상 등과 함께 사가독서를 하였다. 사가독서(賜暇讀書, 임금이 휴가를 주어 글을 읽음)는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만 전념케 하는 제도였다.

 

1656년(29세, 효종 7년)

1월, 부수찬에 임명되었다가 교서관 교리를 겸하였다. 윤5월에 부교리가 되었다. 6월에 전적에 임명되었다가 부교리, 이조 좌랑, 헌납, 부수찬 등을 역임하였다. 12월에 이조 정랑이 되었다. 이조 정랑은 젊은 문관으로서는 최고의 자리였다. 관리 임용대상자의 명단을 작성하거나 중요 직책으로 꼽히는 삼사 관원의 임명제청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이 자리를 거친 사람들은 출세도 빨랐고 대개는 재상의 자리까지 올랐다.

 

1657년(30세, 효종 8년)

2월, 겸문학이 되었다. 6월에 의정부 사인이 되었으며, 춘추관 편수관을 겸하였다. 아울러 경연 시강관, 교서관 교리를 겸하였다. 7월에 사간이 되었으며, 12월에 응교가 되었다. 이때 그는 송준길(宋浚吉)을 불러올 것을 청하였다.

 

1658년(31세, 효종 9년)

1월, 겸보덕에 임명되었으며 동학 교수가 되었다. 2월에 집의가 되고 3월, 응교에 임명되었다. 11월에는 호남 암행어사가 되어 여러 고을의 폐단을 살펴보고 구제책을 건의하였다.

 

1659년(32세, 효종 10년)

1월, 명을 받들어 각 지방의 폐막을 위에 보고하였다. 2월, 응교가 되었으며, 필선을 겸하였다. 6월, 사인이 되었다. 사인은 정4품의 문관이다. 12월에, 부응교에 임명 되었다. 부응교는 홍문관의 종4품 관직이다.

 

1660년(33세, 현종 1년)

1월, 사인이 되었다가 다시 2월에 부응교가 되었다. 3월, 종부시 정이 되었다. 5월, 집의에 임명되었다.

 

1661년(34세, 현종 2년)

1월, 사인이 되었다. 부묘도감 낭청이 되었다가 사직하였다. 이즈음부터 정국이 급변하여 두문불출하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이미 관직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위기지학(爲己之學, 자기 자신의 도덕적 완성을 목표로 하는 학문)에 뜻을 두었다.(우경섭 464) 6월, 청풍 부사가 되었다. 청풍은 지금의 충청북도 제천군 일부와 청풍군이다. 이듬해 7월까지 약 1년간 재직하였다.

 

1662년(35세, 현종 3년)

7월, 응교가 되었다가 9월, 사인이 되었다. 11월, 남한산성의 천주사에 가서 독서하였다.

 

1663년(36세, 현종 4년)

이즈음 저술에 매진하였다. 『대학집람(大學集覽)』, 『사례비요(四禮備要)』, 『염락정음(濂洛正音)』 등을 편찬하였다. 송시열, 송준길 등과 편지로 왕래하고 영령전 개수에 관해 논하였다.

 

1664년(37세, 현종 5년)

1월, 사간, 집의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2월, 성균관 사성이 되었다. 얼마 뒤 집의가 되었다가 전한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이즈음 입지권학(立志勸學, 뜻을 세우고 학문을 권장함)에 관한 다섯 조목을 상소하였다. 3월, 사간이 되었다. 4월, 응교가 되었다. 동호서당에 거쳐하며 『심경(心經)』을 읽었다. 5월, 인천 부사가 되었다. 이때는 어머니의 봉양을 위해서 스스로 자청한 것이었다. 약 5개월간 인천에 머물렀다. 짧은 기간이었으나 곤궁한 현지 백성들을 위해서 적극적인 진휼정책을 추진하였다. 이 사실이 암행어사의 좋은 평가를 받아 말 한필을 상으로 받았다.(우경섭 464)

10월, 집의가 되었다. 11월, 월과(月課)를 짓지 않아 파직되었다. 사실은 송시열을 두둔하는 장문의 상소를 올린 것이 반대파의 공격을 받아 조정을 떠나게 된 것이다.(우경섭 467)

 

1665년(38세, 현종 6년)

9월, 양주의 동강 영지동으로 물러나 은거하였다.

 

1666년(39세, 현종 7년)

1월, 형 이일상(李一相)이 사망하여 곡을 하였다. 4월, 『주역』을 읽었다. 영지동에 정관재(靜觀齋)를 지었다. 10월, 집의, 겸보덕에 제수되었으나 사직하였다.

 

1667년(40세, 현종 8년)

5월, 보덕에 임명되어 누차 사직했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다가 교체되었다. 이즈음 김창협(金昌協), 김창흡(金昌翕) 등 김수항의 아이들을 제자로 받아 가르치기 시작했다.

 

1668년(41세, 현종 9년)

3월, 응교가 되어 사직하였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다가 질병을 이유로 교체되었다. 9월, 우암 송시열과 편지하여 『대학』 ‘물격(物格)’의 뜻에 대해 논하였다. 10월, 교리에 제수되어 누차 사직하였으나 허락을 받지 못했다.

10월 21일, 송준길이 임금께 이단상을 추천하였는데, 『현종실록』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경연을 열 때에는 문학(文學, 문장의 학문)을 한 선비가 없어서는 안 됩니다. 이단상은 학문이 해박하고 식견이 있는 사람인데 지금 먼 시골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이민적(李敏迪) 형제는 모두 문학을 공부한 사람들인데 한 사람은 파직되었고 한 사람은 외방에서 임무를 맡고 있습니다. 모두 아까운 사람들입니다.”

 

1669년(42세, 현종 10년)

1월, 동부승지 지제교가 되었다. 경연 참찬관, 춘추관 수찬관을 겸하였다. 2월, 병조 참지에 임명되었다. 3월, 부제학이 되었다. 7월, 병환이 심하여 임금이 약을 하사하였다. 9월 19일, 사망하였다.

『현종실록』에 실린 「전 부제학 이단상의 졸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전 부제학 이단상이 사망하였다. 이단상은 판서 이명한(李明漢)의 아들이다. 젊어서 과거에 올라 좋은 벼슬들을 두루 역임했으며 깨끗하다는 명성이 있어 동료들로부터 추앙받았다. 신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양주(楊州)에 물러나 살면서 여러 차례 불러도 벼슬을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으니, 사람들이 명리에 욕심이 없다고 칭찬하였다. 그러나 이는 그의 운명을 말하는 자가 이단상을 두고 말하기를 ‘만일 당상관에 오르게 되면 수명이 반드시 길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하여서 그가 벼슬하기를 꺼려했기 때문이다.

송준길이 경연에서 임금께 아뢰어, 부제학에 승진, 임명되었는데, 이단상이 임금께 감사함을 표하러 왔다가 서울에서 병을 치료하던 중 며칠 만에 죽었다. 이단상은 본래 송시열과 송준길에 붙어 다녔다. 송준길이 일찍이 임금 앞에서 호남 선비 정개청(鄭介淸)이 서원을 철거할 것을 요청했는데 이단상도 상소하여 정개청을 헐뜯었다. 윤선도(尹善道)가 소장을 올려 정개청을 옹호하고 이단상을 배척하면서 그의 아비 이명한이 이이첨(李爾瞻) 부자에게 아첨하여 ‘문성(文星)이 지금 덕성(德星)과 함께 있다.’라는 시를 지었음을 거론해 온 세상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이단상이 또 일찍이 상소하여 말하기를 ‘송시열의 예에 대한 논의는 정정 당당하여 백세(百世) 이후에 성인이 나온다 하더라도 의혹될 게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임금을 속인 그의 죄가 여기에서 극에 이르렀다. 이것이 어찌 이른바 소인의 거리낌 없는 짓이 아니겠는가?”

 

이단상을 죽음을 애석해하는 졸기임에도 이단상을 비판한 대목이 눈에 띈다. 이는 『현종실록』(1677년)의 편찬자들이 서인에 속한 이단상과는 정치적으로 반대편에 서 있던 남인들이었기 때문이다. 서인들이 나중에 이들 남인을 몰아내고(1680년 경신환국 때) 현종실록을 다시 편찬하였는데 이것이 『현종개수실록』이다. 새 기록(『현종개수실록』21권, 현종 10년 9월 19일)에는 졸기가 이렇게 바뀌었다.

 

“전 부제학 이단상이 사망하였다. 이단상은 이조 판서 이명한(李明漢)의 아들이고, 좌의정 이정귀(李廷龜)의 손자다. 집안이 대대로 문장과 복록(福祿)으로 온 세상에 성대하게 일컬어졌다. 일찍이 과거에 급제하여 재주가 있다는 칭찬이 점차 성해졌다. 하지만 방랑을 좋아하는 문사의 습관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효종대 말년에는 신병을 핑계로 출사하지 않고 서울에서 가까운 경기 지역에 물러나 있었다. 비록 간간이 고을에 임명되었지만 역시 오랫동안 있지 않았다. 글을 읽어 뜻을 구하고 담백하게 스스로를 지켰다. 또 스승과 친구들의 도움으로 나날이 개발되었는데, 대체로 사람됨이 총명하고 올바랐다. 이 때문에 혼미한 벼슬길에서 스스로 벗어나 인고하면서 뜻을 돈독하게 지녀, 마침내 확립하는 바가 있었던 것이다. 그가 강론한 견해는 대부분 명확하고 투철하였으므로 선비들에게 존중을 받았다. 불행하게 일찍 졸하였으니, 애석하다. 임종할 때 유언의 상소를 올려 훌륭하고 덕 있는 이를 초치하고 큰 사업에 더욱 힘쓰라고 임금께 권하였으며, 또 장식(張栻)의 말을 인용하여 남을 믿어 맡길 때는 일신의 편견을 막고, 남을 좋아하고 미워할 때에는 천하의 이치에 공변되게 하라 요청하였고, 아울러 약을 하사한 은전을 사양하였다.”

 

이 해 11월 19일, 가평 조종현에서 장사를 지냈다. 저서로 『대학집람(大學集覽)』, 『사례비요(四禮備要)』, 『성현통기(聖賢通紀)』, 『정관재집』이 있다. 문하로 아들 이희조(李喜朝)와 김창협(金昌協), 김창흡(金昌翕), 임영(林泳) 등이 있다. 이희조는 부친의 뜻과 사업을 계승하는 것을 평생의 과업으로 삼아 노력하였다. 그는 관료의 길을 외면하고 성현의 학문을 탐구하는데 전력을 다했다.

둘째아들 이하조(李賀朝, 1664∼1700) 역시 문장으로 이름을 날렸으나 37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였다. 이단상은 두 아들 외에 다섯 딸을 낳았다. 이단상 가문은 안동 김씨 가문, 정제두 가문, 여흥 민씨 가문 등 당시의 유력 집안과 혼인관계를 맺어 17세기 서울 지역 명문 집안의 중심이 되었다.(우경섭 462)

1672년에 현석 박세채(朴世采)가 행장을 완성하였다. 아들 이희조(李喜朝)가 연보를 지어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에게 수정을 부탁하였다. 1676년 김수항이 지문을 지었다. 1680년 민정중(閔鼎重)의 건의로 이조참판 겸 경연, 홍문관·예문관의 제학에 추증되고, 다시 이조판서로 추증되었다.

1682년에 시집과 문집이 간행되었다. 1702년에 인천지역 유생들이 이단상을 기리며 학산서원 설립을 추진하였다.(우경섭 474) 이곳에 아들 이희조와 함께 배향되었다. 1706년에 이희조가 청풍 부사로 재직하면서 별집과 연보를 간행하였다. 1743년에 영조 임금이 ‘문정(文貞)’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이단상은 율곡학파 안에서 일가를 이루었다. 율곡학파는 이이가 주장한 ‘기승리발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원형 그대로 받아들이는 직계 계열과 좀 더 자유롭고 개방적인 계열이 있는데, 후자에 이재 계열과 이단상 계열이 있다. 이단상 계열은 김창협, 김창흡, 임영, 박필주 등의 학자들이 있다. 이들 낙론계열의 학자들은 개방적이고 진취적인 입장을 유지하며, ‘리’를 ‘도리’가 드러나는 것’으로 보고, 칠정(七情)은 ‘기’의 틀(氣機)‘이 발동한 것으로 본다.(김승영 2)

 

<참고자료>

『효종실록』

「이단상 행력」, 『한국문집총간 인물연표』(http://www.krpia.co.kr/)

「전 부제학 이단상의 졸기」, 『현종실록』17권, 현종 10년 9월 19일

「전 부제학 이단상의 졸기」, 『현종개수실록』 21권, 현종 10년 9월 19일

권오혼, 「이행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

김승영, 「율곡학파의 이단상 계열이 이해한 ‘리’의 의미」, 『동양철학』39, 2013

우경섭, 「인천 학산서원과 이단상 ·이희조 부자」, 『한국학연구』38, 2015

이장희, 「이단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

조동영, 「이단상」, 율곡학프로젝트 <율곡학파 인물들>